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9호 / 성덕대왕 신종
시 대 - 통일신라 771년/ 혜공왕 7년,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曆) 6년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봉덕사 (현재 국립경박물관 소장)
크 기 - 높이 333cm, 구경(口徑) 227cm
서문(序文) : 해서
명문(銘文) : 행서
찬자(撰者) : 김필오(金弼奧)
서자(書者) : 김부환(金符皖) · 요단(姚湍)
각자(刻者) : 미상
성덕대왕신종은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려는 목적에서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구리 12만근을 들여 만들다가 실패하였다가,
그 아들인 혜공왕(惠恭王) 7년(771)에 완성되었다.
원래는 성덕대왕의 원찰(願刹)이었던 경주 봉덕사(奉德寺)에 있었는데,
봉덕사가 수몰된 뒤 세조 6년(1460) 영묘사(靈廟寺)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다가, 1915년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 뒤 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찬자(撰者)는 조산대부(朝散大夫) 겸(兼) 태자조의랑(太子朝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오(金弼奧)이며,
서(序)는 한림대서생(翰林臺書生) 대나마(大奈麻) 김부환(金符皖)이,
그리고 명(銘)은 대조(待詔) 대나마(大奈麻) 요단(姚湍)이 썼다. 새긴 사람은 미상이다.
현존 최대의 동종으로 제작연대, 각부양식, 음질 등 모든 면에서 신라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국보 제29호이며, 높이는 333cm, 구경(口徑)은 227cm이다.
630자로 된 서문(序文)과 200자의 명문(銘文)을 포함, 모두 1,037자의 글이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서문은 해서체, 명문은 행서체이다.
이 명문은 종명(鍾銘)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문장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
여기에는 종을 만든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는 대나마(大奈麻) 벼슬의 관직을 통하여
당시 성전사원(成典寺院)의 실제 운영을 파악할 수가 있는데,
그들 가운데 김양상(金良相)은 혜공왕(惠恭王)을 이어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宣德王)이 되었다.
따라서 이 명문은 당시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장구조는 다음과 같다.
제액(題額), 찬자(撰者)
서(序) : 夫至道~銘記于鍾也
서문(序文) 서자(書者)
명(銘) : 其詞曰~恒恒轉重
찬자(撰者)와 명문서자(銘文書者)
주종(鑄鍾) 사업에 참여한 속관(俗官)
건립날짜
주종(鑄鍾) 기술자
- 성덕대왕신종 명문(판독문) -
聖德大王1 神鍾之銘」
朝散大夫2兼太子司議郞3翰林郞4金弼奧5奉敎撰」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視之不能見其原大音震動於天地之間聽之不能」
聞其響是故憑開假說觀三眞6之奧載懸擧神鍾悟一乘7之圓音8夫其鍾也稽」
之佛土則驗在於罽膩9尋之帝鄕則始制於鼓延10空而能鳴其響不竭重爲難」
轉其體不褰11所以王者元功克銘其上群生離苦亦在其中也伏惟」
聖德大王德共山河而幷峻名齊日月而高懸擧忠良而撫俗崇禮樂而12觀風」
野務本農市無濫物時嫌金玉13世尙文才不意子靈14有心老誡四十餘年臨邦」
勤政一無干戈15驚擾百姓所以四方隣國萬里歸賓唯有欽風之望未曾飛矢」
之窺燕秦用人16齊晉替覇17豈可幷輪雙轡而言矣然雙樹之期18難測千秋之夜」
易長晏駕19已來于今三十四也頃者 孝嗣景德大王20在世之日繼守」
丕業監撫庶機早隔 慈規對星霜而起戀重違 嚴訓臨闕殿以」
增悲追遠之情21轉悽益魂之心更切敬捨銅一十二萬斤22欲鑄一丈鍾23一口立」
志未成奄爲就世今我聖君24行合 祖宗意符至理殊祥異於千」
古令德冠於常時六街25龍雲蔭灑於玉階九天26雷鼓震響於金闕27菓米之林離」
離28乎外境29非煙之色煥煥30乎京師此卽報玆誕生之日應其臨政之時也仰惟」
太后31恩若地平化黔黎於仁敎心如天鏡獎父子之孝誠32是知朝於元舅33之賢」
夕於忠臣之輔無言不擇何行有愆乃顧遺言遂成宿意爾其有司辦事工匠」
畵模歲次大淵34月惟大呂35是時日月替暉陰陽調氣風和天靜神器化成狀如」
岳立聲若龍音上徹於有頂36之巓37潛通於無底38之下見之者稱奇聞之者受福」
願玆妙因奉翊 尊靈聽普聞之淸響登無說之法筵契三明39之勝心居」
一40乘之眞境乃至瓊萼41之叢共金柯以永茂邦家之業將鐵圍42而彌昌有情43無」
識44慧海同波咸出塵區幷昇覺路臣弼奧拙無才敢奉 聖詔貸班超45」
之筆隨陸佐之言述其願旨銘記于鍾也翰林臺書生大奈麻46金符皖書」
其詞曰
紫極47懸象48 黃輿49啓方 山河鎭列 區宇分張 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50 爰有我國 合爲一鄕 元元51聖德 曠代52彌新」
妙妙淸化 遐邇克臻 將恩被遠 與物霑均 茂矣千葉 安乎萬倫」
愁雲忽慘 慧日無春 恭恭孝嗣 繼業施機 治俗仍古 移風豈違」
