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강화 - 강화학파 정제두(하곡마을)

Gijuzzang Dream 2007. 11. 16. 15:48

 

 

 

 

 하일리의 저녁 놀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日里)는 저녁 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인 이 곳 하일리에 자리잡은 까닭이

바로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이틀길이었습니다.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으려고 하곡은

강화의 서쪽 끝인 이곳 하일리로 들어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손돌목의 세찬 물길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칼처럼 자르고 떠나온

그의 강한 결의가 지금도 선연히 느껴집니다.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관한 공소한 논쟁과 그를 둘러싼 파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곡이 이 곳에 자리잡은 후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인재들이 강화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석천(石泉) 신작(申綽),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등 하곡의 맥을 잇는 학자 문인들이 국학연구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의 산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등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른바 강화학의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문을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결별하고

경전(經典)을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켜 온 고장입니다.

 

이른바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온 곳입니다.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곳이야말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생각됩니다.

민족과 인간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이 강화학의 사람들만큼 굳건히 견지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거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천 8백리 황하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강화학을 이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해방직후 연희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한대(漢代) 장건(張蹇)의 시적 구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강화로 찾아 든 학자 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강화에는 참된 지식인의 자세를 묻는 준엄한 사표가 곳곳에서 우리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이 병인양요를 맞아 자결한 곳이 이곳입니다.

가난한 어부들에 대한 애정과 나라의 치욕을 대신 짊어지려는 헌신과 대의로

그 길고 곤궁한 세월을 견디어 내며 박실자연(朴實自然)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들의 고뇌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아름다운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수많은 횟집의 유리창이 노을에 빛나는 강화에 이들의 묘소와 유적들은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려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이었던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묘소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만 애잔한 울음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만주로 떠나는 독립지사들의 성지였던 계명의숙(啓明義塾)터는 곡식도 없는 텃밭으로 묵어 있습니다.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벌판을 내려다보고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여투어주려는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 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시작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995년에서 1996년 8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신영복 선생의 글 중,

   1995년 11월 26일(제 7회)자.

- 강화 하곡마을, 하일리는, 하곡 정제두와 관련 있어 앞 머리에 올립니다. (Gijuzzang Dream)

 

 

 

 

 

 

 

 

 

 

 

 강화학파와 ≪하곡집(霞谷集)≫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가 강화도의 하곡(霞谷)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61살 때인 1709년(숙종 35) 8월의 일이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숙종 때로,

그는 정권유지를 위해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정치상황과 경직된 학문 풍토를 비판하며

선산(先山)이 있는 강화도 들어와 20년을 살았다.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버리고,

우리의 시각에서 현실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열린 학문자세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대학자였다. 
 

[정제두묘(인천시기념물 제56호)]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강화읍에서 마니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하우고개 묘역의 반대편 길가에 숭모비가 있다.

 

 


정제두가 강화도로 들어오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학맥은 200여 년 동안 이어져 이른바 ‘강화학파(江華 陽明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1732년(영조 8) 강화도로 정제두를 찾아가 ‘실심실리(實心實理)’를 배웠다.

몇 해 후에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강화도로 들어가 살면서 더욱 깊은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갑곶나루에 이르렀을 때 정제두의 부음을 들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영익이 정제두의 손녀딸과 혼인하여 두 가문은 사돈관계가 되었다.

동국진체의 계보였던 그의 스승 백하 윤순(尹淳)도 정제두의 문인이었으며,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의 사위였으므로 동국진체와 강화도는 연관이 깊다 하겠다.


완구 신대우(申大羽)도 정제두의 손자사위가 되어 강화도 하곡 옆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이어 받았고,

그의 아들 석천 신작(申綽)에게 전하여 주었다.

정약용과 교분이 두터웠던 신작은 양명학을 공부한 후 실학으로 이를 절충하였으며

경학과 노장학에도 밝았던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정제두의 학문과 정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지어 양명학에 바탕한 객관적 역사관을 수립했고,

이면백의 ≪해동돈사≫, 이건창의 ≪당의통략≫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사기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후 자결하는 절의정신을 보였고,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은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인이었다.  

