알아가며(자료)

조선시대 궁중악기

Gijuzzang Dream 2008. 10. 13. 18:15

 

 

 

 

 

 조선시대 궁중악기

 

 

조선의 궁중음악은 유교의 예악(禮樂)사상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정비되고 변화하였다.

유교에서 예(禮)는 자연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악(樂)은 마음의 성정(性情)을 자연과 화합시키는 것으로

예와 악의 조화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때 악(樂)은 음악과 노래와 무용을 모두 포함하는 악가무(樂歌舞)의 공연예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풍속을 변화시켜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의식을 북돋우는 데 활용되었다.

궁중에서는 각종 의례가 행해질 때마다

의례의 규모와 성격, 중요도 등에 따라 그에 맞는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같은 의례라도 시기에 따라 연주음악이 변모되었다.

 

행사 종류에 따라 종묘 · 사직 · 문묘 등의 제례에서 연주되는 제사음악[祭禮樂],

조회나 연회 때 연주되는 잔치·예식음악[宴禮樂],

왕의 행차 시에 연주되는 행진음악[行樂]으로 나눠볼 수 있다.

 

또 악풍(樂風)의 유래에 따라 아악(雅樂) · 당악(唐樂) · 향악(鄕樂)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악과 당악은 고려 때 중국 송나라의 궁중 제사음악과 연향음악을 수입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와 대별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불렀다.

아악 · 당악 · 향악은 오랜 기간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행사의 성격과 내력에 맞게 고루 사용되었다.

궁중음악은 다른 나라의 음악을 수용하여

우리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고려시대에 처음 들어온 대성아악(大晟雅樂)은

조선 세종조에 이르러 조선만의 아악으로 창조되고 크게 융성하다가

조선 후기 쇠퇴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이후 궁중제사의식이 단절되고

공자에 대한 제사인 석전제(釋奠祭)의 문묘제례악만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향악은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그리고 <여민락(與民樂)> 등이,

당악은 <보허자 >와 <낙양춘>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이 친히 짓고

세조가 제사 의식에 맞도록 간략하게 개작한 것으로

1464년(세조 10) 1월 14일에 최초로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된 이후

현재까지 500년 이상 계속 연주되고 있다.

 

 

 

편종(編鍾)

  

조선시대 대표적인 궁중악기인 편종(編鐘)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아악기로

고려 1116년(예종 11)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다.

공민왕 때에도 명나라에서 보내왔으나

1429년(세종 11) 한양에 주종소(鑄鐘所)를 두고 새 종을 만들어 내어 주로 아악에 사용하였다.

종(鐘) 하나는 약 30㎝ 미만이며 같은 크기의 종 16개가 그 두께에 따라 소리의 높고 낮음이 다르다.

 

송나라에서는 종의 크기에 따라 음계가 결정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박연이 크기는 같고 종의 두께 차이로 음계를 달리하도록 제작하였다.

 

정성(正聲) 12율과(한 옥타브 안의 열두 가지 음계)과 한 옥타브 높은 4청성(四淸聲)을

나무틀[架子]의 위·아래 두 단으로 된 가로목에 음높이 순에 따라 한단에 8개씩 건다.

종 틀은 좌우의 두 설주를 거(渴)라 하고, 위 아래의 두 가로목을 순(邵)이라 하며,

순 위에는 숭아(崇牙)가 있고, 거 위에는 업(業)을 얹는다.

업 위에는 깃[羽]을 꽂고, 또 단(端)과 벽삽(壁賚)이 있다.

 

종설주[鐘渴]는 나붙이[崎屬]로 장식하는데

아부(雅部)의 종설주는 호랑이이고, 속부(俗部)의 종설주는 사자라 하였다.

위 유물은 두 개의 사각대[방대方臺] 위에 사자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연주법은 뿔망치[角槌]로 종의 아랫부분 정면에 있는 둥근 부위[수,隧]를 쳐서 소리를 낸다.

