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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 전시이야기

Gijuzzang Dream 2008. 10. 3. 15:33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전시와 금성당(錦城堂)

 

 민간 신앙의 생명력을 허(許)하라 !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시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는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제작된 삼국지 관련 자료 150여 점을 선보여

중국에서 건너온 소설 『삼국지(三國志)』가

어떻게 우리의 문화에 흡수되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역사적으로 널리 인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친숙하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 대중문화로까지 전파되었는데,

이번 전시에서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을뿐더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진통을 일으키는 종교문제, 전통 민간신앙과 풍속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 준다.

 

 

 

요즘 사회가 종교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공직자 사회의 일부 종교 편향 언행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개인의 종교 자유가 헌법상에 확립되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나라에서 정한 국교(國敎)가 있어

그 종교로 백성의 통합을 이루고자 한 경우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나라의 국교로 대표성을 띠었다. 이들 종교는 나라를 통치하는 데 커다란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한 한 나라에 사는 수많은 이들이 하나의 종교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의 삶을 맡기지는 않았을 터.

각각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각자 나름의 종교 성향이 있었고(요즘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따른 민간종교가 우리네 문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무속 신앙이다.

 

무속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조선 말기에는 심지어 『삼국지』속 등장인물이 경배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삼국지는 어떻게 국가의 신앙이 되고 민간신앙, 대중문화로까지 전파되었을까?

 

 

『삼국지(三國志)』의 탄생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삼국지』는

나관중(羅貫中, 1330?-1400경)의『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3세기의 정사(正史)『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정사『삼국지』는 진(晋)나라의 사료 편찬관 진수(陳壽, 233-297)가 280년 편찬한 역사서로,

「위서」30권,「촉서」15권,「오서」20권의 총 6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의 구성에서 보이듯『삼국지연의』가 위(魏), 촉(蜀), 오(吳) 삼국 중 촉을 정통으로 하는 것과 달리

공식적 역사기록으로 인정받는 정사『삼국지』는 위나라를 한(漢)의 정통으로 보고 서술하였다.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 진수(陳壽) 지음, 배송지(裵松之) 註,

1739년(淸, 건륭 4), 목판본, 28.4×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후한이 기울던 189년부터 진나라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던 280년까지의 역사를

국가별로 기록한 기전체(紀傳體)로 서술되었으며, 주로 위(魏)를 중심으로 하여 소략하게 기록되었다.

429년(宋, 원가 6) 중서시랑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宋 문제(424~453재위)의 명에 따라

'정사(正史)'에 주석을 달아 새로 편찬한 책이다.

140여 종의 사서를 사료로 인용하여 누락된 사실의 수록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내용이 풍부하고

삼국지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영향을 끼쳤다.

총 65권 14책 중 위지(魏志) 8책, 촉지(蜀志) 2책과 오지(吳志) 4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여기에 민간의 야담과 설화가 덧붙게 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삼국지연의』는 元대에 등장한 것이다.

 

元 말에 활동했던 나관중은『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를 기본틀로 삼고,

정사『삼국지』,『삼국지주(三國志注)』,『후한서(後漢書)』등을 참고로 해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완성한다.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

종이, 인쇄술 발달되고 元대에 출판업이 성행하면서 출판되었는데, 삼국 고사의 초기형태를 보여준다.

위에 그림이 있고 아래에 글이 적힌 형식의 그림책으로

'평화(平話)'는 강사화본으로 역사이야기 대본을 뜻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明대 가정본(嘉靖本), 전체 24권 240책

明 가정 임오년(壬午, 1522)에 간행된 것으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

"진평양후진수사전, 후학나본관중편차(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 쓰여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주왈교본(周曰校本), 전체 12권 240책

明대 만력 연간에서 가장 이른 판본인 주왈교본은 유세덕에 의해 모두 4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중 주왈교본 갑본과 만권루본으로 알려진 주왈교본 을본이 대표적이다.

10여 항목의 인물과 고사의 묘사가 더 들어 있는데 수회에 걸쳐서 삽입되어 있다.

