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은 물감으로 쓴 자서전이다.
얼굴이 중심 소재인 자화상에는 화가의 성격과 개성, 당시의 감정 상태 등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이상향을 추구했던 장욱진(1917~1990).
그의 '자화상'(1951)은 일반적인 자화상 스타일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풍경 속에 자신을 그렸다.
6·25 전쟁과 턱시도의 사내
시골의 누런 나락밭(보리밭이 아니다!) 사이로 턱시도 차림의 사내가 가고 있다. 유머러스한 폼이 찰리 채플린 같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고, 제비 떼가 줄지어 날고 있다.
벌건 황톳길로 강아지 한 마리가 사내를 뒤따른다. 평화롭다.
이 콧수염의 사내가 바로 장욱진이다.
그런데 '자화상'이 그려진 시기가 놀랍다. 1951년, 6·25전쟁 때였다.
그가 고향으로 피난 가서 그린 그림이다.
그럼에도 전쟁의 흔적이 전혀 없다.
탈속적인 삶의 태도가 뚜렷한 전원목가풍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소재 중의 하나가 제비 떼다.
화면 위쪽으로 네 마리의 제비가 날고 있다. 크기도 엄청나다.
인물과 강아지와 비교해보면 아주 크다.
마치 창공에서 제비를 클로즈업하는 식으로
지상의 자화상과 강아지를 포착한 것 같다. 문득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먼저 왜 많은 새 중에서 하필이면 제비를 출연시켰을까?
제비가 왜 하필 네 마리일까
에돌아가보면,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소재는
아이(사람)와 나무와 집 그리고 새다. 그 중에서 나무와 아이와 집은 지상의 존재다.
나무는 천상을 향해서 자라지만 뿌리 박은 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새는 천상의 존재다. 힘찬 날갯짓으로 지상과 천상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사람들은 현실이 힘들수록 비상(탈출)을 꿈꾼다. 새는 비상의 욕구를 대신한다.
새의 크기는 인간이 가진 꿈과 열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자화상'의 새는, 아니 제비는 '흥부의 제비'처럼 희소식을 상징한다.
희망의 박씨를 물고 오는 존재 말이다.
그렇다면 제비는 은유적으로 드러낸 화가의 꿈이 아닐까?
그래서 유독 크게 그린 것이 아닐까?
다음은 왜 제비가 네 마리일까?
"그건 지극히 조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적은 숫자 중에서 가장 조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수가 넷이다.
넷은 일정간격(●●●●)으로 나란히 놓을 수 있고,
아니면 하나와 셋● ●●●), 셋과 하나(●●● ●), 둘둘(●● ●●)로
배열할 수 있다."(장욱진)
이런 생각은 새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림이 아주 이성적이다.
제비를 위한 구도가 아닐까
장욱진 그림의 매력으로 흔히 단순과 천진난만을 꼽는다.
그런데 그것은 이성적으로 조율된 단순과 천진난만이다. 흥미롭다.
상반된 요소가 한 화폭에 보금자리를 꾸민 것이다.
단순과 천진난만은 보통 무계획적인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그는 그림의 조형미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이런 작품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단순과 천진난만을 밑받침하는 이지적인 조형성까지 따져봐야 한다.
'자화상'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은 제비 떼다.
화면을 상하로 2등분했을 경우, 작품의 중심인 인물은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화면의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린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그것은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제비 떼를 일부러 넣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화면의 아래 가장자리로 바짝 붙여서 인물을 그려 넣은 게 아닐까?
반대로 비어 있는 위쪽에 제비 떼를 배치해보면,
순간 아래쪽으로 쏠렸던 시선이 균형을 잡는다. 제비는 가시화된 화가의 마음 같다.
그 마음을 은근슬쩍 보여주려고 인물을 아래쪽에 배치한 것 같다.
마치 음식의 간을 맞추듯이 제비로 구도의 간을 맞춘다.
불안했던 그림이 비로소 평화로워진다.
그림에 간을 맞추는 조연
장욱진은 어른이면서도 순진한 아이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형태를 단순화했다. 크기도 작았다.
그림이 커지면 "싱거워지고 밀도가 떨어진다"(장욱진)는 생각 때문이다.
작지만 맵다. 양보다 질이었다.
네 마리의 제비는 '자화상'의 또다른 중심이다.
그림의 조형미를 탄탄하게 조율해주고, 희망의 전령사로 호출된 특별한 조연이다.
제비가 동행하는 대낮의 한가로운 외출. 장욱진답다.
- 정민영 (주)아트북스 대표이사
- 2008.03.19 ⓒ 국제신문(www.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