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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梨花莊) - 이승만대통령 사저

Gijuzzang Dream 2008. 8. 18. 11:27

 

 

 

 이화장(梨花莊)

 

 

 

국가 지정문화재로 승격 추진, 대한민국 초대정부 조각본부

 

 

이승만 대통령 사저, 초대 내각 구상한 역사적 장소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아 서울시는

1945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초대정부의 조각본부(組閣本部)였던

이화장(梨花莊)을 국가 지정문화재(사적)로 승격 추진한다.

현재 이화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해 있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1875-1965)의 사저이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구상한 역사적인 공간으로,

활공간으로 쓰였던 본채와

조각본부였던 조각당(組閣堂) 등 주요 건물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경승지로 이름났던 낙산의 역사적 경관이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이기도 하다.

 

이에 서울시는 국가 지정문화재(사적) 지정을 추진키로 하고,

지난 7월 문화재청과 서울시 문화재위원 합동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보고한 결과 만장일치로

사적 지정 가치가 있다고 의결됨에 따라 지난 7월 28일 문화재청에

국가 지정문화재 지정을 정식으로 신청했다.

문화재청은 오는 9월 중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에서

이화장의 사적 지정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낙산 자락에 자리한 이화장, 본채와 조각당 등 보존

 

서울 낙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이화장은

1930년대에 황온순(일제시대 부호로 유명했던 강익하의 부인으로 후에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원불교 종사를 지냄)에 의해 최초 건립된 유적.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와 임시 거처인 마포장에 머물다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화장을 매입해 1947년 10월부터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돼 1948년 8월 경무대로 옮겨가기까지 거주했다.

 

또한 4.19 발생으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하야한 후 1960년 5월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잠시 거처하기도 했다.

 

 

건물 규모는 약 230㎡로, 정면 7칸, 측면 6칸 단층 팔작지붕의 본채와

정면 2칸 반, 측면 2칸 반, 맞배지붕의 조각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본채는 검소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고, 조각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내각을 구상했던 곳.

 

 

 

이화장은 광복 이후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김구의 경교장(京橋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등 당시 정세를 이끌어가던 세 구심점 가운데 하나로서

특히 남한 중심의 단독 정부 수립론의 근거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5·10 총선거에서 승리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에는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초대정부의 조각본부이자 초대 대통령의 집무공간으로 사용됐다. 이곳에서 각 부 장관, 처장 등 인선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2008년 08월18일 하이서울뉴스

 


 

 

 

 이화장(梨花莊)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머무르며 새롭게 들어선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발표했던 집이다.

 

엊그제 이승만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66) 여사의 안내를 받아 이화장 곳곳을 둘러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품격이 있는 지세(地勢)를 간직한 터였다.

우선 집 뒤쪽으로는 바위 화강암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암벽은 낙산(駱山)에서 내려온 지맥이 뭉쳐 있는 장소라는 증거였다.

 

건국내각 명단을 발표했던 '조각당(組閣堂)'은

마루 2평, 방 2평 반 정도의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방 안에는 '방구명신'(邦舊命新: 나라는 오래지만 사명은 새롭다)이라고 쓴

이 박사의 친필액자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각당 자리는 암벽에 올라타고 있어서 기운이 강한 지점이었다.

서향(西向)집인 이 터에서 앞을 보면 서울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부터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의 봉우리들이 산성(山城)처럼 힘차게 보이고,

다시 둥그런 모양의 인왕산이 있고,

그 옆으로는 연세대 뒷산이 삼각형 모습인 문필봉(文筆峰)으로 보였다.

집 뒤는 암벽이요, 가운데로는 바위계곡으로 물이 흐르고,

전망에는 서울의 명산들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호쾌하면서 기운이 강한 터는 뜻이 높은 문사(文士)가 거처할 만한 명당이다.

 

원래 이 터는 대제학을 지낸 신광한(申光漢:1484~1555)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는 생전에 낙봉(駱峰), 석선재(石仙齋), 청성동주(靑城洞主)라는 여러 개의 호(號)를

사용하였는데, 이 터를 보니까 왜 그런 호를 사용하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약 200년 뒤에 당대의 문사였던 표암 강세황(1712~1791)도 집 뒤의 바위암벽에 매료되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고 새겨놓았다는데, 지금은 흙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이화장은 대한민국의 산실이라는 역사적인 비중에 걸맞게 좀 더 단장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 품위 없는 현재의 철제대문을 철거하고, 전통한옥의 솟을대문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일부에 금이 간 벽돌 담벼락도 한옥 담으로 교체해야 한다.

유물전시관도 새로 지어야 한다. 제습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유물이 썩고 있는 중이다.

올해가 '건국 60주년' 아닌가!

- 조선일보, 조용헌칼럼,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2008.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