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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 -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사람

Gijuzzang Dream 2008. 7. 26. 00:02

 

 

 

 

 한. 창. 기.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사람

<특집! 한창기>
강운구 · 창비 · 2008

 

 

옷이 500벌은 되는데도 맞춤 양복을 주문해놓기가 무섭게

‘입을 옷이 없다’고 빨리 옷 지어내라고 재촉하던 사람,

 

제대로 지어 입은 한복은 높이 쳤지만 개량 한복이라고 불리는

계통 불명의 옷을 누구보다 미워하고 경계한 사람,

 

‘한국의 발견’ 11권과 ‘민중 자서전’ 20권을 만든 사람,

 

대놓고 누구를 가르친 적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이를 흠모하고

스스로 따르고 배워 제자됨을 자랑스럽게 발설하게 한 사람,

 

한글학자가 아니면서 한글학자보다 더 한글에 애착을 갖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

 

디자이너가 아니면서 디자이너보다

더 맵고 짠 디자인에 대한 눈썰미와 철학을 지닌 사람,

 

쓸데없는 장식과 군더더기를 혐오하고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의 품격을 높이 산 사람,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따르고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면서도

남이 하지 않을 일들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그것의 쓸모있음을 기어코 증명해보인 사람,

 

큰 일에는 대범하고 작은 것에는 엄격해서 인쇄물로 박힌 작은 실수에 분을 참지 못하고

“다 총살시켜버리겠다 !” 하고 호통치던 사람, 그 사람이 한창기다.

 

한창기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의 ‘고읍 촌놈’으로 나서 한반도 남쪽에서 살다가

1997년 2월 3일 저녁에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창기를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다.

직판 세일즈맨 1세대를 키워낸 교육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독창적인 언론인,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문화비평가, 눈썰미가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

한국 전통음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탠 사람, 한복과 한옥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

국어학자를 울린 재야 국어학자, 그 사람이 바로 한창기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일, 혹은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일에 제 몸을 던질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느냐를 고민한 사람이 한창기다.

 

그이는 여러 사업을 훌륭하게 일궈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제 한 몸과 그에 딸린 피붙이들이 호의호식하는 데 쓰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찾는 데 아낌없이 썼다.

한창기가 그 방법적 도구로 찾아낸 게 월간지를 만드는 일이다.

그이는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이다.

잡지를 내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분별이 또렷했던 사람이 한창기다.

 

우리 잡지들이 금과옥조처럼 섬기던 여러 관행을 버리고 새로움을 궁리했는데,

새것을 무조건 숭상하는 습성 때문이 아니다.

그이는 잡지 만드는 사람들한테 통하는 옛 관행을 과감히 다 버렸는데,

옛것의 낡음이 시효를 지나 현실에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혁신의 불쏘시개가 되지 못할뿐더러 그 오래된 것의 굳건한 보수성으로

새 기운을 누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창기는 오히려 새것보다 낡고 묵은 옛것을 더 섬기는 사람이었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두루 꿰뚫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살려내고 빛낼 방법을 찾는 일에

열중했고, 그것들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도록 말로만이 아니라 몸의 실천으로 도왔다.

이를테면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전통 옹기, 유기 칠첩반상기, 징광잎차 들을 되살려내는 데

제 돈과 시간과 힘을 보탰다.

한창기는 잡지쟁이들이 ‘와리스께’라고 부르던, 우리 잡지 편집의 틀과 내용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우리 잡지 편집의 역사는 한창기 이전과 이후로 뚜렷하게 나뉜다.

잡지의 체제와 판형, 그리고 ‘와리스께’를 뒤집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속의 고갱이와 표현방식도 바꾸었다.

 

우리 토박이말들을 찾아내 쓰는 데 앞장서고,

자연스러운 한글 문장의 본을 따르려고 애쓴 사람답게 조악하고 거친 한글 문장으로 된 글들을

아주 미워하고 끔찍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 잡지에 글을 내는 이들의 비틀리고 눌린 문장들을

바로 펴고 세워 내보냈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이들의 글은 그 대가만 치르고 잡지에 내보내지 않았다.

 

한창기는 세월이 더 흐르면 잊힐 사람이 아니라 더 크게 자라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될 사람이다.

그만큼 그이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이의 생각은 당대에 함께 산 사람들보다 적어도 한 세대는 앞서갔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생각조차 너무 앞서 있어

아무도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시대에 그 앞선 생각들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이의 실천으로 처진 시대를 따라오던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고,

그 힘이 미친 현실의 여러 부면도 따라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한창기는 문화의 변화와 혁신을 이끈 선구자인 셈이다.

 한창기

이 책 ‘특집! 한창기’는 강운구를 비롯한 쉰아홉 사람이 모여서

그들의 기억에 남은 한창기를 다시 불러낸다.