그 가운데 관삭(關索) 이야기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후 明 말까지 여러 판본이 출간되었으나,

淸나라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모종강(毛宗崗)과 그의 부친 모륜(毛綸)이

가정본[嘉靖本, 1522년에 판각된『삼국지연의』의 최초 판본]에 수정을 가한

모종강 평『삼국지연의』가 가장 유행하는 판본이 되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모종강본(毛宗崗本),

(위) 한글번역필사본 -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

(아래) 사대기서 제1종 - 중국사회과학원 소장

강희 연간(1662~1722) 모종강(毛宗崗)과 그의 부친 모륜(毛綸)이

明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에 수정과 평점을 가하여

60권 120회의 모종강비평 <삼국지연의>로 개작하였다. 3백년동안 세간에서 가장 유행한 판본이며,

많은 부분 유비를 중심으로 한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고

조조에 대한 찬양성의 평가를 삭제하여 봉건사상과 정통론은 강화되었다. 

 『신간교정고본대자음석 삼국지전통속연의(新刊校正古本大字音釋 三國志傳通俗演義)』

조선 16-17세기, 목판본, 32×20.5㎝,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

중국 明대의 주왈교(周曰校)本 갑본을 저본으로 하여 구두점을 일괄 삭제하여

다시 1567년에 간행된 탐라 간본의 후쇄본으로,

현존하는『삼국지연의』중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후쇄본으로 추정된다.

 

  

이후『삼국지연의』는 중국을 넘어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반을 휩쓰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삼국지 역본만 400종… 뭘 봐야 하나?

 

전문가들, 원문 내용과 분위기 잘 살린 김구용, 황석영, 정원기 역본 추천

 

황충 한승, 동탁 중영, 강유 백약, 관우 운장. 장비 익덕, 제갈량 공명,

조운 자룡, 유선 공자, 유비 현덕(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삼국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국지>는 중국의 고전이면서도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각색되고 읽힌

 <삼국지>는 중국의 고전이면서도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각색되고 읽힌

작품이다. 중국에서 <삼국지>가 장편소설 <삼국지연의>로 집대성된 것은

원말 명초 무렵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반도의 고려와 대륙 사이의 활발한 교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이미 그 무렵 우리나라에도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학계의 보고다.

‘삼국지 한국어판본 연구’에 참여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윤진현 박사는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 자료에 따르면,

조선 선조 2년(1569)에 기대승의 상계(上啓 · 조정이나 윗사람에게 사정이나 의견을 아룀)에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이후 허균의 <성소부부고>, 김만중의 <서포만필>, <정조실록> 등

여러 문헌에도 삼국지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면서

“특정 문헌이 전래돼 인용, 언급되기까지 시간을 감안한다면

<삼국지연의>의 전래 시기를 조선 전기로 잡아도 무방하다”고 설명했다.


영화 ‘적벽대전 2’ 개봉, 매출 급증


요즘 극장가와 출판계에 <삼국지> 바람이 거세다.

1월 22일 개봉한 오위썬(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 2>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소설 <삼국지>의 판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영화 개봉에 맞춰 황석영의 <삼국지>(전 10권) 프로모션을 진행한 출판사 창작과비평은

“지난해 여름 <적벽대전> 1편이 개봉했을 때도 <삼국지> 매출이 50% 증가했는데,

이번 <적벽대전 2>의 개봉으로 1월 한 달간 5만 부 이상이 판매됐다”고 밝혔다.

이문열의 <삼국지>(전 10권)를 펴낸 민음사도

“2008년을 제외하고 매년 한 달 평균 2만 부 정도가 판매됐는데,

영화가 개봉된 올 1월부터 2월 11일 현재까지 무려 12만592권이 팔렸다”고 전했다.

이처럼 영화로 <삼국지>의 일부(적벽대전 편)를 본 관객은 <삼국지> 전체를 보려는 욕구에서

앞다투어 소설을 찾고 있다. 문제는 국내에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삼국지>가 있다는 것.

 

현재 알려져 있는 <삼국지> 역본은 무려 400종에 육박한다.

이 중 3분의 2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판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삼국지는 어린이용 텍스트가 아니라는 견해도 적잖다.

도원결의와 같은 인상적인 장면이 전통적인 붕우유신, 교유이신의 이념과 결합해

교육용으로 재편됐다고 볼 수 있지만 어린이가 읽기엔 너무 길고,

축약본으로는 그 본령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삼국지>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텍스트라는 점이나 철저한 검증 없이

대개 출판사의 기획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실 박태원, 박종화, 정비석, 황석영, 이문열, 김홍신, 장정일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스타작가들은

한 번 이상씩 <삼국지>를 출간했다. 김구용, 황병국 같은 한학자도 <삼국지>를 펴냈다.

이 중 가장 많이 판매된 판본은 이문열의 <삼국지>다.

