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강화] 고려궁지 內 조선시대 관아의 복원에 대하여

Gijuzzang Dream 2007. 11. 15. 14:41

 

 

 

 

 

 

 

 

 강화도 '고려궁지' 내 조선시대 관아 복원에 대하여

 

 

정부는 1933년 시행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의해 지정되어 있던 ‘고적(古蹟)’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됨에 따라 사적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1964년 일괄적으로 재지정할 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건물지를 정확한 고증없이 그대로 승계하여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高麗宮址)’로 지정하였다.

 

고려궁지란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

사용했던 궁궐지를 말한다.

 

그런데 199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조선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약탈된 고문서반환을 촉구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정부가 긍정적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에 강화도에서는 소실되고 터만 남아 있던 외규장각을 복원하기로 하였으며,

추정건물지를 발굴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규장각

 

 

 

 강화부 조선궁전도

 

 행궁

 

 

그런데 문제는 외규장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사적인 ‘고려궁지’내에 있었으며,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지난 1995년 12월부터 시작하여 2001년 10월까지 6년여에 걸친 네 번의 조사에서 청자편이 몇 점 출토되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고려시대 왕궁지가 아닌 조선시대 건물지로 결론 내렸다는 점이다.

 

보고서 제목도 「강화 조선궁전지」로 한 후 부제를 ‘외규장각지’로 명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조선궁전지’로 명칭을 부여한 이유는

이곳에 광해군 14년(1622)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세운 봉선전(奉先殿)을 시작으로

인조 9년(1631)에는 행궁(行宮), 숙종 21년(1695)에는 장녕전(長寧殿),

숙종 39년(1713)에는 만녕전(萬寧殿), 정조 5년(1781)에는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고려궁지 內는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 4년(1626) 강화부에서 강화유수부로 승격된 후

사용하던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 궁전관련 건물들은 강화유수부내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자연스럽게 오늘날에도 이 명칭이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점과

만약 유효하다면 사적지내에서 진행되는 건물복원이 사적지의 성격과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1964년 일괄적으로 지정된 이후 오늘날 일부 사적지 가운데

명칭의 타당성이 재검토되어야 하는 유적지가 다소 확인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 청에서는 지속적으로 명칭변경을 하고는 있지만

이처럼 명칭과 역사적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진 유적은 드물다.
 

따라서, 우리 청에서는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사적분과위원회에서 올려 발굴조사 결과처럼 ‘강화 조선궁전지’로 하거나

공간내 건물의 최초 성격이 ‘강화유수부’였던 만큼 “강화 조선궁전지와 강화유수부”로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고려궁지”를 고집한다면

사적지내 건물복원이 이루어질 경우 현재처럼 외규장각·동헌·이방청 등의 건물보다는

고려시대 궁궐과 관련된 건물을 복원해야 역사성이 온전히 재현될 것이다.

 

즉, 발굴조사 결과 고려궁지와 무관하며 복원해야할 고려시대건물지 자체가 없으므로

사적지의 명칭과 건물의 성격이 전혀 다른 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 문화재청 사적명승국 사적과장 김승한

- 2007.10.26 (기주짱이 사진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