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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걸 결심하기 전 먼저 올림피아 경기장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 그곳에서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식사 시간도 정해져 있고, 음식도 정해진 것만 먹어야 한다. 케이크도 없고 달콤한 음식도, 시원한 물도 없다. 와인도 마실 수 없다. 시간표에 따라 훈련도 받아야 한다.
본인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추위에도, 비가 내려도 마찬가지다. 트레이너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그런 다음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면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야 한다. 팔이나 다리를 삘 수도 있다. 먼지를 뒤집어쓸 수도 있고 매를 맞을 수도 있다. 운이 나쁘면 질 수도 있다. 좋다! 그래도 올림피아 경기에 나가고 싶다면 가서 싸워라!
-히에라폴리스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고대 그리스에는 4개의 범(汎)헬레니즘 경기가 있었다. 범헬레니즘 경기란 전 그리스인이 참가해 축제처럼 벌이는 경기라는 뜻이다. 모두 신들을 기념하기 위한 경기였고 연극이나 음악 공연 등 문화행사도 열렸다. 범헬레니즘 경기는 ‘관(冠)경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승자가 나무나 식물의 가지로 만든 관을 부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神들을 기념하기 위한 경기
올림피아 경기는 4년마다 제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올림피아에서 열렸다. 각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머리에 올리브관을 씌워주었다. 피티아 경기는 4년마다 아폴론을 기념하기 위해 델피에서 펼쳐졌고,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이스트미아 경기는 2년마다 포세이돈을 기념해 코린토스 근처의 이스트미아에서 열렸다. 우승자는 머리에 소나무관을 썼다. 네메아 경기는 2년마다 네메아에서 제우스를 기념해 열렸고, 우승자는 샐러리관을 썼다.
근대 올림픽은 이중에서 올림피아 경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마땅히 우승자의 머리에 올리브관을 씌워주어야 제격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도 우승자에게는 모두 올리브관을 수여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올리브관을 “올리브로 만든 월계관”이라고 했다.
월계관이 이처럼 승리의 상징이 된 것은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고대 로마에서 맨 먼저 개선장군들이 월계관을 쓰고 행진을 벌였다. 월계관은 그 후 로마 황제가 쓰다가 점차 운동경기의 승자도 부상으로 받아 쓰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월계관은 오늘날까지 명예, 승리, 평화의 상징이 됐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이 받은 것도 명칭은 월계관이지만 월계수로 만든 게 아니라 ‘북미산 참나무로 만든 월계관’이다. 손기정 선생이 부상으로 받아 시상식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화분도 북미산 참나무 묘목이었다. 이 묘목은 그동안 거목으로 자라 ‘월계관수’라는 이름으로 현재 서울 만리동 손기정 기념공원에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월계수를 뜻하는 ‘다프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월계수로 변한 요정 다프네를 떠올리게 한다. 아폴론은 자신의 사랑이 응답받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의 표시로 다프네가 변신한 월계수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현재 그리스를 상징하는 문장도 월계관이다.
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4대 경기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스포츠 행사였다. 이 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기원후 393년까지 4년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엘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여름에 열렸다. 올림피아 경기와 경기 사이의 4년 동안을 ‘올림피아데’라고 했다. 올림피아데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간 단위로 흔하게 쓰였다.
올림피아 경기의 역사는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헤라클레스가 자신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우게이아스에게서 엘리스를 빼앗고 창설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펠롭스가 전차 경주에서 속임수를 써 장인 오이노마오스를 이기고 죽인 다음 그 죄를 씻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합각머리 벽에는 펠롭스의 전차 경주가 조각돼 있다.
북미산 참나무로 만든 손기정 월계관
올림피아 경기는 원래 달리기 한 종목밖에 없었다. 거리는 1스타디온. 현재 거리로 환산하면 191.78m다. 우승자는 제우스 신전 앞의 제단에 횃불을 점화했다. 그것은 특별한 명예로 여겨졌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달리기 경주의 우승자 명단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76년 것이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의 시작을 기원전 776년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림피아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에는‘에케케이리아’라는 ‘성스러운 휴전’이 선포됐다. 경기장에 무기를 들고 올 수도 없었다. 누구나 안전하게 올림피아에 들락거릴 수 있었다. 경기의 경호는 스파르타인이 맡았고, 조직은 올림피아가 있던 엘리스인이 담당했다.
- 주간동아, 2008.08.12 648호(p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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