저마다 한창기를 만난 때와 사정이 다르니

그이에 대한 기억이나 평가도 제각각이다.

더러는 그이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 일했고,

더러는 태어나 산 시대가 달라

이승에서 아무 인연이 없던 사람도 있다.

 

쉰아홉 명이 밥 벌어 먹는 방식과 생각하는 바는 크게 달라도

한 가지로 닮은 생각은 그이의 부재를 애통해하고,

이마적에 새삼 그리운 사람으로 그이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중 일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근엄한 영국 신사 이미지였던 한창기 사장은 뜻밖에도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김당),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화인을 만날 수 있다.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는 한국 현대성의 랜드마크다.”(선완규),

 

“한 선생은 날카롭게 보이지만, 대단히 겁이 많은 평화주의자다.

세일즈맨의 ‘전설’이었기 때문에 눈앞의 실리만 취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기 쉽지만

꿈이 많은 이상주의자이며,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사람이다.”(강운구),

 

“오늘의 이 땅의 혼미한 정신적 상황을 보며 한창기 선생의 부재를 더욱 아쉬워한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줏대 있는 열린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이명현),

 

“나는 일 년에 나흘, 네 분 스승의 기일에 단식한다.

그 네 분은 함석헌 선생과 공병우 박사, 라즈니쉬, 한창기 사장이다.”(송현),

 

“그의 행동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자유분방함, 오만한 자신감, 파격적인 방상, 터무니없이 핏대를 올리며 펴는 자기 주장,

좀처럼 굽히지 않는 고집, 해박한 지식, 궤변에 달변, 다방면에 걸친 집요한 관심,

인정머리 없는 태도, 영악한 이기심 들이 정말 싫었다.

어떤 문제를 제기해도 늘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 막힘 없음도 그랬다.

그를 별난 세계의 별난 사람쯤으로 치는 것이 편했다.”(강창민),

 

“빛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 했는데 남보다 앞서 독창적인 경지를 개발한 그에 대해

허물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막상 허물이라 해보았자 총각 홀아비로 늙는 것에 대한 수군거림,

아니면 그에게 골동을 팔고 값을 더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차지 않아 나오는 뒷소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수군거림, 뒷소리도 허물은 허물이라 치더라도 한창기는 단연 시대의 전위에 섰던

인물이다.”(김형국),

 

“그리고 지금, 때로는 우리가 해놓은 일이 이녁 성에 차지 않아서, 또 때로는 그리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은데 제 분에 못 이겨서 길길이 뛰던, 그러나 이제는 볼 수 없는, 한 사장의 카리스마가

그립다.”(이재성)

이 책에 함께 모여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쉰아홉 사람은

그이와 이러저러한 인연을 맺은 사람이고, 그이의 얼과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한창기를 바라보는 방식은 쉰아홉 가지다.

쉰아홉 가지의 방식에 공통된 것은 “인연의 특별했음”과 “주관적으로 해석됨”이다.

 

이 고집스러운 잡지쟁이를 추모하는 책답게 잡지 형식으로 단행본을 꾸렸다.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끌어안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의 사무침과 보람을 찾고 묻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 보성 사람 한창기는

이른 나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순한 살에 세상을 떴다.
- 2008 07/29   뉴스메이커 785호 [독서일기]

 

 

 

 

 

 

 

   한창기, 그를 둘러싼 59개의 기억

말 혹은, 생각만으로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추억(기억)한다는 것은 구체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말과 생각이란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허망하게 터져 버리는 비누거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기억을 가장 효과적으로 남기는 방법은 글로 기록하는 게 아닐까.

 

여기 그 성향과 지향, 철학이 각기 다른 59명이

'글'로 기록한 기억 속에 뜨거운 화인(火印)처럼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한창기(1936~1997).

 

지방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면서도

판·검사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잡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주도한 사람.

구두선이 아닌 실천으로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고민한 사람.

 

바로 이 한창기를 가까이서 지켜본 지인들이 사후 11주기를 맞아

생전에 그와 함께 나눈 기억의 편린을 깨알같은 글씨로 채워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름하여 <특집! 한창기>(창비).

 

일평생 '잡지쟁이'로 살았던 이를 추모하는 책답게 그 제목과 형식도 '잡지풍'이다.

앞서 그의 생을 대충 뭉뚱그려 요약했지만, 이는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창기의 어떤 면이 이처럼 적지 않은 이들로 하여금 그를 '흔쾌히' 추억하게 했을까?

59명 필자 중 하나인 설호정의 견해를 빌린다.

