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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사회는 오늘날과 달리 음악가를 천대하였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 하더라도 대부분 관청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자기 고유의 음악 세계를 추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음악가의 이름이나 음악세계, 그리고 한 예술인으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오직 고매한 영혼으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간 인물이 있다. 음악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올린 김성기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당시 문사(文士)들이 그를 기억해냈을까? 여기 그의 삶을 소개한다.
본래 김성기(金聖基, 1649~1724)는 상의원(尙衣院)의 관노(官奴)로 활 만드는 장인바치를 하였다. 그는 음율(音律)을 너무 좋아하여 장인바치의 임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을 따라 거문고를 배워 정교한 연주법을 터득한 다음, 장인바치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장악원의 악공(樂工)이 된다. 처음 김성기의 음악 스승은 왕세기(王世基)였다. 스승 왕세기가 김성기에게 그 비법을 전해 준 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김성기는 이를 배우기 위해 밤마다 왕 선생의 집으로 가서 창 앞에 귀를 대고 엿들어 이튿날 아침이면 왕 선생의 신곡을 하나 착오 없이 옮길 수 있었다. 왕 선생은 매양 그것을 의심쩍게 여겼다. 어느 날 밤에 왕 선생이 거문고를 타다가 곡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히자 엿듣던 김성기는 놀라 땅에 넘어졌다. 이에 왕 선생은 그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고 자기 작품 전부를 김성기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거문고에 미쳐 새로운 곡조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성기. 마침내 스승은 제자의 음악적 열정에 탄복한 나머지 자신이 지은 모든 작품을 김성기에게 전해준다. 이후 김성기는 이를 습득하여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전문 연주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김성기는 이름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신곡(新曲)을 만들어 후배 음악인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 남아 있는『어은보(漁隱譜)』와『낭옹신보(浪翁新譜)』가 바로 김성기가 작곡한 악곡집이다. 김성기가 만든 이러한 신곡은 다른 연주자에게도 인기가 높아 서울에 김성기의 신악보(新樂譜)가 유행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기는 당대 최고의 가객(歌客) 김천택(金天澤)과도 친한 사이였다. 당시 김천택의 노래와 김성기의 거문고 연주는 환상적인 앙상블을 이룰 정도로, 당시 애호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김성기는 전문적인 작곡가 겸 연주가다. 그런 점에서 그는 관청에 예속된 음악가가 아닌 자신의 음악세계를 추구한 전문 음악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음악적 성취를 신분을 뛰어넘어 전해주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악공은 물론 선전관 벼슬의 이현정(李顯靖)과 왕족인 남원군(南原君)에게도 거문고를 가르쳤던 것이다. 정래교(鄭來僑, 1681~1757)의 <김성기전>을 보면, “그는 거문고는 물론 퉁소와 비파에도 능하여, 신성(新聲)을 짓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뒷날 솜씨 좋은 악공들은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는 평을 얻을 정도라고 김성기의 음악적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
장악원의 악공으로 있으면서도 ‘사람됨이 강개하고 꿋꿋하여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을 지녔으며, 인품이 정결하고 말수가 적고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성격과 달리 그의 음악은 많은 사람과 호흡하였다. ‘부귀한 사람들이 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이 늘 수십 인’이나 될 정도였고, ‘손님이 모여 잔치하는 집에 다른 예인(藝人)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김성기의 연주가 빠지면 험으로 여길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기는 수준 높은 음악세계를 위해 현실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당대인의 음악 취향에 적극 호응하고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에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던 김성기는 음악계에서 홀연히 은퇴하고 만다.
그가 은퇴한 일화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김성기의 은퇴는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많은 사대부를 죽음에 몰아넣고 공신에 봉해진 목호룡(睦號龍, 1684~1724)의 초청과 관련이 깊다. 당시 정치권을 발깍 뒤집어 놓은 목호룡은 본래 궁노(宮奴)였는데, 역모사건을 고발하여 많은 노론계 인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목호룡이 자신의 패거리를 모아 잔치를 벌이는데 사람을 보내어 김성기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김성기는 목호룡의 강권에 응하기는커녕 연주하던 비파를 집어 던지며, “이 모임에 내가 없다고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내 듣기로 너의 주인은 고변(告變)을 잘 한다고 하니, 악공 김성기가 역모를 한다고 고하여라”고 하면서 심부름 온 자를 크게 꾸짖고 마침내 음악계를 떠나버렸다.
김성기는 늙어 서울 도성을 떠나 음악을 접고 서강(西江)의 작은 집에 숨어 지냈다. 호를 조은(釣隱)으로 짓고, 틈이 나면 고기를 잡으며 간간이 퉁소를 불었다. 하지만 남 앞에 나아가 연주하는 법은 좀처럼 없었고, 간혹 마음에 맞는 사람이 오면 퉁소를 불어 함께 즐겼지만 몇 곡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주 솜씨는 녹슬지 않아 달밤에 퉁소를 불면 그 애원 처량한 소리가 밤하늘의 구름에까지 닿았고, 강둑을 지나면서 듣는 이들은 발길을 멈추고 떠날 줄 모를 정도로 사람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처자식은 평생 굶주림을 면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가족의 지원과 지지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신만의 음악에 골몰하고 자신이 지닌 음악의 영혼을 지키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도록 뒤를 굳건하게 밀어 준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김성기가 죽음에 가까워지자 주위에서 비파를 듣고 싶어 한 번 뜯게 하였다. <영산곡(靈山曲)>을 변조(變調)하니 모두 그의 빼어난 솜씨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죽음을 앞에 두었음에도 그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시대를 울렸던 것이다.
김성기의 죽음과 관련하여 신익의 <증이현정서(贈李顯靖序)>는 특이한 내용을 싣고 있다. 김성기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중략- 김성기가 죽자 두 제자는 그 시신을 지고 광릉(廣陵)에 장사를 지내니 떠가던 구름이 변하고, 산 안이 어둑해지며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었다. 서로 울면서 거문고를 잡고 배운 곡을 연주하니 곡을 마치기도 전에 비풍(悲風)이 소리 내며 일어났다.” 김성기는 사후에도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이 세상을 떠났다. 당대 최고의 가객이자 시대를 뛰어 넘은 영원한 조선의 음악가 김성기, 그는 참으로 행복하지 않았을까. -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 사진,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 월간문화재사랑, 2008-1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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