민음사의 강미영 팀장은 “1988년 초판을 발행해 지금까지 1700만 부가 팔렸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대학입시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필독서로 광고되면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게 주효했다.

제1권은 2002년 2월까지 초판 19쇄와 신조판 81쇄를 합해 총 100쇄를 발간했을 정도다.

하지만 작가의 명망과 상업적 성공에도 이문열 판본은 간행 초기부터
독자와 학계로부터 많은 오류가

있음이 자주 지적됐다. 2002년 개정판은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가다듬어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개정판에도 여전히 심각한 오류가 적잖았다.

중국의 동포 작가 리동혁이 2002년 개정판의 각종 오류를 꼼꼼하게 지적한

<삼국지가 울고 있네>(도서출판 금토)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 여파로 이문열의 <삼국지>는 2004년 다시 개정판을 내야 했다.

홍상훈 인제대 중국학부 교수는 “이문열 판본은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작가의 명망과 문장력만 내세워 어설프게 진행한 ‘평역’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문열의 글발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어차피 <삼국지>를 누구나 한 번쯤 읽었다고 전제한다면,

당대 최고의 한국 작가로 꼽히는 이문열이나 황석영의 문체로 <삼국지>를 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고 단언했다.


이문열 역본 20년간 1700만 부 팔려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가장 추천하는 <삼국지>는 어떤 것일까.

많은 이가 공통적으로 꼽는 작품은 김구용, 황석영, 정원기 역으로 정역류다.

공통적으로 원본의 내용과 분위기를 잘 살린 장점이 있다.

윤진현 박사는 “제2의 창작이라고 할 만큼 번역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우아한 의고체 문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김구용 번역판

고전소설을 읽듯 유연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황석영 판은 현대 한국어의 감각을 잘 살려냈기 때문에 마치 한국 소설처럼 수월하게 읽는 장점이 있다”

고 평가했다. 지난해 10월 현암사를 통해 초판이 나온 정원기 판

고전 삼국지 원전의 오류까지 완전히 바로 잡은 중국학자 선 진의 <교리본 삼국지>를 저본으로 하여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번역이 가장 정확할 수밖에 없다.

완전 재창작에 가까운 장정일 역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김봉석씨는 “젊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은 장정일의 삼국지”라며

“장정일 역은 <삼국지>가 한족을 위한 선전물일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책 서두에 등장하는 황건적의 난을 황건 농민군의 봉기로 해석하는 등

최근의 역사적 평가를 가미한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반면 이등연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2005년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장정일 역이) 너무 주관적인 해석이 강해 삼국지라 보기에는 가당찮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역류 외에 일본판 재번역류, 번안류 공존

국내에 있는 판본은 모종강 본을 저본으로 한 정역류,

일본 요시카와 에이지 본을 저본으로 한 일본판 재번역류,

그리고 국내 작가들이 임의로 번역한 번안류 세 종류가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 역본은 1939년 9월 20일부터 1943년 9월 14일까지 <경성일보>에 일본어로 연재됐다.

이후 국내에서 간행된 번역본 중에는

1958년 박영사에서 간행한 <삼국지>(5권, 김동리 · 황순원 · 허윤석)처럼

요시카와 판본을 중역한 번역본이 상당수였다.

김구용, 황석영, 정원기, 정소문, 조승기 판본 등이 모종강 본을 저본으로 한 정역류라면

김광주, 방기환, 이원섭, 김용재, 박정수 판 등은 요시카와 판본을 중역한 번역본이다.

또 개역 또는 번안류는 이문열, 정비석, 김홍신 판본 등이다.

요시카와 에이지 판본의 특징은

전래의 촉한정통론에서 이탈, 조조의 북위정통론에 의거해 창작됐다는 점이다.

소설 번역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중국의 원전 <삼국지연의>를 직역한 판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만화 · 애니메이션 등 여타의 변용 장르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판이 강세다.

 

요코야마 미스테루의 만화 <전략삼국지>(전 60권)는

박영이 번역해 1993년 대현출판사에서 발간, 지속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오쿠다 세이지의 애니메이션도 <전략삼국지>를 원작으로 만든 것이다.

