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
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
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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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被擄人)은 얼마나 될까.
전쟁이 끝난 뒤, 최명길은 가도(椵島)의 명군 지휘부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 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이다.
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포로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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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뒤 시기 심양(瀋陽)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최명길의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50만명은 안 될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청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포로들을 끌고 갔을까.
청은 일찍이 후금(後金)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로들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다.
후금은 전투, 납치 등을 통해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잡아가곤 했다.
그들은 후금으로 끌려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
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
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
특히 철장(鐵匠),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포로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을 때,
조선에 들어온 병사들 가운데는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출신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영역은 날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후에도 ‘포로 사냥’에 몰두했다.
특히 1629년 이후 명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매번 수만에서 수십 만의 한인들을 납치했다.
그들은 후금의 새로운 인구가 되고, 노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무렵에 오면, 청은 이미 상당한 수의 한인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
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 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포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이미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은 청(후금)과 ‘포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후금에 정착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포로(走回人)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후금은 조선에 대해 주회인들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그들의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청과 조선은 포로를 바라보는 개념과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청은 포로를 ‘혈전(血戰)을 벌여 얻어낸 정당한 성과’로 인식했다.
말하자면 피를 흘려 얻은 일종의 ‘소유물’이자 ‘재화’였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들이 달아나는 것이나, 달아난 포로들을 숨겨주고 송환하지 않는 조선의 행위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표시했다.
조선은 달랐다. 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
조선 신료들은 포로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혈육과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 때문에 이루어진
부득이한 행동’으로 여겼다. 따라서 주화인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도로 넘겨주는 행위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
나아가 도망 포로들을 붙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는 청의 요구를
‘짐승 같은 오랑캐들의 탐욕에서 나온 행위’로 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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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포로를 송환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
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내 처음으로 데려온 이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교섭했다.
당시 대마도와 막부(幕府)가 포로들을 일부 돌려준 것은,
조선의 원한을 다독여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쨌든 일본과의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한 조선의 생각은 나름대로 굳어졌다.
‘똑같은 오랑캐임에도 일본인들은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였는데,
만주족 오랑캐들은 어찌 이렇게도 잔인하단 말인가’.
자연히 조선 조정은 주회인 송환에 극히 소극적이었고,
청의 압박이 몹시 강해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몇몇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 실제 정묘호란 무렵까지만 해도 후금 또한 ‘포로 문제’ 때문에
조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아직 명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데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공략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통해 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조선은,
과거처럼 ‘혈육을 찾아 도망쳐온 포로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호소’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가 제시한 조건에서도 드러나듯이
‘포로 문제’를 둘러싼 청의 압박이 정묘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 속환(贖還)을 시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 때문에 주회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청에 끌려간 혈육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이 거의 유일했다.
속환이란 포로의 몸값을 청 측 주인에게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
포로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이 서게 되었고,
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
청의 용골대는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에게
속환에 대한 청 측의 방침을 통보했다.
그들은 속환과 관련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즉 중간에서의 속환은 불가능하고,
속환을 원하는 포로의 보호자가 직접 심양으로 올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이 내용을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고, 조선 조정은 비로소 속환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속환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전란 시기 행방불명된 혈육을 갖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그 단적인 사례로 대사간 전식(全湜 · 1563~1642)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속환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전식은 1637년 4월, 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을 비롯하여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
그들을 속환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비원(悲願)이었다.
하지만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높은 관직에 있거나, 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
바로 거기에 ‘포로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2-0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