근대 민족주의 학자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난곡 이건방(李建芳)의 제자이다.

 

이처럼 경학과 문학, 역사,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강화학파의 선두에

하곡 정제두가 있다. 
 

[이건창 생가(인천시기념물 제30호)] 강화 화도면 사기리

 

 

 

 

 

강화학파의 비조인 정제두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요,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의 손자로 명문가문 출신이다.

학문적으로도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대학자였고,

세자의 스승으로 일하는 등 왕실과의 관련도 매우 깊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수많은 글들은 책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필사본으로 사장(私藏)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학문이 양명학에 바탕을 둔 때문이었다.


주자학 유일 사상이었던 조선 후기에 양명학을 공부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었다.

주자의 해석과 달리 유교 경전을 해석하면 이단으로 몰렸고,

공개적으로 양명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사림사회에서의 행세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가 사상의 중세적 해석인 주자학보다는 근세적 해석인 양명학이 당시의 현실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들은 경직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강화학이 강화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가학(家學)의 형태로 계승된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하곡집이 간행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곡집(霞谷集),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하곡집≫의 필사본은 현재 4 종류가 전해온다.

<22책본>과 <10책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고,

<11책본>과 <8책본>이 서울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능화 선생이 보았다는 <40여책본> 조선사편수회의 지방사료차입목록에 실려있는 <32책본>,

그리고 신대우의 수집본인 <35책본> 등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기록에 보이지만

그 소재를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하곡집≫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정제두의 학문과 정신이 담겨있는 문집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인쇄본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만 여기저기 흩어진 미정고(未定稿)로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22책본>을 저본으로 하여 ≪국역하곡집≫ 2권을 1973년에 발간하였고,

원문은 한국문집총간 ≪하곡집≫으로 영인 출판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정제두의 문집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크게 다행한 일이다.

 

 


현존본 가운데에서는 이 <22책본>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 하지만 그 자체에 결본도 있고

여기에는 수록되지 않은 글이 다른 본에 있는 것도 있어 역시 미정고 필사본이다.

이 <22책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이 가져갔던 것을 해방 후 문화재반환 때 도로 찾아온 것이라 한다.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김형우 감정위원 / 2007년 11월16일

- 기주짱 사진 추가

 

  

 

 

 

 

 

 

 정제두 묘 (鄭齊斗 墓)

 

 

 

*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5

* 시  대 : 조선후기(18C중반∼19C초)

* 수  량 : 묘 1, 묘비 1, 망주석 2, 문인석 2, 상석, 혼유석, 향로석 각1

   

 

* 묘역

-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2-6번지 지방도로(301번) 바로 옆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화읍에서 찬우물고개를 넘어 외포리 방향으로 가다가

양도면 인산저수지를 지나면서 좌회전하여 하우고개를 넘자마자 왼쪽에 있다.

아버지 정상징의 묘역의 바로 뒤에 있다.

 

- 묘역은 활개 없이 용미만 길게 있고, 그 앞에 원형의 봉분(5.1×9.2m)이 있다.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묘비가 앞쪽을 향해 서있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다.

 

- 문인석은 금관조복에 양관을 하고 있다.

 

- 화강암으로 만든 묘비의 전면에

‘조선의정부우찬성겸세자이사성균관좨주시문강공정선생제두지묘’의 29자가 세 줄로 새겨져 있고,

(朝鮮議政府右贊成兼世子貳師成均館祭酒諡文康公鄭先生齊斗之墓)

뒷면과 측면에는 ‘조선고우찬성문강공정선생신도표(朝鮮故右贊成文康公鄭先生神道表)'라고

새겨져 있으며, 1803년 신대우(申大羽)가 글을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썼다.