윤진현 박사는 “요시카와 에이지 판본의 특징은 모종강 개작의 <삼국지연의>가 지닌

청대의 장회소설적 구성의 전근대성을 극복함으로써 근대적 소설작법에 충실했고,

인물의 성격과 형상화에 합리적인 근거와 객관적 묘사에 신경 씀으로써

전래의 ‘촉한정통론’에 치우친 태도를 버렸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2009 02/24  위클리경향 813호

 

 

 

 

 


 


 


 

 

神이 된 관우

   

 

 관우(關羽) 무신도(武神圖),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94.9×53.6㎝,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 소장 

 

관우는 물질적인 축복은 물론 질병과 고통의 구원, 악귀를 쫓아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능력을 가진 신으로 추앙받았다. 사신성황당의 무신도는 관우를 비롯하여

관우의 부인인 정전부인, 유비, 장비, 제갈공명의 것이 함께 있어 보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이  무신도는 관우를 그린 것으로, 검은 대추빛의 얼굴과 위로 치켜올라간 봉의 눈과

세 방향으로 길게 뻗은 긴 수염, 지물(持物)로 춘추(春秋)를 가지고 있는 관우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화면 좌우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사이 관을 쓰고 붉은 예복을 입은 관우가

오른손에 붓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다.

같은 사신성황당 소장인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최영장군상>과 손의 방향이 바뀌고

지물이 다를 뿐 유사한 자세를 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 ‘성제님신위’라 금색으로 쓰여 있다.

왕십리 안정사 부근 ‘갑륭이패’로 불리던 무가계(巫家系) 신당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신성황당(使臣城隍堂)은 서울지역의 대표적인 신당(神堂)으로,

국가를 위해 큰 굿을 거행하기도 하고, 중국 사신이 오갈 때 큰 굿을 행하였던 곳으로 전해진다. 

중국사신을 신령(神靈)으로 모신 굿당이었다. 중국 사신이 한양을 드나들 때 무악재를 통했는데,

사신성황당의 원래 위치가 서대문구 홍제동 고개 말바위 아래쪽(현 청구아파트 앞 쪽)이었다.

그러나 도심 개발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은평구 진관내동 산68-9에 잠시 정착하였다.

이후 은평뉴타운 개발로 은평구 진관내동의 사신성황당은 헐리고 남아 있지 않으며,

사신성황당의 무신도들은 2008년 8월 현재 당주 김형순의 살림집 등에 보관되고 있다.

이 굿당에는 1889년(고종 26) 고종, 명성왕후, 대왕대비, 세자, 세자빈, 흥선대원군, 부대부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의 봉축현판(奉祝懸板)이 보존되어 있어, 

조선 말기에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전시는 여러 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삼국지의 역사적 배경과

정사『삼국지』가 1천여 년이 지나면서 소설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조선 중기『삼국지연의』의 유입과 민간 유행 과정을 사료로써 살펴보는

‘삼국지연의의 유입과 유행’이 전시장 첫머리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우리 민화 속 삼국지’에서는

‘도원결의’ ‘단기천기’ ‘삼고초려’ ‘적벽대전’ 등『삼국지연의』의 주요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민화와 함께

「옥단춘전」, <한양가>에 소개되는 <삼국지도(三國志圖)>를 통해

조선 후기를 휩쓴 삼국지의 대중적 유행을 살펴본다.

특히 동묘(東廟, 보물 제142호)에서 수습한 아홉 점의 <삼국지도>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궁중화풍의 뛰어난 솜씨는 스펙터클함의 진수를 보여 준다.

 

‘서울 역사문화 속 삼국지’에서는

동묘를 비롯한 관제묘(關帝廟 : 관우를 모신 사당)와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삼국지』의 등장인물이

민간 신앙이 되어 서울 곳곳에 남은『삼국지』의 흔적들을 추적해 본다.

 

‘대중문화 속 삼국지’에서는 1900년대 이후 신문이나 잡지의 연재물과 출간소설, 만화 등을 총망라했다.

 

이 중 가장 눈여겨볼 주제는 바로 ‘우리 역사 문화 속의 삼국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관우가 ‘충(忠)의 화신’  ‘무(武)의 화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관우가 일종의 신앙으로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원군으로 파병된 명나라 군이 우리 조정으로 하여금 관제묘(=관성묘, 關聖廟)를 조성케 한 것이다.

묘당의 위치에 따라 동묘, 남묘, 서묘(1909년 동묘에 합사), 북묘(1908년 동묘에 합사)가 만들어졌고,

민간에서 조성한 관성묘, 성제묘 등도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전래되었지만,

관우신앙은 조선 말기가 되면서 급속히 민간에 자리 잡았다.