지금은 아악 · 속악을 가리지 않고 바른손 한손으로 연주하지만,

예전에는 아악은 황종(黃鐘)부터 임종(林鐘)까지 아랫단은 바른손으로 치고,

이칙(夷則)부터 청협종(淸夾鐘)까지 윗단은 왼손으로 쳤으며, 속악의 경우는 두 손을 편한대로 쳤다.
현재 문묘제례악 · 종묘제례악 · <낙양춘> · <보허자>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편종의 16개 종의 하나로 종 몸체 위에는 투각으로 처리한 용뉴(龍鈕)가 있다.

종의 몸체 하단 전후면에는 연주할 때 각퇴로 치는 당좌(撞座)인 수(隧)를 두었다.

앞면에는 ‘黃’과 ‘昭和十三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편경(編磬)

 

 

편경은 타악기로 돌로 만들어졌다.

고려 1116년(예종 11)에 편종과 함께 들어왔는데,

등가(登歌)에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의 편경 각 한 틀,

헌가(軒架)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아홉 틀씩 들여왔다.

 

공민왕 때와 조선조 태종 때에도 명나라에서 들여와 궁중 제례악에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재료를 중국에서 수입해서 만들었으나

1425년(세종 7)부터는 경기도 남양(南陽)에서 경(磬)에 쓰이는 돌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ㄱ자 모양으로 만든 16개의 경돌을 음높이의 순서대로 위·아래 두 단에 8개씩 붉은 줄(紅繩)로 매어 단다.

ㄱ자 모양에 길고 좁은 쪽을 고(鼓)라 하고 짧고

넓은 쪽을 고(股)라 하는데 고(鼓)가 고(股)보다 반이 더 길고 반이 더 좁다.

 

경을 매다는 배열순은

아랫단의 황(黃)· 대(大)· 태(太)· 협(夾)· 고(姑)· 중(仲)· 유(蕤)· 림(林),

윗단의 이(夷)· 남(南)· 무(無)· 응(應)· 황(潢)· 대(汏)· 태(汰)· 협(浹) 순이다
경은 두께에 따라 음높이가 정해지는데 경이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낮다.

경의 소리가 높으면, 그 돌을 갈아서 얇게 하고

소리가 낮으면 긴 쪽(鼓)의 아래 끝을 짧게 깎아 음정을 맞추는데 정확한 조율은 어렵다.

 

연주할 때는 각퇴, 즉 긴 쪽(鼓) 끝의 위 끝을 쳐야 하며

지금은 아악(雅樂) · 속악(俗樂)을 가리지 않고 한 손으로 연주하나,

예전에는 아악은 황종(黃鐘)부터 임종(林鐘)까지의 아랫단은 오른손으로 치고,

이칙(夷則)부터 청협종(淸夾鐘)까지의 윗단은 왼손으로 쳤으며, 속악의 경우는 두 손으로 편한대로 쳤다.

편경은 재질이 돌이므로 습도(乾濕)나 온도의 변화(寒暑)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되며,

현재 문묘제례악 · 종묘제례악과 〈낙양춘(洛陽春)〉·〈보허자(步虛子)〉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위 전시유물은 두 개의 사각대[방대方臺] 위에 흰 기러기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봉황머리를 조각하였다.

편경의 16개 경(磬)의 하나로 앞면에는 ‘黃’, 뒷면에는 ‘昭和十二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제례악
제례악은

하늘과 땅, 조선왕조의 역대 왕이나 공자 등에 지내는 여러 제향(祭享) 때 사용하는 의식음악을 말한다.

대한제국기까지 하늘에 지내는 원구제(圓丘祭),

땅과 곡식신에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왕실의 조상신에 지내는 종묘제(宗廟祭),

공자에 대한 제사인 문묘제(文廟祭)를 비롯하여

농사신에 지내는 선농(先農),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선잠(先蠶),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우사(雩祀) 등이

이루어졌으나 1910년 이후 거의 폐지되어 현재는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만이 전해지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되는 음악으로서

노래와 무용이 함께 한다. 종묘의 댓돌 위와 아래에 각각의 악대가 편성되며

댓돌 위의 악대는 등가(登歌), 댓돌 아래는 헌가(軒架)라고 한다.

