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초가집과 담장에 햇살이 쏟아진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졸고 있고, 집안에서는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마당에는 아직 잎이 돋지 않은 고목이 담장과 초가지붕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신토불이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1905-1982)의 대표작인 '남향집'이다.
정경이 봄볕처럼 따사롭고 명랑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고목의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다.
'그림자=검은색'이라는 인식에 딴죽을 건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섞여 있다.
단순한 재미로 컬러풀하게 칠했다고 보기에는 그림자의 크기와 색이 너무 두드러진다.
왜 그랬을까? 혹시 '남향집'의 비밀이 그림자에 압축돼 있는 것은 아닐까?
신토불이 인상주의 화가
이 그림자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하다.
오지호는 한국 인상주의 화풍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상주의 화풍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개되었다.
유럽에서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화'된 인상주의였다.
비교적 구름 끼는 날이 많은 일본과 우리나라는 기후조건이 달랐다.
우리의 하늘과 대기는 밝고 명랑하다.
그래서 오지호는 이 땅이 발산하는 밝고 아름다운 색조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반면에 당시 유학생들은 '일본제 인상주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인상주의의 탄생 배경이나 정신적인 면 등은 등한시했다. 기법만 배웠다.
오지호는 이런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철저한 '인상파 맨'으로 살았다.
화가 정규는 그를 이 땅에서 유일한 인상주의 화가라고 불렀다.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 회화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다.
아카데미 미술은 인공적인 실내조명 속에서 배운 규칙대로 자연을 그렸다.
사실 자연은 고정된 물건이 아니다.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로 나갔다. 자연광 아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그림자에도 색감을 넣었다. 어두침침하던 그림이 비로소 밝아졌다.
오지호도 그림도구를 들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몇 시간이고 야외에서 캔버스와 씨름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과 햇살과 대기가 빚는 투명한 기운을 옮겨 담기 위해서였다.
춤추는 그림자의 비밀
'남향집'은 오지호가 해방 무렵까지 살았던(1935~1944)
개성의 초가집과 그의 딸을 소재로 삼고 있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1935년부터 10년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 밝고 투명한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으로
우리 산하의 풍광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개성시절은 오지호의 회화가 만개한 때였다.
더욱이 이 때는 그가 인상주의 화풍을 토착화시킨 성과를
'오지호 · 김주경 2인 화집'(1938)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알린 때이기도 하다.
넘치는 의욕은 '남향집'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명랑한 색감과 고목의 대담한 그림자 처리가 대표적이다.
자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또 인상주의 화가답게 그림의 비중이
소재의 디테일보다 따뜻한 분위기 조성에 실려 있다.
여기에 추임새를 넣는 것은 고목의 그림자다.
초가지붕과 담장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림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파란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져 그림자의 표정이 활달하다.
고목보다 그림자가 더 매혹적이다.
오지호는 색을 칠하되 붓 터치를 짧게 끊어가면서 리드미컬하게 처리한다.
따라서 잔잔한 터치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만약 그림자를 어둡게 표현했다면 어떠했을까?
지금과 같은 따사로운 맛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림자는 죽은 색이 아니다.
계곡의 무뚝뚝한 바위 밑에 송사리가 살듯이 그림자 속에도 갖가지 색이 산다.
그림자를 밝게 처리한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오지호도 그림자에 색을 넣었다.
고목의 컬러풀한 그림자는 그가 인상주의자임을 '표나게' 보여준다.
그는 그림자도 춤추게 한다.
이 그림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서)
따사로움이 가득하다.
'중국제'도, '프랑스제'도, '일본제'도 아닌 '신토불이' 햇살이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햇살의 광도는 싱싱하다.
그는 자식을 사랑하듯이 이 땅을 밝힌 햇살과 색채를 평생 사랑했다.
-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
- 2008.04.16 ⓒ 국제신문(www.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