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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통(小銃筒)-보물 제856호 /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보물 제860호

Gijuzzang Dream 2008. 10. 13. 17:23

 

 

 

 

 

 

 

 소총통(小銃筒) - 보물 제856호

 

 

 

 

소총통은 도화선에 손으로 불씨를 붙이는 휴대용 화기의 일종으로

전체 길이 75.5㎝, 지름 1.6㎝로 조선 선조 때 만들어졌다.
승자총통에서 진전된 형식으로 승자총통보다 길고 대나무와 같은 마디가 고르게 연결되어 있다.

총신은 약간 구부러져 있는데,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힘을 받아 멀리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총신이 길어 화기가 새지 않고 탄환이 명중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화약을 넣는 약실을 약간 도톰하게 하였다.

 

소총통은 조선중기에 만들어진 휴대용 화기로

조선시대 화기의 발달수준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려말 혼란기를 극복한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는데,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고려말 공민왕대를 이어 화약과 화기개발에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화기의 종류는

대개 성종 5년(1474)에 편찬되어『세종실록』에 실린 총통도(銃筒圖)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병기도설(兵器圖說)」에서 찾을 수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총통은

총통완구(銃筒碗口), 장군화통(將軍火筒), 일총통(一銃筒), 이총통(二銃筒), 삼총통(三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사전장총통(四箭長銃筒), 팔전총통(八箭銃筒), 세총통(細銃筒), 철신포(鐵信砲),

신제총통(新製銃筒) 등 11가지인데,

총통완구는 석환(石丸)을 발사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화살을 발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단 철신포는 발사물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11가지 총통 중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진 신제총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 27년(1445)에 이르면 조선의 총통 성능이 크게 개선되는데,

화살의 사거리가 이전 보다 2배가량 늘어났고, 한꺼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총통의 내부 구조를 개량시켜야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 27년 이전의 조선 총통의 내부구조는

자구(?口)에서부터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다가

화약이 폭발하는 곳인 약통에서는 다시 넓어지는

무격목형총통(無激木形銃筒)의 내부구조와 같은 형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세종조에는 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총통의 약통 앞부분에 격목을 끼울 수 있는 격목통을 만들고

그 앞부분에 화살을 끼우는 자?가 있도록 한 격목형총통(激木形銃筒)의 내부구조로 바뀌었다.

격목형총통의 내부구조를 갖춘 총통은 약통에서 화약이 폭발할 경우,

높은 압력이 될 때까지는 연소가스가 새지 못하다가

갑자기 높은 압력에서 격목이 격목통에서 뛰쳐나가며 자에 있는 화살들을 발사시킴으로써,

무격목형총통보다 적은 화약으로 여러 발의 화살을 더 멀리 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총통의 뒷부분에 있는 모병(冒柄)에는

길이 700~800㎜의 둥근 나무(柄木)를 박아 손잡이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격목형의 총통은 1579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승자총통(
勝字銃筒)에서

화약을 압축시키는 흙(土隔)을 사용하는 토격형(土隔形)의 내부구조로 바뀐다.

토격형총통의 내부구조는 자의 내경과 약통의 내경이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자총통은 선조 8년(1575)부터 선조 11년(1578)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金猩)에 의해 제작된 화기로서,

기병과 보병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화기였다.


이서(
李曙, 선조 13년(1580)~인조 15년(1637))의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승자총통조(勝字銃筒條)에는
“중약선(
中藥線) 3치, 화약 1낭, 토격(土隔) 6푼으로 하여

철환 15개 또는 피령목전(皮翎木箭)을 발사하면 600보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승자총통의 형태는 통신(
筒身), 약실(藥室), 손잡이(柄部)의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통신은 화살이나 탄환을 장전하는 부분으로, 내부는 원통이며 외형은 대(竹)마디로 되어 있다.

이 대마디는 8~9㎝ 간격으로 6~7개가 약실과 연결되어 있다.

또 약실은 깊이가 약12㎝ 정도로 후부의 중앙에서는 혈선(穴線)이 약실을 통하게 되어 있다.

약실 뒤에는 자루가 달리는데 여기에는 나무로 된 손잡이가 끼워지기 때문에 멈치못 구멍이 뚫려 있고,

대개의 경우 이 손잡이에 그 총통의 명문이 새겨지는 것이 통례이다.

승자총통은 계속 개선되어 차승자총통(
次勝字銃筒),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으로 발전하였다.

차승자총통은 총구부위가 위로 휘어 있어, 탄환을 더욱 멀리 날아가게 할 수 있었으며,

별승자총통은 통신이 길어져 화기가 새는 것을 막아 정확성을 높였지만 총구부위가 휘어지지는 않았다.

이 승자총통의 발전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소총통(小銃筒)이다.

소총통은 통신자체를 길게 했을 뿐 아니라, 위로 완만하게 휘어 있어,

높은 정확성과 사거리의 확장을 모두 취할 수 있었다.

소총통은 조선 중기까지 꾸준히 진행된 조선시대 화포기술이 기병과 보병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하고 고성능의 휴대용 화기의 개발에 이르게 된

조선왕조의 화기 기술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856호 소총통은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며, 총길이 75. 5㎝, 총신길이 50. 5㎝, 약실길이 15. 4㎝, 병부길이 9. 6㎝,

구경 1. 6㎝로서, 통신에는 총구를 둘러싼 구연대(口緣帶)를 제외한 대마디(竹節) 7개를 시조(施條)하고,

약실은 약간 도톰하게 하다가 이어 손잡이에 이르러서는 가늘게,

그리고 끝부위는 대선(帶線)을 두르면서 마무리하였다.

