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간도를 잃으면 백두산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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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산케이 신문은 최근 중국이 백두산 안내판에서 한글을 지우고 중국 한자를 표기한다고 보도했다. 앞으로 중국을 통해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한국인들에게 백두산은 이제 낯선 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읽고 장백(창바이)산을 오른다고 해서 그 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우리의 영토 관념에는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생각이 단단히 박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아니더라도 초등학생도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도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간도가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백두산은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과연 간도를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또 백두산과 간도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즉 백두산과 간도는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산과 간도는 이와 입술의 사이라고 비유하면 정확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란 말처럼 간도를 잃으면 백두산도 잃는 것이다. 또 백두산을 잃는다면 당연히 간도를 잃는 것이다. 백두산 주위를 돌아보면 서쪽에 서간도가 있고, 동쪽에 동간도·북간도가 있다. 간도를 잃어버리면 백두산만 외롭게 남는다. 때문에 1712년 먼 길을 찾아와 백두산을 자신의 땅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백두산은 중국으로부터 너무 멀었다. 백두산 길을 안내한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이곳은 조선인들에게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이화자 연구교수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에는 중국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왕조의 백두산 인식’이라는 논문의 결론만 보아도 이 논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세종 때 ‘오례의’를 정할 때 백두산은 국가 사전에 들지 못하고 소정관이 스스로 행하던 산천 명록에서 삭제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백산은 태조 탄생지인 영흥의 북쪽 진산으로서 중사(中祠)에 들었다. 북부 관방에 있어서 중요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정계 결과 천지 남쪽 10여 리 되는 곳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으며 백두산 천지가 청에 귀속되었고 분수령 이남이 조선에 귀속되었다. 결국 백두산은 조청 양국의 경계가 되었다. 하지만 백두산은 조선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산이었다. 고려사에도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고려사 공민왕 6년 윤 9월에는 “우필흥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옥룡기’에 이르되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이화자 교수가 언급한 시기인 세종 때 김종서는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라는 시조를 지었다. 한때 강성했던 청나라의 강희제가 조상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일시적으로 과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백두산이 하루아침에 중국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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