日思嚴訓 常慕慈輝 更以脩福 天鍾爲祈 偉哉我后 盛德不輕」
寶瑞頻出 靈符每生 主賢天祐 時泰國平 追遠惟勤 隨心願成」
乃顧遺命 于斯寫鍾 人神獎力 珍器成容 能伏魔鬼 救之魚龍」
震威暘谷53 淸韻朔峯 聞見俱信 芳緣允種 圓空神體 方顯聖蹤」
永是鴻福 恒恒轉重」
翰林郞 級飡54金弼奧奉 詔撰」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의 금석문 참고
檢校使56兵部令兼殿中令司馭府令」
修城府令監四天王寺57府令58幷檢」
校眞智大王寺59使上相大角干臣」
金邕60」
檢校使肅政臺令兼修城府令檢」
校感恩寺61使角干臣金良相62」
副使63執事部侍郞阿飡金體信64」
判官65右司祿館使級飡金忠得」
判官級飡金 忠封」
判官大奈麻金 如芿庾66」
錄事67奈麻金 一珍」
錄事奈麻金 張幹」
錄事大舍金 ▨▨」
大曆六年68歲次辛亥十二月十四日鑄鍾大博士大奈麻朴從鎰」
次博士奈麻朴賓奈」
奈麻 朴韓味 大舍 朴負缶」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 해석문 -
성덕대왕신종의 명
조산대부 겸 태자사의랑 한림랑인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지음.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런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
대저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에 상고해보면 카니시카왕에게서 증험할 수 있고,
중국에서 찾아보면 고연이 처음 만들었다.
텅 비어서 능히 울리되 그 반향이 다함이 없고, 무거워서 굴리기 어렵되 그 몸체가 주름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왕자의 으뜸가는 공적을 그 위에 새기니, 중생들이 괴로움을 떠나는 것도 그 속에 있다.
엎드려 생각컨대 성덕대왕께서는 덕은 산하처럼 드높았고 명성은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렸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예절과 음악을 받들어 풍속을 관찰하셨다.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남용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文才를 숭상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고 나이 많은 이의 훈계에 마음을 두었다.
40여 년 동안 나라에 임하여 정사에 힘써서 한 해라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의 이웃나라와 멀고 먼 나라가 오로지 왕의 교화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으며
일찍이 전쟁을 엿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에서 사람을 잘 쓰고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대로 패업을 완수한 일을 가지고 어찌 나란히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돌아가실 날은 예측하기 어렵고 죽음은 쉽게 찾아온다. 돌아가신지 지금까지 34년이다.
근래에 효성스런 후계자인 경덕대왕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큰 왕업을 이어 지켜
뭇 정사를 잘 보살폈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일어났으며
거듭 아버지를 잃어 텅빈 대궐을 대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였으니,
조상을 생각하는 정은 점점 슬퍼지고 명복을 빌려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삼가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1장이나 되는 종 1구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문득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우리 성군께서는 행실이 조상에 부합하고 그 뜻이 지극한 도리에 부합되어
빼어난 상서로움이 과거보다 기이하며 아름다운 덕은 현재의 으뜸이다.
온 거리의 용이 궁궐의 계단에 음덕의 비를 뿌리고 온 하늘의 천둥이 대궐에 울렸다.
쌀이 열매달린 숲이 변방에 축축 늘어지고 연기가 아닌 색이 서울에 환히 빛났다.
이러한 상서는 곧 태어나신 날과 정사에 임한 때에 응답한 것이다.
우러러 생각컨대 태후께서는 은혜로움이 땅처럼 평평하여 백성들을 어진 교화로 교화하시고
마음은 하늘처럼 맑아서 부자(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성을 장려하셨다.
이는 아침에는 왕의 외숙의 어짐과 저녁에는 충신의 보필을 받아 말을 가리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행동에 허물이 있으리오. 이에 유언을 돌아보고 드디어 옛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들은 밑그림을 그렸다. 때는 신해년(771) 12월이었다.