보통 등가는 노래와 현악기 중심이고 헌가는 관악기와 타악기 중이이다.

 

음악 연주와 노래는 장악원(掌樂院)이라는 국가 음악원 소속의 남자 음악인들이 담당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세종이 친히 짓고 세조가 제사에 맞게 고친 후 1464년 처음 연주된 이래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의 각 절차마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음악을

헌가와 등가가 번갈아서 연주하고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종묘악장(宗廟樂章)>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종묘제례에서 일무(佾舞)는 군인이나 궁중에 속한 남자들 중 일정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 맡았다.

보태평에 맞춰 왼손에 약(籥)을, 오른손에 적(翟)을 쥐고 왕들의 문덕을 칭송하는 문무(文舞)를 추며

정대업에 맞춰 창(槍)과 검(劍)을 들고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를 춘다.
초기에는 악대 109명과 무원 109명 등 총 200여 명으로 장엄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으나,

여러 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현재는 100여 명으로 봉행된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및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에 지정·등록되었다

 

 

방향(方響)

 

고려 문종 때에 이미 방향업사(方響業師)가 있어서 이 악기로 당악(唐樂)을 연주한 기록이 있다.

고려 예종 9년(1114)에 들어온 송나라의 신악(新樂) 가운데에는

철방향(鐵方響) 오가(五架)와 석방향(石方響) 오가(五架)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고취(鼓吹)에도 사용되었으며,

행악(行樂)인 고취(鼓吹)에 필요한 수효 이외에도 더 많은 방향(方響)을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당악과 고취에 이 방향이 편성되어 왔으나,

현재는 이 방향 대신 아악기(雅樂器)인 편종과 편경을 사용하고 있어서 쓰이지 않고 있다.

방향은 강한 쇠붙이로 만드는데 16매의 철판(鐵板)의 크기는 같으나

그 두껍고 얇음에 따라서 음의 높낮이가 결정된다.

 

 

 

나각(螺角) · 금은입사쇠대금(鐵製金銀入絲笒)

 

 

소라껍데기로 만든 관악기의 하나로 ‘나(螺)’ 또는 ‘소라’라고도 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의종(毅宗) 때 각종 위장(衛仗)이나 의장(儀仗)의 수레 뒤에 따르던

취라군(吹螺軍)이 이 악기를 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다.

 

악기를 만드는 법은 바다에서 사는 큰 소라를 잡아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입으로 부는 입구를 만들어 끼운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朱螺]을 하여 모양을 내기도 한다.


이 악기는 낮은 외마디 소리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낸다.

연주법은 나발과 같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김을 불어넣어

입술의 진동으로 ‘뿌우―’ 하고 소리내는데, 음높이는 소라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궁중연례(宮中宴禮)와 군례(軍禮)에 사용되었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중〈정대업定大業〉의 일무(佾舞)에도 사용되었다.

지금은 태평소 · 나 발· 징 · 자바라 · 북 등과 함께 대취타(大吹打)에 편성되어 있는데

특히 나발과는 엇갈리며 번갈아 연주된다.


□ 금은입사쇠대금(鐵製金銀入絲笒)
철로 만든 대금으로 가로로 부는 악기이다.

‘젓대’라고 하는데 국악의 대표적인 관악기로

황죽(黃竹) 또는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든 옆으로 부는 피리[橫笛]이다.

대금(大魁)이라고도 하며, 시나위젓대와 구분할 때는 정악대금(正樂大魁)이라고 한다.

조선 순조 · 헌종시대의 진찬(進饌) 때에 편성된 기록이 보인다.

 

문묘제례악과 대취타(大吹打)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악(正樂) · 민속악에 널리 사용한다.

대금은 다른 횡적류와는 달리 취공부분을 연주자의 왼쪽 어깨에 올려놓고 불고,

취구(吹口)와 지공(指孔), 지공과 지공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긴 편이어서 연주에 신체적 숙달이 필요하다.
음역이 넓고 고정된 음고(音高)를 지니고 있어

합주할 때 다른 악기들이 대금의 임종(林鐘)에 맞추어 조율한다.

