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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을 들어서면 멀리 우뚝 솟은 경천사 십층석탑 앞으로 다소곳이 자리 잡은 쌍사자 석등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 높이는 3m나 되는 꽤 큰 석등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터에 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중흥사터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등의 예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 석등은 팔각기둥 형태의 간주석(竿柱石)을 대신하여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선 자세를 취하는 매우 역동적인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석등의 하대석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자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있어 안정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것이 다르다. 또한 직사각형의 평면구조에 맞춰 전체적인 조형이 이루어진 점도 특징적이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상륜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밑에서부터 살펴보면 안상(眼象)이 얕게 음각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사자 두 마리가 구름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다.
네 발을 모두 앞으로 내밀고 웅크리고 있는데, 얼굴의 표정과 갈기의 표현, 날카로운 발톱의 묘사 등에서 세부를 매우 치밀하게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간주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밑에는 옥개석 모양의 낮은 돌이 있고, 그 위로 고복형(鼓腹形) 석등의 간주석과 유사하나 중앙에 돌출형 수평대(水平臺)를 마련한 특이한 형태의 석재가 놓여있다.
8엽의 연화문(蓮花文)이 조각된 상대석(上臺石)은 직사각형의 평면구조에 맞춰 앞뒷면의 꽃잎이 옆면에 비해 넓게 표현되었다.
팔각의 화사석(火舍石) 네 면에는 화창(火窓)이 뚫려 있는데, 앞뒷면의 화창이 옆면에 비해 넓다.
옥개석은 지붕선이 비교적 날렵한 팔각지붕 형태로 화사석과 마찬가지로 앞뒷면이 상대적으로 넓다.
이후 법안종(法安宗) 및 천태종(天台宗)의 영향을 받으며 몇 차례의 중건을 거듭하다 17세기를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터는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부도(국보 제4호), 석불대좌(보물 8호), 원종대사혜진탑(보물 7호), 원종대사혜진탑비(보물 6호) 등 조형미가 뛰어난 우수한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고달사에는 ‘고달(高達)’이라는 석공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가족의 궁핍한 생활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작품제작에 여념이 없었던 ‘고달’은 절이 완성된 이후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이러한 고달의 뜻을 기려 절 이름을 ‘고달사’라고 불렀다.
고달(高達)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경지에 이름’, ‘재주가 뛰어나고 사리에 통달함’, ‘세속을 떠나 뜻을 높게 지님’ 등이다. 석공 ‘고달’의 전설과 함께 고달사의 우수한 석조물을 웅변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가탑의 조영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과 함께 고달사의 석조물에 얽힌 고달의 전설은 우리에게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을 완성한 장인을 떠올려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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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 석등
경복궁 서쪽, 그러니까 국립중앙박물관 잔디밭에 서있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원래 고달사 부도(국보 4호) 앞에 있었는데 이 석등은 이곳에는 1959년부터 있었다.
[국내 최초의 坐形 雙獅子 石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훌륭한 진열실이 있고
그곳에 정성을 모으는 관원이 있어서 나는 그곳을 자주 찾아간다.
본인이 박물관에서 꼭 찾는 곳은 도서실이다.
그곳에서 국내외의 새로운 논문을 찾아서 나의 공부에 새로운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물관을 자주 찾는 것은
진열된 유품을 다시 한번 주목하면서 관련된 새로운 지식을 찾고자 함이다.
내가 박물관을 이같이 찾아가는 것은 그 외에도 내 나름의 오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를 말하여 보겠다. 그것은 박물관마다에 일찍이 옮겨져 있는 일례의 석등(石燈)이다.
그사이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곳에 작은 소원을 걸고 꼭 생전에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인데
그것은 곧 국내에서 다시없는 좌형 쌍사자 석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쌍사자석등이라면 일찍부터 알려진 작품인데
'두 마리 사자가 다리를 들어 화사를 받치는 형태'로 전남 광양군에 선례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국박 마당의 새로운 일례는 쌍사자가 기존작은 모두 입형(立形)인데 반하여
국박의 쌍사자는 처음 보는 좌형이다.
이 국박에 있는 쌍사자 좌형은 필자가 해방직후 경기도 고달사터에서 찾기는 하였으나
옥개석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다행한 일은 경기도박물관에서 금년 들어 고달사 발굴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곳 석등자리에서 기대하던 옥개석을 발굴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그날밤 TV에서 보아서 국박관장에게도 알리고 하였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 마지막 부품을 기대하여 온 것이 꼭 반세기인데
이 작은 소원이 마침내 내 80평생 생애안에 이루어졌으니
그런 큰복이 어디 있느냐고 혼자 흥분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이 석등과 나와의 인연이 반세기가 되었기에 이같은 호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혼자 흥분하기도 하였다.
이 석등은 해방직후 내가 국박에 취업되어서 동분서주할 때
경기도 고달사터를 찾아 그곳 백씨댁 사랑채에서 주목한 것은 6.25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직후 이 석등이 서울로 올라와 종로 어느 예식장 입구에서 재건되어서
화사 네 곳에 유리창을 끼고 금붕어까지 넣어놓고 있었다.
결국 이 사실이 보도됨에 따라 절터의 국유물로 판정받아서 국박마당으로 회수되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뚜껑이 없어 완품 아닌 것이 섭섭하였는데
마침 경기도박물관에서 금년(2001년) 이곳 절터를 발굴하게 되어
바로 이 석등의 뚜껑을 회수하였으니 또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경기도박물관의 호의로 이 석등이 완형을 얻게 되었고,
국박 마당으로 옮겨와 구석에서 미완품으로 보존되다가
그 뚜껑을 찾아 완품으로서 새로운 국유 문화재로서
앞으로 국보 또는 보물로서 지정문화재로서의 심사등록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필자로서는 꼭 반세기를 기다려 이제 완형의 모습을 얻게 되었으니 큰복이 아닐 수 없다.
가까운 앞날에 국내최초의 좌형 쌍사자 석등으로서 국민 앞에 등장하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 황수영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 2002년 1월호 박물관신문/ 제 3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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