손잡이(柄部)에는

‘萬曆十九年十月日小銃筒重五斤火藥三濱匠人金(만력19년 10월일소총통 중5근 화약3 전장인 김)’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만력 19년은 명나라 신종 19년으로 우리나라 선조 24년(1591)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총통의 무게는 5근이며 화약은 3전이고 화포장은 김이라 기록하여,

제작연대와 화약의 용량, 제작자 등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소총통은 우리나라 휴대용 화기 중 그 명문이 정확할 뿐 아니라

그 보존상태 또한 완전하여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 화포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문헌
-『세종실록』
- 채연석, 『한국초기화기연구』, 일지사, 198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3 - 조선초기의 정치구조, 199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디지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 보물 제860호  

 

 

 

 

 

고려말 공민왕 말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화약병기 제조 수준은 화약을 제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설치된 화통도감(火通都監)에서

화약을 원료로 하는 장군포(將軍砲), 이장군포(二將軍砲) 등 거의 20종에 달하는 화기가 제조되어

여말 왜구를 격퇴하는데 동원될 정도였다. 이후 잠시 화기 개발이 보류되다가,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화기제작은 다시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태종 원년(1401) 윤3월에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군기주부로 발탁되었고,

태종 4년에는 군기감별군(軍器監別軍)이 편성되고 화통군(火通軍)이 증원되었다.

태종 7년에는 화약의 성능이 두 배로 증가하였고, 태종 9년 정월에는 화차(火車)가 제작되었는데,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씩을 장탄한 동통(銅通) 등을 수레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으로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종 13년(1413) 경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가지 완구(碗口) 20문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돌로 만든 탄환(團石)을 발사하는 것으로

명나라 초에 만들어진 잔석포(盞口砲)를 본떠서 만든 화포였다.

이 때에 만들어진 완구는 사거리 150보 정도였다. 완구는 계속 발전하여,

이서(李曙, 선조 13년(1580)~인조 15년(1637))의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완구조(碗口條)에는

대완구(大碗口) · 중완구(中碗口) · 소완구(小碗口) · 소소완구(小小碗口) 등으로 구분되는 등

조선중기에 이르면 종류가 더욱 늘어나고 사거리도 350~500보에 이르게 된다.

선조조에 군기시(軍器寺)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바로 이 대완구로 발사하는 인마살상과 공성(攻城)을 겸한 무기였다.

도화선을 감는 목곡(木谷),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 얇은 철 조각,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들로 장전하게 되어 있으며,

화포의 일종인 완구(碗口)를 이용하여 발사된다.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이었던 박의장이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화포식언해』에서 비격진천뢰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체형은 박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으며,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내부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木谷)이 있고,

또한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馮鐵)이 채워진다.

특히 목곡은 폭파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단목(檀木)을 사용하며,

그 골을 나사모양으로 파서 폭파를 빠르게 하고자 할 때에는 열 고비로,

더디게 하고자 할 때에는 열다섯 고비로 하되,

중약선(中藥線)을 감아 죽통에 넣어 한 끝은 죽통 아래 중심에 꿰고,

또 한 끝은 죽통 위 개철 밖으로 내되 두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이 때에 죽통과 개철 주위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완구에 실어 발사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 완구 심지에 불을 붙인다.”

이를 알기 쉽게 다시 쓰면

겉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속에는 나무에 도화선(화승, 火繩)을 감는 목곡(木谷)을 파고

그 목곡이 들어갈 죽통(竹筒), 그리고 쇳조각인 빙철(馮鐵) 화약이 들어 있는데,

목곡의 흠을 늘이면 도화선이 길어져 폭파시간이 길어지고, 줄이면 짧아진다는 것이다.

 

비격진천뢰를 대완구(大碗口)에 장전한 후 혈선 즉, 도화선에 점화하고,

이어 대완구 혈선에 점화 발사하면 목표지점에 탄착(彈着)하여 폭파한다고 했으니

이는 곧 폭파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포탄이었다.

이 비격진천뢰가 공성용으로 사용되었고, 그 성능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선조수정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9월 정사조에는

임진왜란 당시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이 경주를 수복하는 기사가 나온다.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 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

비격진천뢰는 그 제도가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로 발사하면 5백~6백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즉,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성안으로 날려 보내면, 원하는 시간에 폭발하여

빙철의 쇳조각이 사방으로 날아 밀집한 적군을 한꺼번에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이다.

뛰어난 살상효과와 심각한 공포감을 자아내는,

당시로서는 매우 훌륭한 공성용 화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조선왕조가 가지고 있었던 화포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왕조가 이룩한 과학기술의 저력은 해전(海戰)과 육전(陸戰)에서

고성능의 화기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왜란 당시 절대 열세의 군사력을 상쇄시킬 수 있게 하였다.

폭파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던 포탄 비격진천뢰는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었던 과학기술의 힘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860호 비격진천뢰는

재질은 무쇠이며 지름 21㎝, 둘레 68㎝, 죽통구경 5.2㎝, 개철구경 7.6㎝×8.4㎝, 약혈지름 6.2㎝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아

문헌과 비교할 수 있는 국방 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되며,

화포 연구와 탄환 발전사에 관한 사료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참고문헌
-『고려사』백관지,『태종실록』,『선조수정실록』
- 허선도, 『한국화기발달사』, 육군사관학교 군사박물관, 196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3 - 조선초기의 정치구조, 199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디지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유물탐구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