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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해저 보물선 발견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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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발굴이자 세계 수중 고고학계의 세기적 대발견으로 기록된 "新安 海底 遺物 發掘 調査"는 어쩌면 영원히 묻혀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것은 우연히 발견된 매장문화재를 현지 어민이 성실하게 신고하였고, 때마침 도굴범 검거가 계기가 되어 침몰선의 존재가 확인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주관이 되고 대한민국 해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총 22,000여 점이고, 28톤의 동전과 이 유물들을 싣고 원양을 항해하던 당시의 무역선인 대형 목조선(길이 약 30m, 폭 약 12m)도 인양하였다. 발굴 성과는 그 시대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귀중한 유물들이어서 무역사(貿易史), 도예사(陶磁史), 조선사(造船史)는 물론 문화사(文化史) 전반을 보완하고, 중세기의 한· 중· 일 삼국의 교류관계를 재조명해야 하는데 중요한 자료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본인이 직접 듣고 경험했던 사실을 바탕으로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기 전, 보물선 발견 당시의 극적인 내용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 최 모씨는 짜증이 났다. 그물을 걷을 때마다 원하던 고기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이곳은 돌덩어리와 깨진 사금파리 조각이 자주 올라오거나 그물이 찢어지곤 하던 곳이어서 어부들이 그물치기를 꺼리는 곳이지만, 제법 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다. 어부는 낙담을 하며 그물의 밑자락을 힘들게 배 위로 들어 올렸다. 그물에는 많은 돌덩어리와 함께 자잘한 잡어들만 배 갑판 위에 수북히 쏟아졌다. 최씨는 포구로 돌아갈 요량으로 그물을 정리하는데 그물 속에 굴 껍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푸른 빛이 도는 도자기 몇 점을 발견하곤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평소에는 이런 것이 올라오면 그냥 바다에 내던져버렸지만 그날따라 그것을 수습하였다. 집에 가져가 장식품이나 개 밥그릇으로나 사용해 볼까해서였다. 어부 최씨는 서둘러 어망을 정리하고 포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때마침 안방에 들어서던 최 교사는 장롱 옆에 놓여진 도자기를 무심코 살펴보곤 화들짝 놀란다. “형님! 이것 어디서 났소. 이건 고려 자기일 수도 있어요. 빨리 당국에 신고해야 합니다” 천만 다행이랄까? 최 교사로 인해 발견된 유물은 신안군청을 통해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되고 전라남도 문화공보담당관실을 거쳐 문화재관리국으로 옮겨졌다. 이 유물은 문화재위원회의 평가 심의결과 중국 송·원나라 때 만들어진 청자대화병(靑磁大花甁) 등 6점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당시로는 고액인 1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이 때까지만해도 보물선의 존재는 생각치도 못했고, 문화재 당국으로서는 귀중한 유물을 확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정보 수집 차 가끔 내방했던 역전 부근의 다방에 들어선다. 반갑게 맞이하는 다방 마담과 차를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중요한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바다에서 건져진 많은 도자기가 밀거래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첩보 내용은 상부에 보고되고 은밀하게 탐문조사가 진행되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관은 옷가지를 담을만한 가방을 지닌 사십대의 남자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무심코 주위를 살피듯 두리번거리며 고속버스에 올라탄다. 경찰관의 머리에 스치는 직감!... 경찰관에 의해 검문검색이 실시되고 가방 안에는 도굴한 도자기 몇 점이 들어 있었다. 그를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매매를 목적으로 서울의 골동품상가로 도자기를 운반하고자 했음이 드러났다. 수사는 계속되었고 해저에서 불법으로 건져 올려서 몰래 감추어 두었던 백 여점의 도자기도 찾아냈다. 도굴범은 물론 불법인줄 알면서도 유물을 매입한 지역 유지도 검거되었다. 관할경찰의 신속한 탐문조사와 철저한 검문 검색의 결과였다. 압수된 도자기 122점은 정밀 감정을 위하여 문화재관리국으로 이송되었다. 회의실 한쪽에는 압수된 도자기 122점도 가지런히 전시되었다. 청자 주름무늬 항아리를 비롯하여 화병, 접시, 연적, 대접, 청자 보살좌상, 향로, 백자잔 등 중국 송· 원나라의 명품 도자기들이었다. 학계 최고 권위자인 문화재위원들은 유물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회의는 여러 시간 계속 되었다. 