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창. 기.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사람 | |||||
옷이 500벌은 되는데도 맞춤 양복을 주문해놓기가 무섭게 ‘입을 옷이 없다’고 빨리 옷 지어내라고 재촉하던 사람,
제대로 지어 입은 한복은 높이 쳤지만 개량 한복이라고 불리는 계통 불명의 옷을 누구보다 미워하고 경계한 사람,
‘한국의 발견’ 11권과 ‘민중 자서전’ 20권을 만든 사람,
대놓고 누구를 가르친 적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이를 흠모하고 스스로 따르고 배워 제자됨을 자랑스럽게 발설하게 한 사람,
한글학자가 아니면서 한글학자보다 더 한글에 애착을 갖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
디자이너가 아니면서 디자이너보다 더 맵고 짠 디자인에 대한 눈썰미와 철학을 지닌 사람,
쓸데없는 장식과 군더더기를 혐오하고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의 품격을 높이 산 사람,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따르고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면서도 남이 하지 않을 일들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그것의 쓸모있음을 기어코 증명해보인 사람,
큰 일에는 대범하고 작은 것에는 엄격해서 인쇄물로 박힌 작은 실수에 분을 참지 못하고 “다 총살시켜버리겠다 !” 하고 호통치던 사람, 그 사람이 한창기다.
한창기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의 ‘고읍 촌놈’으로 나서 한반도 남쪽에서 살다가 1997년 2월 3일 저녁에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직판 세일즈맨 1세대를 키워낸 교육자,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독창적인 언론인,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문화비평가, 눈썰미가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 한국 전통음악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탠 사람, 한복과 한옥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 국어학자를 울린 재야 국어학자, 그 사람이 바로 한창기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일, 혹은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일에 제 몸을 던질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느냐를 고민한 사람이 한창기다.
그이는 여러 사업을 훌륭하게 일궈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제 한 몸과 그에 딸린 피붙이들이 호의호식하는 데 쓰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찾는 데 아낌없이 썼다. 그이는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이다. 잡지를 내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분별이 또렷했던 사람이 한창기다.
우리 잡지들이 금과옥조처럼 섬기던 여러 관행을 버리고 새로움을 궁리했는데, 새것을 무조건 숭상하는 습성 때문이 아니다. 그이는 잡지 만드는 사람들한테 통하는 옛 관행을 과감히 다 버렸는데, 옛것의 낡음이 시효를 지나 현실에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혁신의 불쏘시개가 되지 못할뿐더러 그 오래된 것의 굳건한 보수성으로 새 기운을 누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창기는 오히려 새것보다 낡고 묵은 옛것을 더 섬기는 사람이었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두루 꿰뚫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살려내고 빛낼 방법을 찾는 일에 열중했고, 그것들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도록 말로만이 아니라 몸의 실천으로 도왔다. 이를테면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전통 옹기, 유기 칠첩반상기, 징광잎차 들을 되살려내는 데 제 돈과 시간과 힘을 보탰다. 우리 잡지 편집의 역사는 한창기 이전과 이후로 뚜렷하게 나뉜다. 잡지의 체제와 판형, 그리고 ‘와리스께’를 뒤집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속의 고갱이와 표현방식도 바꾸었다.
우리 토박이말들을 찾아내 쓰는 데 앞장서고, 자연스러운 한글 문장의 본을 따르려고 애쓴 사람답게 조악하고 거친 한글 문장으로 된 글들을 아주 미워하고 끔찍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 잡지에 글을 내는 이들의 비틀리고 눌린 문장들을 바로 펴고 세워 내보냈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이들의 글은 그 대가만 치르고 잡지에 내보내지 않았다.
한창기는 세월이 더 흐르면 잊힐 사람이 아니라 더 크게 자라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될 사람이다. 그만큼 그이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이의 생각은 당대에 함께 산 사람들보다 적어도 한 세대는 앞서갔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생각조차 너무 앞서 있어 아무도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시대에 그 앞선 생각들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이의 실천으로 처진 시대를 따라오던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고, 그 힘이 미친 현실의 여러 부면도 따라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한창기는 문화의 변화와 혁신을 이끈 선구자인 셈이다.
이 책 ‘특집! 한창기’는 강운구를 비롯한 쉰아홉 사람이 모여서 그들의 기억에 남은 한창기를 다시 불러낸다. 저마다 한창기를 만난 때와 사정이 다르니 그이에 대한 기억이나 평가도 제각각이다. 더러는 그이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 일했고, 더러는 태어나 산 시대가 달라 이승에서 아무 인연이 없던 사람도 있다.
쉰아홉 명이 밥 벌어 먹는 방식과 생각하는 바는 크게 달라도 한 가지로 닮은 생각은 그이의 부재를 애통해하고, 이마적에 새삼 그리운 사람으로 그이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중 일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근엄한 영국 신사 이미지였던 한창기 사장은 뜻밖에도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김당),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화인을 만날 수 있다. ‘뿌리깊은나무’와 ‘한창기’는 한국 현대성의 랜드마크다.”(선완규),
“한 선생은 날카롭게 보이지만, 대단히 겁이 많은 평화주의자다. 세일즈맨의 ‘전설’이었기 때문에 눈앞의 실리만 취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기 쉽지만 꿈이 많은 이상주의자이며,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사람이다.”(강운구),
“오늘의 이 땅의 혼미한 정신적 상황을 보며 한창기 선생의 부재를 더욱 아쉬워한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줏대 있는 열린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이명현),
“나는 일 년에 나흘, 네 분 스승의 기일에 단식한다. 그 네 분은 함석헌 선생과 공병우 박사, 라즈니쉬, 한창기 사장이다.”(송현),
“그의 행동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자유분방함, 오만한 자신감, 파격적인 방상, 터무니없이 핏대를 올리며 펴는 자기 주장, 좀처럼 굽히지 않는 고집, 해박한 지식, 궤변에 달변, 다방면에 걸친 집요한 관심, 인정머리 없는 태도, 영악한 이기심 들이 정말 싫었다. 어떤 문제를 제기해도 늘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 막힘 없음도 그랬다. 그를 별난 세계의 별난 사람쯤으로 치는 것이 편했다.”(강창민),
“빛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 했는데 남보다 앞서 독창적인 경지를 개발한 그에 대해 허물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막상 허물이라 해보았자 총각 홀아비로 늙는 것에 대한 수군거림, 아니면 그에게 골동을 팔고 값을 더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차지 않아 나오는 뒷소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수군거림, 뒷소리도 허물은 허물이라 치더라도 한창기는 단연 시대의 전위에 섰던 인물이다.”(김형국),
“그리고 지금, 때로는 우리가 해놓은 일이 이녁 성에 차지 않아서, 또 때로는 그리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은데 제 분에 못 이겨서 길길이 뛰던, 그러나 이제는 볼 수 없는, 한 사장의 카리스마가 그립다.”(이재성) 그이와 이러저러한 인연을 맺은 사람이고, 그이의 얼과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한창기를 바라보는 방식은 쉰아홉 가지다. 쉰아홉 가지의 방식에 공통된 것은 “인연의 특별했음”과 “주관적으로 해석됨”이다.
이 고집스러운 잡지쟁이를 추모하는 책답게 잡지 형식으로 단행본을 꾸렸다.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끌어안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의 사무침과 보람을 찾고 묻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 보성 사람 한창기는 이른 나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순한 살에 세상을 떴다. |
한창기, 그를 둘러싼 59개의 기억
- 2008-02-01,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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