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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

Gijuzzang Dream 2008. 8. 1. 10:12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 - 수원화성 

 

- 이달호 (수원시 학예연구사)

 

▲ 세계문화유산 화성
한자는 정조의 친필을 모아 만든 것이다.

 

화성 건설의 배경 중 주요한 것 중의 하나는

1786년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와 그 어머니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죽음으로 야기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 자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옛 수원부의 읍치가 사도세자가 묻힐 ‘명당’으로 확정되었다.

1789년 이 명당으로 사도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고 새로운 신도시 화성(華城)이 건설되었다.

 

더 나아가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새로운 신도시에

행궁을 둘러싸는 화성을 축성하고 도시기반 시설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화성 건설의 최종 목표는 1790년 순조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가 15살이 되는 1804(갑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머물며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도하는 왕권강화의 기지였다.

 

화성의 제도는 기존 중국과 우리나라의 모든 성제(城制)를 검토한 후

총(銃)과 포(砲)에 대비해 우리식으로 만들었다.

화성에 투입된 경비에서는 1년 호조(戶曹) 예산에 버금가는 약 100만 냥에 해당하는 자금이

2년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투입되어 국가 재정이 취약해지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화성 건설은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시장 팽창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싹트고 있던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이다. 이러한 상품화폐경제의 싹들은 16세기부터 태동하지만

숙종 대 이후부터 일반화된다고 생각한다.

 

숙종 대 이후 무르익는 ‘자본주의적 싹’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바로 화성 건설이라고 생각된다. 그 구체적 실천의 장이 바로 화성 건설이었다.

더불어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의 의식구조도 ‘자본주의적’으로 변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정조와 정약용의 ‘임노동(賃勞動)’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임금 지불방식에서 자본주의에서나 나타나는 ‘성과급제’와 ‘도급제’를 적용하자는 논의와

이의 실천이 바로 화성 건설이었던 것이다.

 

 

▲ 화성안내도

 

 

화성은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꿈,

즉 천하의 명당, 조선조 제2의 신도시, 서울 남서부의 방어 기지,

순조가 15살이 되는 1804년 사도세자 추숭을 위한 왕권 강화의 도시,

농업생산과 상업의 중심도시 건설을 위한 실천의 장이었다.

 

더욱이 1794년부터 1796년 9월까지 벌였던 화성 건설은

전국에서 총동원된 인력과 화폐를 지불하고 구입한 물자들로 이루어진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이자

조선조 18세기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과학의 모든 면을 보여준 실천의 장이었다.

조선 초기의 ‘경제외적 강제’의 시대에서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결정체가

바로 화성신도시 건설이었던 것이다.

 

화성 성역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신도시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재료와 물품은 다양하고 종합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획적인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제조건이 중요하였다.

특히 재료와 상품의 조달이 중요하였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전국적인 상품시장과 서울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배후에 존재하여야 하였다.

또한 특수한 물자들이 전국 각처의 시장에서 화폐를 지불하고 구입하여 조달되었다.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