 

'몇 세대 앞선 선진적 업적을 남긴 언론-출판인이었으며,

미시적인 관찰력으로 머리카락에 홈을 파듯이 글을 쓰는 문화비평가였으며,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생동하는 광고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였으며,

심미안이 빼어난 격조 높은 문화재 수집가였으며…

국어학자가 울고 가는 재야 국어학자였으며….'

 

언론-출판인에 문화비평가, 카피라이터에 문화평론가, 거기다 국어학자까지.

한 사람 안에 이처럼 폭넓은 프리즘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 어렵다.

하지만, <특집! 한창기>의 출간에 관여한 59명 필자는

암묵적으로 아래와 같은 동의를 내리고 있는 듯하다.

 

"한창기라면 그럴 수 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1976년 <뿌리깊은나무>를 만들면서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 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창조의 일을 문화 쪽에서 거들겠다"는 창간사를 통해

군사독재에 대한 은유적 저항을 보여준 한창기.

 

뒤이어 1984년 <샘이깊은물>을 내면서는

"이 문화잡지는 이른바 '여성지'가 아니라 '사람의 잡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도 탐독할 잡지입니다"라는

세련된 성(性)정치학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눈은 이미 앞선 시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 명의 필자가 수십 가지의 시각으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며 쓴 글을 모은 것이기에

<특집! 한창기>를 한마디의 말로 정의해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이들 모두는 한창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하여, 이 책의 재료는 '그리움'이다.

 

수록된 원고 하나 하나가 모두 빼어나지만, 기자가 특히 눈여겨본 글은

강운구가 쓴 '한창기 사진',

'열여섯 가지 금기를 무시하고 태어난 위험한 잡지'라는 제목으로 쓴 윤구병의 회고,

소설가 안정효가 쓴 '키보이스의 한글 탐험' 등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 한창기를 사장으로 모신 김당 기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편집자'

역시 인상깊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해묵은 표지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된 것도 반가웠다. 이는 <특집! 한창기>가 독자들에게 주는 덤이 아닐지.

- 2008-02-01,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한창기의 삶

 

<잡지계 혁명가> 한창기

 

 

시인 황지우씨는 선배 시인 김수영의 20주기 추도식에서
“씹어먹고 싶도록 그리운 사람이여!”라고 외쳤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창기(1936~1997)야말로 그렇게 외쳐 부르고 싶은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 한창기에 대한 그런 목마른 그리움을 품은 사람들이
열한 해 전 세상을 뜬 그를 기리며 책을 펴냈다.
<특집! 한창기>에는 사진가 강운구씨를 비롯해 일로, 뜻으로 생전의 그와 인연을 맺었던
쉰아홉 사람의 글이 실렸다.
지난해 10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펴낸 그의 글 모음
<배움나무의 생각>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 깊은 물의 생각>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그의 육필의 산물은 세 권의 책으로 모였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은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도대체 한창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글로써 그를 기리려 모여든 것일까.

가까이 사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한창기가 바로 이 말의 진실됨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특집! 한창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다채로움은 한창기 삶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사진가·언론학자·편집자에서부터 디자이너·사업가·국어학자·화가·음악인·출판인까지

참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다 여기 모였다.

 

그는 “국어학자가 울고 가는”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라는 특별한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한창기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수많은 별칭도

그가 이 잡지들을 창간하고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과 깊이 관계돼 있다.

그의 모든 관심의 물줄기는 이 잡지들로 모여들었고, 이 잡지들을 거쳐 다시 뻗어나갔다.

그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글들을 모은 <특집! 한창기>가 잡지 형식으로 편집된 것도

잡지 편집인으로서 그의 삶을 기억하려는 뜻의 결과다.


<특집! 한창기〉
강운구 외 58인 지음 / 창비

말하자면 한창기는 그대로 <뿌리깊은 나무>였고

<샘이깊은물>이었다.

세상에 잡지는 많고도 많지만, <뿌리깊은 나무>가 구현한 독보성과 독창성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의 특별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국 잡지사는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뿌리깊은 나무> 이후로 구분된다.”

 

다른 언론학자 유재천 교수도 단언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0년대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특히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었다.”

 

한창기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패악이 극에 달했던 1976년이었다.

그는 그 거친 세상에 자태 고운 잡지를 내놓았다.

그것이 조용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을 ‘외화벌이’로 귀결시킨 박정희 독재는

그 살벌한 체제의 보완물로서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민족도 문화도 주체도 없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그 ‘박정희식’에 대항하여 참다운 ‘우리 것’을 제시한 사람이 한창기였다.

“한창기의 ‘우리 것 사랑하기’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박정희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요할 힘도 없었지만, 그는 강요할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계몽도 아니었고 설교도 아니었다.

그는 세련된 포장과 알맹이로 ‘우리 것’의 값어치를 높여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시대에 ‘우리 것’ 곧 전통의 생활과 문화는 ‘낡은 것’ ‘추한 것’ 취급을 받았다.