 

 

 

 

 

* 鄭齊斗墓 神道表 (原文)

 

(전면)

朝鮮議政府右贊成兼」

世子貳師成均館祭酒諡」

文康公鄭先生齊斗之墓」

조선 의정부우찬성 겸 세자이사 성균관좨주 시문강공 정선생제두지묘

 

(후면)

朝鮮故右贊成文康公鄭先生神道表」

英宗十二年八月壬申議政府右贊成成均祭酒文康公霞谷鄭先生卒春秋八十八用其年十月某甲葬江華府霞峴之」

原所居宅後庀賵視大臣將葬門人太學士尹淳爲文祭先生曰存此心而精萬理實此心而應萬事迺先生之學之所以」

明通淵塞卒以底乎坦泰安履然其處也黙而成之樂其本然之天而不以辨博英華耀於人其進也禮以行之恭爲世臣」

之節而不以道德賓師尊其身雖騖外者惑焉好高者疑焉而先生之所自信而弗悔有不求知乎人而謂孔顔之我師又」

曰唐虞之大法堙晦 祖宗之六典浸乖先生之存也若可以遠契近述用行而有爲先生之歸也後見其世衰運否學絶」

而不嗣烏呼徵先生於百世之下者不其在此乎不其在此乎先生諱齊斗字士仰嶺南迎日縣人高麗侍中文忠公夢周」

其十一世祖也曾祖諱謹承文博士祖諱維城右議政忠貞公考諱尙徵成均進士先生生于我 仁祖二十七年歷事」

肅宗 景宗 英宗 莊獻世子降膺輔養官貳師之 命其束帛之隆禮告 后之嘉謨在國史墓碑先生器宇渾璞和」

而不同淆世不可以反淳也故懷寶以優游果忘非所以爲訓也故時出以羽儀若乃篤志而力行博學而多聞自六藝羣」

󰄾����� 聖之法百家衆流之書歷代柱下之藏 國朝象魏之典凡載籍所紀知無不周海湧嶽蓄資用靡竭而其要又約之於爾」

󰄾����� 雅藝法先進制同時王經緯足以開物財輔足以矯時于是羣公懷義交口迭薦官內外凡三十一遷而先生皆遂不至至」

󰄿����� 亦不能久居也然 國有大疑大政先生未嘗不与聞有大事未嘗不造也進不近榮退不近名無適無莫維義之比不喜」

󰅀����� 著述不延生從卓然獨立於甲乙棼爭之際而物莫与競所謂不可得以貴不可得以賤不可得以親不可得以疏者先生」

󰅁����� 有之矣夫人坡平尹氏早卒有二子男厚一富平府使女適成川府使李徵成後夫人南陽徐氏亦先先生卒二夫人皆葬」

 

(측면)

湖西之天安郡不祔先生卒六十八年曾孫述仁樹石以表神道命大羽序之系以銘曰」

六部分族鄭一爲氏 鼻祖襲明著節麗代 憲憲侍中左海儒宗 不羨其川而源其豊 先生之作間氣懿德 聰叡」

明哲溫良淵篤 功逌愼獨道在含章 潛心會通黙契遺經 堯舜人同孔顔我師 繇是囂囂人莫我知 倬彼孔明」

容光必照 爰表景行永垂後曜

後學 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兼 經筵叅贊官 平州申大羽 撰」

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 奎章閣檢校直閣 達城徐榮輔 書」

今上三年八月 日 立」

   

 

조선 고 우찬성 문강공 정선생 신도표

 

영조(英宗) 12년 8월 임신(11일)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성균 좨주(成均祭酒) 문강공(文康公) 하곡(霞谷) 정(鄭) 선생이 돌아가시니 춘추는 88세였고, 그 해 10월 모갑(某甲)에 강화부 하현(霞峴)의 언덕, 사시던 집 뒤에 장사하였다. 나라에서 내린 부의(賻儀)는 대신(大臣)의 장례에 견주어 같이 하였다.

