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무령왕 묘지(墓誌) 구멍은?

Gijuzzang Dream 2008. 9. 5. 17:30

 

 

 

 

 

 무령왕 묘지(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日학자 시라스교수의 논문에서 주장
"무령왕 묘지(墓誌)의 구멍은 묘지(墓地) 구입 돈꾸러미 끼운 곳?" 제기 

 

 

1971년 여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돼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다.

그것은 왕릉 안에서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묘지(墓誌.방형 판석)가 각각 1장,

그리고 죽은 무령왕이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여러 신(神)에게서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인 매지권(買地卷)이 왕비 묘지의 뒷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무덤방(玄室)으로 통하는 무덤길에서 동서쪽으로 나란히 놓인 채 발견된 두 묘지에는

모두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나아가 무령왕 묘지 뒷면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칭만 제외한

'십이간지(十二干支) 방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1971년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 지석(墓誌) 뒷면(가로 41.5, 세로 35㎝)

십이간지 방위표 탁본(왼쪽)과 그 복원도(오른쪽).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들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가 없는 까닭은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라는 주장이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에 의해 제기됐다.

가운데 구멍은 오수전이란 동전 꾸러미를 꿴 끈을 묶은 공간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중국 투르판 지역 고문서를 주로 연구하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 이후 30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의 미스터리인

묘지의 구멍과 십이간지 방위표에 얽힌 비밀을 마침내 풀어냈다.

 

시라스 교수는 미술사학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의 정년퇴임논총에 투고한 논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ㆍ왕비 합장묘의 묘권(墓券. 매지권)ㆍ묘지석(墓誌石)에 관한 한 제언'

에서 묘지(석)의 구멍은

무령왕이 지하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시라스 교수는 무령왕 묘지 뒷면에 새긴 '십이간지 방위표'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하는 亥ㆍ壬ㆍ子ㆍ癸ㆍ丑,

동쪽에 해당하는 寅ㆍ甲ㆍ卯ㆍ乙ㆍ辰,

그리고 남쪽을 지칭하는 巳ㆍ丙ㆍ午ㆍ丁ㆍ未를 표시하고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들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을 뺀 것은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무령왕릉 출토된 그의 묘지와 매지권에 의하면 523년 62세로 사망한 무령왕은

525년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으며,

토왕(土王)과 토백(土伯)을 비롯한 각종 지하세계 신들에게 '돈 1만문'(錢一萬文)을 주고

신지(神地), 즉 서쪽 땅을 매입했다.

 

시라스 교수에 의하면,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유독 서쪽 방위만 표시하지 않은 것은 매지권에서 밝힌 대로

무령왕이 바로 서쪽 땅을 사서 매입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령왕 묘지는 무덤길 오른쪽(동쪽),

그 왕비 묘지는 왼쪽(서쪽)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고대 동전 90여 개가 꾸러미 상태로 발견됐다.

왕과 왕비 묘지는 무덤방 바깥이 아니라 무덤방 안쪽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놓아 두었다.

 

시라스 교수는 이런 배치는 525년에 무령왕이 먼저 매장되고 나서,

나중에 죽은 그 왕비를 529년에 합장(合葬)할 때 일어난 현상이라면서

"따라서 당연히 무령왕이 처음 묻혔을 때는 그 왕비 묘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령왕만 묻었을 때는 '십이간지 방위표'를 뒷면에 새긴 무령왕 묘지 판석과

매지권을 새긴 다른 판석(나중에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새김)은

1971년 발견 상태와 같이 왼쪽-오른쪽에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포개 놓았었다"면서

"묘지나 매지권 등의 각종 문서 내용이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묘지가 위, 매지권이 아래에 놓였음이 분명하며,

두 판석 중앙에 난 구멍은 무령왕릉 발견 당시에 발견된 오수전 꾸러미를 꿴 끈을 끼운 공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참조)

 

 

  

이런 주장을 접한 고고학자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아무도 풀 수 없던 난제를 시라스 교수가 단칼에 풀었다"고 평가했으며,

돈황학 전공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은

"시라스 교수가 기존 한ㆍ일 고대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투르판지역 고문헌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쌓은 학자이기에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2007-09-06

 

 

 

 

 

 
국보 163호로 일괄지정되었으며,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공사 중 발견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이다.
 

지석은 묘지(墓地)라고도 하며, 무덤 주인공을 알려준다.