또, 음량이 풍부하고 비교적 넓은 취공을 입술로 조절하며 음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

국악기 중 대표적인 독주악기로도 자주 쓰인다.

 

이 금은입사 쇠대금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져 있고 당초와 학 문양을 금과 은으로 입사하여 장식하였으며

무늬 없는 쇠대금은 청공(淸孔)을 막는 갈대줄기의 얇은 막인 갈대속청까지 철로 만들어

실제 악기를 그대로 본떴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는 취구(吹口) 1개, 특유의 음색을 내는 청공(淸孔) 1개,

손가락으로 막아서 음의 높고 낮음을 조절하는 지공(指孔) 6개가 뚫려 있으며

아래 끝부분에 칠성공(七星孔)이라는 구멍이 있다.


□ 행진음악[行樂]
행악은 행진할 때 연주되던 음악을 말하는데,

궁중 소속 악대가 연주하는 행악을 일반적으로 ‘고취(鼓吹)’라고도 한다.

어가행렬의 규모에 따라 고취악대의 규모도 달라졌다.

대개 규모가 큰 대가의장(大駕儀仗) · 법가의장(法駕儀仗)에는

전 · 후부고취(前·後部鼓吹)가 함께 따랐으나

규모가 작은 소가의장(小駕儀仗)에는 전부고취만 따랐다.

 

고취악대의 악기편성은 왕비의장을 제외하고 모두 동일하며

박 · 당비파 · 퉁소 · 대금 · 당적 · 장구 · 교방고 · 피리 등으로 구성된다.

고취악대와 더불어 나발 · 나각 등의 취각(吹角: 조선후기 내취,內吹)과

징, 북 등의 금고(金鼓)도 행렬을 따랐다.

 

왕이 여(輿)를 갈아탈 때 음악을 시작하고 왕이 연에서 내려 목적지로 들어서면 음악을 그쳤다.

이때 왕이 궁을 나설 때와 들어설 때 궁궐 내에서는

전후고취(前後鼓吹)라는 별도의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박(拍) 

 

박(拍)은 여섯 조각의 단단한 나무 위에 구멍을 뚫고 줄로 묶어서

아래 위로 폈다가 오므리면서 딱 하는 소리를 내게 되어 있는 악기이다.

이것은 음악의 시작과 끝에 쓰이기도 하며,

궁중 무용할 때 춤사위의 변화를 지시해 주는 역할도 하는 타악기(打樂器)이다.

1500년 전 중국 진(晉)나라의 창작품으로

우리나라에는 1119년(고려 예종 14) 송나라에서 들어와 궁중제례 및 연례에 사용되었다.

 

 

축(柷)

이 악기는 나무상자 모양을 한 것으로 막대기를 두들겨서 연주하는 타악기의 하나이다.

축은 음악의 시작을 알려주는 악기로 사용된다.

고려 예종 11년(1116) 이후 우리나라에서 아악과 전정헌가(殿庭軒架)에 사용되었다.

음악의 시작을 나타내는 축(柷)은 동쪽에 놓고,

음악의 끝남을 신호하는 어(敔)는 서쪽에 놓는데,

지금도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에 편성되어 사용되고 있다.

형태는 녹색을 칠한 윗면이 넓고, 밑면이 좁은 육면체로 윗면 가운데 구멍이 있다.

이것을 간단한 대좌 형식의 받침대가 받치고 있다.

 

 

진고(晉鼓)

 

타악기 중에서도 가장 큰 북이다.

현재 문묘(文廟)와 종묘 제향악(宗廟 祭享樂)의 헌가(軒架)에 사용된다.

종묘와 영녕전 헌가의 아헌악(亞獻樂)인 정대업(正大業)을 시작할 때 진고십통(晉鼓十通)을 치고,

종헌(終獻)인 정대업을 시작할 때는 진고삼통(晉鼓三通)만 친다.

 

 

 


󰡒���� 참고문헌
1.『국역악학궤범』(민족문화추진회, 1979)
2. 전시안내도록『국립고궁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2007)

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유물탐구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