 

장례를 지낼 때 문인(門人)인 태학사(太學士) 윤순(尹淳)이 제문(祭文)을 지어 선생에게 올렸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선생은) 마음을 잘 가꿈으로써 만 가지 이치[萬理]에 통하였고, 마음을 채움으로써 만 가지 일[萬事]에 응하였으니, 선생의 학문이 밝게 통하고 깊고 충실하여 마침내 탄탄대로를 가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신(處身)할 때에는 묵묵한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었고, 본연의 천성(天性)을 즐기니 말이 많거나 꾸미고 과장함으로써 남에게 들어내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 나아갈 때에는 예(禮)로써 행동하고 공경으로 세신(世臣)의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도덕(道德)이나 빈사(賓師)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아니 하였다. 혹 겉모습만을 따지고 높은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생을 의심하더라도, 선생은 스스로를 믿으시고 후회하지 않았을 뿐더러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공자(孔子)와 안자(顔子)로 자신의 스승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제문에 이르기를, “당우(唐虞)의 대법(大法)이 사라지고 조종(祖宗)의 육전(六典)이 무너졌다 해도, 선생이 살아 계실 때에는 멀게는 도가 합하였고[遠契] 가깝게는 말로 서술하시어[近述], 힘써 행하면 이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세상이 쇠퇴하고 운수가 막히는가 하면 학문은 끊어져서 이어지지 못 하였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선생을 백세(百世) 뒤에까지 증명할 수 있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선생의 휘는 제두(齊斗)요, 자는 사앙(士仰)인데, 영남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다. 고려 때에 시중(侍中)인 문충공(文忠公) 몽주(夢周)는 그의 11대조(代祖)이며, 증조부의 휘는 근(謹)이며 승문박사(承文博士)요, 조부의 휘는 유성(維城)인데 우의정 충정공(忠貞公)이며, 부친의 휘는 상징(尙徵)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였다.

 

선생은 우리 인조(仁祖) 27년[1649]에 태어나, 숙종경종영종을 두루 섬기었고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태어나자 보양관(輔養官)과 이사(貳師)에 임명되었다. 스승을 청하는 높은 예와 임금께 아뢰던 좋은 계책은 국사(國史)와 묘비(墓碑)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선생은 도량이 박옥(璞玉)처럼 혼후(渾厚)하여 화합하면서도 남들과 함께 섞이지는 않았다. 혼잡한 세상을 순박하게 돌려놓을 수 없었던 까닭에 선생은 훌륭한 재주[寶]를 품고서도 한가하게 지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잊고 사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은 때때로 조정에 드나들었다.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행하고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았으니, 육예(六藝)에서부터 여러 성인들의 법, 백가(百家) 중류(衆流)의 책, 역대 주하(柱下)의 장서(藏書), 국조상위(國朝象魏)의 법전 등 무릇 서적에 기록된 것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마치 바닷물이 용출하듯 하고 산이 첩첩하듯 하여 아무리 자용(資用)해도 다함이 없었고, 그 요점은 또한 《이아(爾雅)》에다 요약[約]했던 것이다. 예(禮)는 선진(先進)을 따랐으며, 제도는 시왕(時王)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경위(經緯)는 족히 만물을 열[開物] 수 있었고 재보(財輔)는 족히 시대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로운 생각으로 입을 모아 선생을 서로서로 천거하였으니 벼슬은 내외관을 합하여 무려 서른 한 차례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모두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나아갔다 하여도 오래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의혹이 있거나 큰 정사(政事)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참여하였고, 큰 일이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나아가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나 나아가더라도 영화스러운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물러날 때에도 역시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꼭 주장하는 것도 없고[無適] 꼭 아니 하는 것도 없었으며[無莫] 오직 의(義)만을 따랐을 뿐이다. 저술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생도(生徒)들을 청하지도 않았다. 갑(甲)과 을(乙)이 서로 싸우는 데에 있으면서도 탁연히 홀로 서서 같이 다투는 일이 없었으니, 이른바 귀하다거나 천하다거나 또는 친근하다거나 멀다거나 하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분이 선생이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일찍 죽었는데, 두 자녀를 두었다. 아들 후일(厚一)은 부평 부사(富平府使)였고, 딸은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징성(李徵成)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 남양 서씨(南陽徐氏)도 역시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두 부인은 모두 호서(湖西) 지방 천안군에 장사하였고 선생과 합장(合葬)하지 않았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8년 지난 후에 증손 술인(述仁)이 석물(石物)을 세우고 신도(神道)를 표하고자 대우(大羽)에게 청하여 서문(序文)을 쓰게 하였다.