무령왕 지석(왼쪽) 뒷면에는 12방위표가 있으나 서쪽 부분은 누락됐으며,
왕비 지석(오른쪽) 뒷면은 매지권(買地券)이다.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 두께 5㎝

표면에는 음각으로 7행을 만들어 6행까지는 52자의 명문(銘文)을 새겨 넣고

마지막 1행은 공간으로 남겼다.

서체는 해서체로 남조(南朝)풍의 우아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 무령왕의 지석(誌石)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 임진일에 붕어하시어
을사년(525년) 8월12일 갑신일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백제 무령왕비의 지석(誌石) 뒷면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復終居喪在西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錢一萬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

土王 土伯土父母上下 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돈 1만문(錢一萬文), 다음의 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前其件) 돈(錢)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2000석 이상의 서쪽 땅을 사들여

묘을 만들고 문서<매지권(買地卷)>를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세상의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번역 : 학술원논문집 1972년 11호, 백제문화 1991 제 21집) 

 

 

 

 

시라스교수의 <무령왕 묘지의 구멍에 대한 주장>에 대한 반론 例

 

(1)

이를 두고 비밀을 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하지 않은가?

시라스 교수의 논문에 나온 얘기는 유력한 설일 뿐이지 확실한 증빙은 아니다.

그런데 연합뉴스는 '난제가 단칼에 풀렸다.' 는 국내 학자의 얘기를 싣고

제목마저도 비밀이 마침내 풀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에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이라는 말을 싣기는 했지만

그 말이 '놀라운 주장'이라고 바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주장이며 설일 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금송으로 왕과 왕비의 관재를 사용한 점과 출토된 청동거울이

닌토쿠 일본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유사하다든가 하는 부분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령왕릉 발견당시 유물을 집어내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봐야 한다.

듣기로는 당시의 빈약한 고고학적 인식으로 인해 막 발굴된 무령왕릉에 기자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등

현장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약 오수전이 지석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 가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오수전은 지석 위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니 이 가설은 큰 의미를 지니는 듯 하다.

 http://blog.daum.net/tasofhso/15504825

 

(2)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일본 히로시마 시라스 죠신 교수는 십이간지의 방위표 탁본과 그 복원도로 미루어

그 그림에 땅의 방위명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이 없는 까닭을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기때문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풀지 못했던 무령왕 묘지 구멍의 비밀과 함께

30년 동안 풀지 못했던 파천황에 해당하는 주장이라고 옹호하고 싶어한다.

  

물론 가능성은 없지 않다. 그러나 본인의 시각으로는 그 주장이 맞지 않다고 여긴다.

비록 두 판석의 중앙에 난 구멍은 시라이 교수의 주장이 맞을지 몰라도

방위표까지 그 돈꾸러미의 의미와 결부시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의 비약이다.

또 사람이 죽어 이 땅을 하직하는데 그 정도의 관점에서 묘지의 방위표를 작성할 사람은

아마 식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불교의 서방정토로 통하게 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이간지의 방위표 탁본과 그 복원도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은

땅의 방위명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은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서방정토를 뜻하는 구조도일 것이다.

자세한 구조와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본인은 그 관점을 제기할 뿐이지만

마치 시라이 교수의 주장이 모든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마냥

아무런 의심 없이 적극 동조하는 학계의 입장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한심하다.

 http://blog.daum.net/munsuan/12457531

 

 

 

 

 

 국립공주박물관 발굴 35주년 국제학술대회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백제 무령왕릉이 출현하고,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묘지석과 함께

매지권(買地卷)이란 토지매매증서도 발견됐다.

매지권에는 죽은 무령왕이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괴수 토백(土伯)과 흥정을 해서

돈 1만 문(文)을 주고 묘지(墓地)를 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마지막 문구는 이렇다.

"不從律令"(부종율령).

율령을 따르지 말라는 정도의 의미다.

 

이 대목을 발견한 학계는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고구려, 신라는 각각 율령이 도입된 시기가 삼국사기에 못박혀 있었지만 백제는 관련 기록이 전무했다.

이에 학계는 이 매지권을 근거로 아무리 늦어도 백제는 무령왕 시대에는 율령이 있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헛다리 짚기의 전형이었다.