회의 결과 해저 침몰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도굴 지역에 대한 예비탐사를 문화재관리국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실시하여 해저 침몰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발굴단을 구성하여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척의 해군 해난구조대(SSU) 심해 잠수사 대원들이 탄 고무보트가 분주히 움직였다. 도굴범이 알려준 좌표의 지점에서 침몰선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탐사작업은 간조와 만조가 되는 때 두 차례, 각각 한 시간 여 휴조(休潮 : 물이 흐르지 않고 정지하는 시간) 때 만 잠수작업이 가능하다. 그 지역은 항시 3-4 노트의 조류가 흘러 잠수가 불가능하며 특히 간· 만조의 폭이 큰 사리때에는 작은 배는 운행하기가 버거울 정도의 빠른 조류가 흐르는 지역이다. 1000톤급의 해군 모함은 지그재그 또는 바둑판 모양의 항적을 그리면서 이동하면서 레이더와 음파탐지기, 음향탐지기를 작동하여 해저면을 탐지한다. 이때 모함의 모니터에 해저면의 돌출 부분이나 이상 반응 지점(침몰선 징후)이 탐지되면 추가 달린 부표(浮漂)를 그 곳에 투하하고, 심해잠수 대원들이 탄 보트의 해저잠수요원은 그 부표를 잡고 잠수하여 반경 5m 정도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탐사는 여러 날 계속 되었다. 하지만 유물 매장 지역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도굴범의 말이 거짓이 아닐까? 별다른 성과없이 여러 날이 흘렀다. 해군 함정 내 회의실에서는 탐사작업에 대한 대책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탐사를 계속 할 것인지 아니면, 철수를 할 것 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회의 결과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도굴범을 데려다가 도굴 현장을 재확인한 후 철수 여부를 검토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몇일 후 문화재관리국은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도굴범을 증도 앞 해상에 정박중인 해군함정으로 인도하여 왔다. 그 날 저녁 달빛이 고요하게 흐르는 도덕도 앞 해상에서 도굴범을 태운 보트는 여러 척의 해군 SSU가 탄 보트와 함께 도굴 현장을 탐색한다.
도굴이 대부분 밤에 이루어졌기에 그의 의견대로 밤의 휴조(休潮)시간을 맞춘 것이다. 보트에 타고 있던 도굴범은 조그만 나침반을 보며 주변의 섬과 구조물을 유심히 살피고 나서 해상 지점 서너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곳은 최초에 알려준 좌표지점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이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지점에 부표를 투하한 후 곧바로 몇 개조의 잠수요원을 해저로 투입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차례... 초조함속에 휴조(休潮)시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주위가 시끄럽더니 해군 잠수요원 한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물 위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청자 연꽃무늬 꽃모양 큰접시(靑磁陰刻蓮花文花形大盤)였다. 환호와 감격의 박수소리... 세계 수중 고고학계의 세기적 대사건이었던 "新安 海底 遺物 發掘 調査"의 서막이 올려지는 순간이었다.
육로보다도 선박을 이용한 서· 남해 바닷길을 자주 활용하였다. 해상로를 통한 운반은 대량의 화물을 빠르고 편리하게 운반할 수 있는 효율적인 물류수단이었지만, 기후변화가 심한 바다의 여건상 선박이 난파되는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신안 해저 보물선이나 일명 쭈꾸미가 알려준 태안 고려청자 운반선도 항해 도중 난파되어 해저에 침몰한 예에 속하며 또 다른 보물선의 존재도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야가 불투명한 서해바다에서 침몰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어로작업 중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와서 발견되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서 여러 차례 유물이 발견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정밀탐사 결과에 따라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유물로 인하여 유적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전문기관의 발굴 조사로 이어져서 잊혀진 역사의 한 부분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매장문화재에 대한 발견 신고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여기에 있으며 국민 개개인의 성실한 문화재 발견신고는 곧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며, 문화재 보호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것이다. - 최태희,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8-09-29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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