 

이어서 명(銘)하노라.  

"육부(六部)가 분족(分族)하여 그 중 하나가 정씨(鄭氏) 되었고, 비조(鼻祖)인 습명(襲明)은 고려 때에 절개가 높았도다. 훌륭한 시중(侍中)은 해동(海東)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풍성한 근원은 시냇물 줄기를 부러워하지 않았도다. 선생의 태어나심은 드문 기운[間氣]에다 아름다운 덕을 겸하였으니, 총명하고 명철하며 온화하고 돈독했다. 공부는 신독(愼獨)에 말미암고 도학은 함장(含章)에 간직하였으며, 회통(會通)에 잠심(潛心)했고 경전에 묵묵히 합하였도다. 요순을 본받고 공자와 안자를 스승 삼았으며, 경쟁하지 않고 자득한 역량이 있었는지라[囂囂] 사람들이 나를 몰라본다고 관심하지 아니 하였도다. 탁월한 그분의 크나큰 밝음은 빛이 되어 반드시 비춰질지어다. 훌륭한 행적을 표(表)하노니 길이 후세에 빛날지어다!"

   

후학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평주 신대우(1735-1809) 찬 

가선대부 경기관찰사 겸 규장각검교직각 달성 서영보(1759-1816) 서

금상[純祖] 3년[1803] 8월 일 세움

 

  

 

 

 

 

 

 

 

 정제두와 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 숙종 35년(1709) 8월 61세의 정제두(鄭齊斗)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연보(年譜)’에는

“장손(長孫)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하여 선묘(先墓) 가까운 곳으로 살고자 이사했다”라고

쓰고 있지만 내막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는 숙종 18년(1692) 스승인 명재(明齋) 윤증(尹拯)에게 보낸 편지(答尹明齋書)에서

“왕씨(王氏)의 학문에 대해서는 구구하나마 조그만 소견이 없지 아니하여 그대로 매몰시킬 수 없어

간간이 친구들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가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왕씨의 학문’이란 바로 왕양명(王陽明)의 학문, 곧 양명학(陽明學)을 말한다.

 

백호(白湖) 윤휴(尹?)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와 다르게 유교 경전을 해석했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

으로 몰린 그는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에서 양명학 연구는 곧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였다.

 

강화도 이주 후인 숙종 41년(1702) 정제두는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른바 왕씨의 설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정주(程朱)와는 같지 않지만

그 취지는 본래 정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고 비로소 양명학을 주자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울이나 경기에서는 집권당 노론(老論)의 주자학 유일사상 압제를 피할 수 없기에

몸을 스스로 섬에 고립시키는 대신 정신의 자유를 얻고,

유일사상 체제의 폐해에 대한 대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강화학파(江華學派)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저자 이긍익(李肯翊)과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

집권 노론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자 애국계몽운동에 나선 김택영(金澤榮),

상해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독립운동가 정인보(鄭寅普)는

모두 강화학파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닫힌 사회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강화로 유배 간 한 인문학자가 남긴 족적은 이렇게 거대했다.

 

이런 강화학파의 맥마저 잇지 못한 사회에서 새삼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남세스럽다.

더구나 인문학 위기의 해결책이 국가의 정책 · 예산 지원이라는 비(非)인문학적 해법으로 모아지는 것

자체가 인문학이 왜 위기인지 문제의 본질을 말해준다.