 

매지권에 나오는 '율령'은 백제사회에 실제 통용된 법률과는 관계가 없고,

요즘의 한국사회 부적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주문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처럼 율령이란 말이 도교에서 별 뜻없이 사용하는 주문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전문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2001년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 이후 올해는 그 35주년 행사로

무령왕릉 발굴 신보고서를 발간하는 한편, 24-25일 박물관에서 관련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신보고서와 학술대회는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반영하고자 했다.

몇몇 유물에 대해서는 새로운 분석을 시도했다.

 

익히 알려져 있지만 가장 놀라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유물은 환두대도(環頭大刀).

 

1천2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으로 분석했더니

칼 손잡이 중간 부분을 W자 모양을 따라가면서 촘촘히 박은 금알갱이는

무려 800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금알갱이를 다른 금속판에 박는 방식을 누금기법이라고 하는데,

동양대 이한상 교수 분석 결과 이 환두대도는 누금기법 중에서도

금알갱이를 살짝 녹여 붙이는 '용착'(鎔着) 기법을 구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알갱이는 크기를 측량한 결과 지름 0.5㎜가 채 되지 않았다.

 

무령왕릉 발굴단 멤버인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그로테스크한 돌짐승'이라고 표현한

뿔 하나 달린 진묘수(鎭墓獸)에 대해서는 발굴 직후부터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중국측 발굴 및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이를 토대로

무령왕릉 돌짐승에 대한 계보와 사상적 배경 해명을 시도한다.

 

진묘수는 도교사상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죽은 무령왕이 자신의 묘지(墓地)를 구입하기 위해 협상을 벌인 토백이란 신만 해도

도교신학에서는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격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도교, 특히 신선사상과 결합한 신선도교가

당시 백제사회에 열풍이 일었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이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은잔받침 문양을 분석한 주경미 박사의 연구성과와도 연결된다.

 

 

주 박사는 한국미술사학의 고질에 가까운 불교에 대한 미련을 못내 떨쳐버리지 못하고

받침 중앙을 장식한 꽃무늬를 연꽃으로 단정하긴 했으나(연꽃이 아니라 국화에 가깝다),

그 주변을 장식한 인면조(人面鳥)와 용, 사슴, 새, 나무 등의 문양을

도교의 신선향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 2006년 11월22일,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무령왕릉 전돌은 부여 정동리가마産"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백제 무령왕릉과 그 인근 송산리 6호분을 쌓는 데 사용된 전돌(벽돌)은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는 분석결과가 제출됐다.

백제 자체 제작품으로 간주하는 한국학계와는 달리 그동안 중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두 고분 전돌이 중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무령왕릉 출토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조사를 벌여온 국립공주박물관은

최근 부여 정동리 가마터 수습 전돌과 비교분석해 본 결과

두 지역 전돌이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송산리 고분군의 다른 지역 출토 전돌은 정동리 가마터 전돌과 유사한 태토(胎土)를 사용하긴 했지만

준비 과정과 제작기법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무령왕 부부의 묘지명(墓誌銘)과 매지권(買地卷)을 통해 무덤 축조연대가 밝혀진 무령왕릉의 전돌을

열루미네선스 연대측정법 중 감쇄기법이란 방식을 적용해 조사해 본 결과

AD 530±50년이란 수치를 얻었다고 덧붙였다.

연대측정치와 절대 축조연대가 거의 합치된 결과인 셈이다.

 

나아가 무령왕릉 출토 금제유물을 비파괴 분석한 결과

금(Au) 함량은 90.5~99.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보 154호 금제관식을 포함해 시신에 직접 착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요 장신구는

금 함량이 99%에 이르는 순금으로 제작됐음이 드러났다.

 

 

 

 

 

금 제품끼리 붙이는 누금기법과 같은 접합 기술은

단순 용접이 아니라 금으로 땜질을 한 '경납' 방식이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박물관 보존과학실 최기은 학예연구사는

"이런 조사 결과는 백제의 금제련 기술을 포함한 전반적인 금세공기술의 발달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리제품에 대한 분석결과에서는 그동안 금박유리구슬로 알려진 구슬의 박(箔)이

금이 아닌 은(Ag)이 재료임이 확인됐다.

이런 제품은 삼국시대 유물에서는 처음 확인된 자료라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공주박물관은 이와 같은 성과를 담은 '무령왕릉 출토 유물 분석 보고서(Ⅲ)'를 발간했다.

- 2007년 7월31일,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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