이때 해와 달이 교대로 빛나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고 바람은 따뜻하고 하늘은 고요한데,
신성한 그릇(鍾)이 완성되었다. 형상은 산이 솟은 듯하고 소리는 용의 소리 같았다.
위로는 유정천의 꼭대기까지 꿰뚫고 아래로는 귀허(歸墟)의 밑바닥까지 통하였다.
그것을 본 자는 기이하다고 칭송하고 그것을 들은 자는 복을 받았다.
원컨대 이 오묘한 인연으로 존엄한 영령을 받들어 도와서 두루 들리는 맑은 소리를 듣고
말을 초월한 법연에 올라감에 과거·현재·미래를 꿰뚫는 뛰어난 마음에 계합하고
일승의 참된 경계에 머물게 하며, 나아가 왕손들이 금으로 된 가지처럼 영원히 번성하고
나라의 왕업이 철위산처럼 더욱 번창하며, 모든 중생들이 지혜의 바다에서 함께 파도치다가
같이 세속을 벗어나서 아울러 깨달음의 길에 오르소서.
신 필오는 졸렬하여 재주가 없음에도 감히 성스런 왕명을 받들어
반고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에 따라 그 서원하는 뜻을 서술하며 종에 명을 기록하노라.
한림대 서생인 대나마 김부환이 쓰다.
그 사(詞)에 이르되,
하늘에 천문이 걸리고 대지에 방위가 열렸으며, 산과 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천하가 나뉘어 뻗쳤다.
동해 가에 뭇 신선이 숨은 곳,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머물고 경계는 해뜨는 곳에 닿았다.
이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을이 되었다.
크고도 크도다 성인의 덕이여! 세상에 드물 만큼 더욱 새롭다.
오묘하고도 오묘하도다 맑은 교화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능히 이르게 하였다.
은혜를 멀리까지 입게 하고 물건을 줌에 고루 젖게 하였다.
무성하도다 모든 자손이여 안락하도다 온갖 동포여.
수심어린 구름이 문득 슬퍼지니, 지혜의 태양에 봄이 없구나.
공경스럽고 효성스런 후손이 왕업을 이어 기틀을 베풀었다.
풍속을 다스리되 옛 것에 따르니, 풍속을 옮아감에 어찌 어김이 있으랴.
매일 부친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항상 모친의 모습을 그리워하였다.
다시 복을 닦고자 하늘종으로서 빌었다.
위대하도다 우리 태후시여! 왕성한 덕이 가볍지 아니하도다.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출현하고 영험스런 부응이 매양 생겨났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돕고 시절은 태평하고 나라는 평안하였다.
조상을 생각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마음을 따라 서원을 이루었다.
이에 유명을 돌아보고 이에 종을 베꼈다.
사람과 귀신이 힘을 도와 진기한 그릇이 모습을 이루었다.
능히 마귀를 항복시키고 물고기와 용을 구제할 만하다.
위엄이 동방에 떨치고 맑은 소리는 북쪽 봉우리에 울렸다.
듣는 이나 보는 이가 모두 믿음을 일으켜 꽃다운 인연을 진실로 씨뿌렸다.
원만하게 빈 속에 신기한 몸체가 바야흐르 성인의 자취를 드러내었다.
영원히 큰 복이 되고 항상 장중하리라.
한림랑인 급찬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대조인 대나마 요단이 쓰다.
검교사 병부령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 감사천왕사부령이자 아울러
검교진지대왕사사인 상상 대각간 신 김옹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인 각간 신 김양상
부사 집사부의 시랑인 아찬 김체신
판관 우사록관사인 급찬 김충득
판관 급찬인 김충봉
판관 대나마인 김여잉유
녹사 나마인 김일진
녹사 나마인 김장간
녹사 대사인 김▨▨
주종대박사 대나마 박종일
차박사 나마 박빈내
나마 박한미
대사 박부부
대력 6년 세차 신해(771) 12월 14일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 참고문헌 -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논문)朴方龍, 2001, 「聖德大王神鐘 附屬施設物에 對하여」『慶州文化』7, 慶州文化院
(논문)鄭禮京, 2000, 「上院寺鍾과 聖德大王神鍾의 양식적 비교」『東岳美術史學』創刊號, 東岳美術史學會
(단행본)國立慶州博物館, 1999, 『聖徳大王神鍾』(綜合調査報告書)
(단행본)國立慶州博物館, 1999, 『聖徳大王神鍾』(綜合論考集)
(논문)이장무, 1998, 「성덕대왕신종」『한국사시민강좌』23, 일조각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會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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