서구식 교양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의식이 강했다.

그 자신 교양인이었던 한창기는 바로 이런 생각을 뒤엎었다.

그는 ‘우리 것’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놀라운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시대의 뒷길에 팽개쳐졌던 전통을 살려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제호가 벌써 그런 의식과 의지를 품고 있었다.

 

한창기는 독특한 의식과 의지는 잡지의 형식에서도 관철됐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는 잡지계의 오랜 금기를 모조리 깨뜨린 위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위반은 머잖아 한국 잡지의 새로운 전범이 됐다.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씨는

그 금기 위반을 열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글 전용 가로쓰기’다.

<뿌리깊은 나무>는 권위 있는 교양지들이 고수했던 ‘국한자 혼용’과 ‘세로쓰기’를 모두 버렸다.

그 사실을 두고 어떤 이는 “19세기 말 서재필 박사가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이래

가장 혁명적으로 한국 고유의 언론 매체를 창간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물>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민족을 민중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민중을 발견한 사람이 한창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민족 문화를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삶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는 그는 문화적 전위투사였다.

잡지의 민중적 관점은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분야로까지 점차 퍼졌다.

 

1980년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가

그 불온함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해 8월호로 <뿌리깊은 나무>는 폐간당했다.

민중의 삶에 뿌리를 두고 우리 것의 가치를 키웠던 그 나무는 밑동이 잘렸다.

그러나 한창기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한창이던 시절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 것이다.

‘여성용 가정잡지’로 등록됐지만 <샘이 깊은 물>은

<뿌리깊은 나무>의 정신을 올곧게 이은 또 하나의 <뿌리깊은나무>였다.

이 잡지에서도 한창기는 ‘당돌하고 발칙한’ 꼿꼿함을 한순간도 굽히지 않았다.

 

한창기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1남1녀’를 두었다고 말한다.

그 1남이 <뿌리깊은 나무>였다면 1녀는 <샘이 깊은 물>이었다.

두 잡지를 자식으로 둔 그는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그 자식들에게 쏟았다.

<샘이 깊은 물>이 태어난 지 13년 되던 1997년 그는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특별한 심미안으로 삶의 후미진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한 사람이었다.


한창기의 수첩

 

 

세일즈도 잡지도 ‘최고’를 추구한 심미안

 

한창기는 ‘우리 것’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것’ 전문가이기 이전에 그는 ‘서양 것’ 전문가였다.

그가 삶의 이력을 서양 것을 우리나라에 파는 사람으로 시작했다는 건 기이한 역설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한창기는 그 시절의 출세 코스인 법조인의 길을 거부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그가 <브리태니커> 세일즈의 리더가 된 데는 영어 능통자였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얼마나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지 브리태니커 본사 부사장이 그를 만난 뒤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우리말과 글에서 영어투, 일본어투를 없애고

민중의 입말을 말과 글의 바탕으로 만드는 일에 나섰던 것도

이런 명민한 언어감각 덕이었다고 한다.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창립한 그는 유망한 젊은이들을 불러모아 ‘세일즈 전사’로 키웠다.

그는 본사에서 보내온 ‘브리태니커 사람들의 신조’를

한국 사정에 맞게 다듬어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외우게 했다.

 

“나는 적극적이다. 나는 부지런하다. 나는 합리적이다. 나는 끈기가 있다. 나는 목표가 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종교의식과도 같은 그런 조회를 마친 세일즈맨들은 전국 팔도에서 뛰었다.

당시 고급 피아노 한 대 값이 넘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한창기는 회사 창립 2년 만에 수하의 세일즈 일꾼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때는 1500명을 거느렸다. 한창기의 회사는 ‘세일즈의 사관학교’로 알려졌다.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처음 도입한 회사였고, 마케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회사였다.

“보험회사 중역들이 와서 어떻게 교육시키나 도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이력서를 내고 입사해서 판매사원 교육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브리태니커 신조’는 뒤에 여러 기업체에서 흉내내 회사 이름만 바꾸어 쓰기도 했다.

 

그에게서 ‘설득의 기법’을 배운 뒤 나중에 사업계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이다.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도 한창기가 키운 ‘세일즈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의 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윤 회장의 말이다.

 

그렇게 서양 것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만든 것이 <뿌리깊은 나무>였다.

전성기 시절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구독자는 6만5000명을 헤아렸다.

당시 <신동아>의 정기구독자가 2만명이던 시절이었다.

 

세일즈에서 최고를 지향했던 사람답게 그는 잡지에서도 최고를 추구했다.

그가 추구한 최고는 그대로 그 시대 문화적 심미성의 최전선이었다.

- 한겨레,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