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생명, 그 존엄성을 노래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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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은 외침들의 책이다. 불교와 시와 환경과 야성 정신들에 대한 외침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선시(禪詩)와 중국의 시인들, 그리고 불교와 동양의 고대 신화들을 아우르며 생태적 사유를 펼쳐내는 게리 스나이더의 산문집이다.
“지구 전체는 하나의 커다란 명판(銘板)으로서 현재와 과거의 소용돌이치는 힘들이 수없이 겹쳐진 자취”(『야성의 삶』)를 담고 있다.
스나이더의 글은 이 자취들을 선적 직관의 힘으로 관통하며 나아간다. 그의 선적 직관은 생명의 있음, 생태와 영성(靈性), 그리고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하나로 아우른다. 그의 사유는 지극히 동양적이고 끊임없이 불성(佛性)을 강조한다.
중국 시가 “시의 중심을 인간성과 영혼과 자연의 삼각대 안에서 발견했을 때”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에서 불성(佛性)을 보고, 현존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세계를 “이 복잡하고 기품 있는 윤회의 극장”으로 볼 때 그 점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야생이란 길들지 않은, 가축화하지 않은 동물들, 재배되지 않은 식물들, 거주하지 않고 경작되지 않는 땅들을 가리킨다. 야생의 사람이란 법이나 합의와 관습에 제지당하지 않고, 그것에 복종하지 않고, 본성에 따라 꾸밈없고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1930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 농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철따라 숲에서 일했다. 그가 중노동과 명상과 시작(詩作)으로 이루어진 삶을 꾸리고, 평생을 일관되게 생태지향적 감수성으로 사물을 대하는 것은 어린시절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자연에서 길러진 것이다. 그는 좌익 성향의 무종교주의자인데, “아주 어릴 적부터 아메리카 인디언의 영적인 수행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아울러 자연과 친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안의 영성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생태주의자다. 그가 문명에 길들지 않는 야성을 그 바탕으로 삼는 사유를 갖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스나이더는 지구에서 사라지는 생물 종과 생명의 존엄성을 노래하는 최초의 생태 시인이며, 모든 생명체를 자비심으로 감싸 안는 성자다. 그는 일체의 문명적인 것의 병폐에 물들지 않은 상고시대 자연인의 깊은 성찰을 갖춘 “자연계와 시의 부족 연방들의 원로”다. 그러나 그런 세계로부터 도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드라망에 동참해야 합니다!”라고 쓸 때, 이 단순한 어구 속에 담긴 삶의 통찰은 날카롭고, 제시된 공안(公案)은 산과 같은 무게를 담고 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우리의 식탁은 우리가 세계에 가하는 살상(殺傷)의 뜻을 묻고 배우는 들판이다. 짐승의 배설물에 뭉쳐 있는 뼛조각들, 들풀 위에 흩어져 있는 새의 깃털들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 생명의 영위가 다른 약한 동물의 살상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웅변한다. 우리는 이 엄혹한 사실 세계에서 도망갈 수가 없다. 사람은 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침투적인 야성의 생명체계 그물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 생존경쟁을 하며 저보다 약한 생명체의 피와 살을 취한다. 자연은 생명체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다.
자연은 평온한 듯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붉게 물든 자연”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잡아먹는 것과 잡아먹히는 것 사이의 도덕적 우열은 없다. 스나이더는 야성의 자연계에서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 사이, 녹색의 일차 생산자인 식물과 분해자로서의 균류(菌類)나 기생충 사이, 심지어 ‘생명’과 ‘죽음’ 사이 중 굳이 어느 한쪽을 더 중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태학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생물을 살상하지 말라’는 계율과 생태학적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독립적인 여러 종(種)들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하다. 종들 사이의 조화는 적절한 에너지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나이더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살아 있는 많은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써 산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숨이 끊어질 때 몸을 땅의 원소로 돌림으로써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며, 동시에 다른 생명체의 “밥”이다.
생태계라는 만다라 안에서 모든 생명체는 궁극적으로 동등한 관계이며, 우주적 에너지의 순환체계 안에 들어 있다. 사람이 무분별하게 다른 생명체를 살상하는 일은 이 질서를 깨트리는 짓이다. 이로 인해 생태계에서 수많은 종이 사라졌고, 먹이사슬의 고리가 군데군데 끊겼다. 이것이 미래에 가져올 결과는 생태계 공멸의 위기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서로 삶을 꾸리지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인드라망(網)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나의 밖에 있는 다른 생명들은 내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며, 타자에게 구현된 자아는 나의 수많은 자아다. 그러므로 이 생명체들이 서로 자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자비심은 “상호관련성, 연약함, 어쩔 수 없는 덧없음, 그리고 장대한 자연 과정의 지속성과 그 궁극적인 공(空)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솟아나는, 깨달은 마음의 산물이다. 타자에 대한 자발적 자비심은 우리로 하여금 “생태적 윤리의 길”로 나서게 한다. 생태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 현상계가 “모든 것을 추동하는 생물적 욕망과 생물적 필요의 영역”이지만, 죽고 죽임을 넘어서서 “자연계 전체에 걸친 공동진화, 공생, 상호원조와 지원, 상호 관련, 상호의존”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스나이더는 이런 사유의 바탕 위에서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세계 정부에 대한 저항의 길에 나서라고 말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군비(軍備)에 기여하는 직업을 피할 것, 입대하지 말 것,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말할 것” 등을 제시한다. 경제 성장을 좇는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문명은 토양을 파헤치고, 동물들을 무차별로 살상하며, 목재를 벌채함으로써 삼림을 파괴한다. 게리 스나이더는 생명과 생물체를 파괴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그 모든 반생명적 움직임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며, 반면에 자연과 하나 된 합일의 삶을 사는 원시 소수부족의 문화와 언어를 지지한다. 애리조나 주의 파파고족은 꿈속에서 캘리포니아 만에서 날아온 새들, 매, 구름, 바람 혹은 붉은비거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스나이더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종(種)을 초월하는 그런 사랑스러운 주의력과 인내심을 배울 수 있을까요 ? 어떤 수행을 거쳐야 우리는 그냥 꿈이 아니라 그들의 ‘노래’에 맞춰 우리를 아름답게 조율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 물음은 이 책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 2008 10/14 위클리경향 795호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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