- 2006. 9.27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심경호(고려대교수·한문학)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浪人)의 손에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처참한 변고가 있은 뒤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국왕은 왕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1895년 음력 8월20일 그 사변이 있고 나서 달이 바뀌었어도 상복을 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은 홍승헌(洪承憲),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하에 엎디어 폐비의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잡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강한 이웃을 두려워하여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우리 조정이 못내 한심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변고가 있다면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다.

 

9월5일 이건창은 이렇게 ‘청토복소(請討復疏)’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의 눈을 거치지 않고 반송되었다.

13일에 다시 올렸으나 역시 내각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은 하나로 합해졌고 의병들도 일어났다.

이건창은 청나라 리훙장(李鴻章)이 개국을 주선할 때 이미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

수호통상(修好通商)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개항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그 방법을 허(虛)가 아니라 실(實)에서, 이웃나라가 아닌 아(我)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고 허명으로만 개화를 외치는 시류배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충청우도 안렴사(忠淸右道 按廉使), 말하자면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충청우도 감사 조아무개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을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국왕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낱낱이 알렸다.

서른두 살에 경기도 안렴사가 되었을 때는

연안 13개 고을을 진휼(賑恤)하고 광주 수원 개성의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었다.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 있을 때는

외국 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 파면시켰다. ‘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건창은 법률의 문구만을 좇는 도필리(刀筆吏 · 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글귀나 아로새기는 조고가(문필가)로 그치지 않았다.

‘참된 도리(實理)’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참된 일(實事)’을 실천하려는 강화학(江華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남의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가짐은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이후로 강화학이 지켜왔던 실천내용이었다. 또한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은 조부 이시원(李是遠)의 가르침이었다.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녹수작 · 錄囚作)에서 이건창은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라 하고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도다’라고 하여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측은해 하였다.


그 시기에 태안반도의 안흥에서 수군(水軍)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와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환곡(還穀·농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기층민의 애환에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뜻에서 나왔기에 그 말이 절실하고 그 사상이 온화하면서도 강건했다.
그는 결코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산문은 구한말의 문학가인 김택영(金澤榮)이 고려 조선의 대문장가 아홉을 꼽은 선집에 최후의 인물로 선별되어 있다.

1898년 귀양지인 고군산도에서 돌아와 마흔일곱의 짧은 생을 마친 뒤에도 그의 시문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을 비롯한 여러 불꽃같은 지식인들의 손으로 베껴져 전하다가 1917년 중국에서 ‘명미당집(明美堂集)’으로 간행되었다. 


이건창은 당색(黨色)의 제한 때문에 그의 정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는데는 붕당정치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 그는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였다.

윗대의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엮었던 사학 연구의 맥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



 

이건창의 자는 봉조(鳳鳥 혹은 鳳藻), 호는 영재이다.

1852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1898년 광무(光武) 2년이다.

당호(堂號)는 조부가 병인양요 때 순국하면서 남긴,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명미당(明美堂)이라 하였다.


노성인(老成人·노련하고 성숙한 사람)은 갔어도 그 전형은 남았다.

아우 이건승(李建昇)은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뒤 강화도 사기리에 남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저우(滿洲)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건창이 굳게 지켜낸 강화학의 정신과 민족자주이념은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2-1950)에게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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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 1930)>에서

조선의 양명학자들 을 다음의 세 부류로 분류하였다.

 

첫째, 뚜렷한 저서가 있거나 언론 사이에 분명히 징거할 만한 것이 있는 자 - 최명길, 장유, 정제두

둘째, 양명을 비난한 말이 있으나, 전후를 살펴보면 속으로는 양명학을 주장한 자 - 이광사, 이영익, 이충익

셋째, 양명의 학을 언급한 바 없고 주자를 존숭하지만, 그의 주장의 핵심적 정신이 양명 학자인 자 - 홍대용 등

 

이 중에서 정제두를 제외한 대부분은 스스로 양명학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조선 양명학파에 대해 ‘양주음왕(陽朱陰王), 외주내왕(外朱內王)’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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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