무속신앙과 결합하면서 재물(財物)을 바라거나

상업(관우가 산서성의 염전지역 출신이라 소금장수와 칼장수 등이 관우신앙의 주요 신도였다고 한다)을

하려는 이들, 심지어는 아들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먹힌 것이다.

중국에서도 관우는 재물, 수호의 대상으로 확장되어 곳곳에서 관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얼마전 필자가 방문했던 일본 요코하마의 중국인거리에서도 관제묘가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관우의 淸'관공재신(關公財神)'

 

 

 

전통의 시련

 

단순한 대중소설로서만 바라보았던『삼국지』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서울의 동묘, 관우 신앙을 역사 문화적으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번 전시는 이에 대한 갈증을 약간이나마 풀어준다.

 

우리 민간신앙과 기층문화 속에는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살아 있다.

특히 민간신앙은 무속신앙과 연관되어 민초들의 삶 속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지배층부터 민초들까지 아우르는 무속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국가기관이 이를 위한 사당을 짓기도 했는데, 이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했다.

'국사당'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 5년(1396) 한양의 수호 신사로서

'북악신사'와 함께 남산을 '목멱대왕'이라 하고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목멱신사'를 두면서 시작되었는데, 후에 무당의 기도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국사당은 일제강점기에 커다란 시련을 맞는다.

무속신앙의 대표적인 형식 중 하나인 굿과 굿당도 같은 이유로 많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굿당 또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졌다.

구파발 아래의 금성당(錦城堂) 또한 같은 운명에 처했지만,

지난 7월29일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 258호로 지정, 고시해 그 위기는 넘겼다.

 

 

금성당(錦城堂) 이야기

 

금성당(錦城堂)은

수양대군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의 영혼을

위무하고자 세운 굿당이다.

구파발 금성당(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은

조선 말기에 세워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굿당으로 알려져 있다.

‘ㄱ’자 모양의 정면 5칸짜리 19세기 목조건축물로,

보통 정면 1칸 크기인 마을 굿당에 비해 규모가 커 처음부터 국가에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진행되어 온 은평 뉴타운 개발로 아파트 건설 현장 한가운데에 방치되어 있었다.

금성당이 위치한 공구의 건설주체인 SH공사는 계획수정위원회는

서울에 남은 무속신앙의 대표적 유적이고 19세기 건축물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북한산 지맥이 서린 터 자체의 역사적 의미가 커 본래 자리에 보존 복원할 것을 결정했다.

 

일단 이렇게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 주변 200m 안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바로 옆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SH공사는 우리 사회가 무당이나 굿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해

입주민들의 갈등 소지가 높을 것으로 보고 현장에는 굿당이 있었다는 표석만 설치하고

가옥은 150m 옆에 위치한 진관 근린공원 안으로 이전 복원하자는 의견을 문화재청에 제시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문화재는 현장 보존을 원칙으로 하며

장소를 이전하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소멸되어 안된다며,

일부 거부감에 대비해 현대적 감각에 맞게 한옥으로 원형 보수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지난 몇 년 간 금성당을 연구해 온 국립민속박물관의 양종승 학예연구관은

“서울 시내에 국가가 관할한 금성당 세 곳 중 두 곳이 1970년대 사라졌다.

구파발 금성당은 원형이 보존되어 대한민국에 남은 마지막 굿당이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옮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설계를 일부 변경해서라도 위치를 유지하고 원형에 맞게 보수해야 한다.

현재 금성당은 관리가 안되어 붕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재나 기왓장에 대한 보존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통유산인 굿과 굿당을 미신이라는 이유로 방치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우리의 삼국지이야기> 전시와 금성당 보존 사태는

무속신앙을 접하는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이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먼 중원의『삼국지』가 긴 세월과 넓은 지역을 흐르고 흘러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듯,

지금 우리 주변의 곳곳에 웅크린 저 수많은 금성당과 같은 기층문화가

후에 어떤 의미로 일파만파 퍼져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과거의 것은 구습(舊習)이나 미신(迷信)이라는 인식으로 없애려고만 들 것이 아니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한번쯤 되새길 때,

어느 곳에서 훗날 전통문화로 자리 잡을 기층문화가 새롭게 자라날지도 모른다.

뿌리 없는 나무가 융성할 수 없듯 모든 문명은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고,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 류동현, ‘월간미술’ 기자

- ‘문화와나’ 2008년 가을호(87호), 삼성문화재단, pp.6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