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 인식을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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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되지 않았나요?” 간도 이야기를 꺼내면 간혹 듣는 말이다.
‘이만하면’이란 뜻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 · 중 변계조약을 말한다. 이 변계조약에 따라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5%를 차지하고, 중국은 45%를 갖게 됐다. 두만강 경계선은 백두산 쪽 지류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홍토수를 기준으로 천지 경계선과 맞닿게 했다. 이 경계선으로 1909년 간도협약에 따른 석을수(두만강 지류) 경계선보다 약 280㎢이 늘어나게 됐다. 이 면적은 서울의 45%에 해당하는 넓이다. 간도협약 때보다 땅덩어리가 많이 늘어났으며, 1712년 정계비 건립 당시 제외됐던 백두산 천지를 반쪽이나마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의 영토 의식은 두만강과 압록강에 머물러 있다.
외교사를 전공한 노계현 전 창원대 학장은 ‘조선의 영토’(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라는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따라서 이 지대를 지배하던 민족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낙동강이나 한강을 넘나들 듯이 자유로이 왕래하였지 통제를 받거나 제어를 당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이라고 규정지은 것은 1909년에 일본이 불법적으로 청국과 소위 간도협약이라는 것을 체결한 때부터다. 이 조약은 본문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원천적으로 무효다. 이 조약을 체결한 다음 해인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그들의 교육지침에 따라 두만강과 압록강이 국경이라고 교과서에 통해 가르쳤으며, 그 후로 두만강과 압록강이 우리에게 국경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교육받은 세대가 깊은 연구나 검토 없이 이 국경 문제를 그대로 후대에게 가르치고 있어 문제가 고착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된 역사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우리 영토를 바로 볼 수 있는 첩경이다.
노 전 학장의 주장이다. 20세기 이전만 하더라고 조선과 청은 뚜렷한 경계선을 갖지 못했다. 백두산 정계비조차 무리하게 그리고 잘못 경계를 짓는 바람에 혼돈만 불러일으켰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대다수 이주민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면서 우리나라의 국경의식은 확장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서 남의 나라 땅에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은 최초의 주민이었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은 독립운동 시기를 거쳐 지금은 중국 내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양보를 중국에서 얻어냈는지도 모른다. 조·중 변계조약은 실리적으로 많은 것을 얻어냈을 수 있다. 하지만 두만강-압록강 국경선을 사실상 인정해줌으로써 명분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를 들면, 독도에 풍부한 에너지 자원이 있다고 해서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땅이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다. 간도 역시 마찬가지다. 간도 영유권은 실리를 얻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명분을 지키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다. - 2008 10/21 위클리경향 7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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