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101)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②

Gijuzzang Dream 2009. 4. 17. 00:22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②

 

 

 

 

병자호란 직후 청으로 끌려간 수많은 포로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을까?

한마디로 그들 피로인(被擄人)들은 시종일관 끔찍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심양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심양에 도착한 이후에도,

도망이나 속환(贖還)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또 조선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요컨대 청군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한,

온갖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 심양 백탑거리에 있는

라마교사원의 모습.

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된 여인 가운데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청군은 이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은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고 저항하는 여인은 살해되었다.

●사로잡혀 끌려갈 때의 고통

 

포로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붙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도성이나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의 체포를 피해 달아나거나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죽은 사람들은 그나마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637년 9월,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속환에 몰두하라고 촉구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포로가 되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고, 그것이 화기(和氣)를 해치는 것 또한 죽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은 심양으로 연행될 때까지 청군 진영을 비롯한 주둔지 이곳저곳에 수용되었다. 포로들이 사로잡혔던 시기는 한겨울이었다.

당시 남한산성을 지키던 병사들 가운데서도 혹심한 추위 때문에 얼어죽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에게 적절한 식사와 잠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

결국 수많은 포로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수용되어 있거나 심양으로 연행되고 있었던 시기에 포로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1637년 2월8일,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출발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전송하던 자리에서

청의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신신당부했다.

심양으로 가는 도중 소현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1월30일부터 시작된 열흘 남짓의 노숙 때문에 아들에게 이미 병이 생겼다고 호소했다.

장차 조선의 지존(至尊)이 될 신분이라 상대적으로 우대 받고 있었던 소현세자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나머지 일반 포로들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있는 홍학사 비각.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분인 홍익한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자 선생의 무덤 앞에 세웠다. 문화재청 제공

포로들은 수백명 단위로 열을 지은 채, 엄중한 감시 속에 심양을 향해 행군했다. 청군 지휘부는 탈출을 우려해 포로들이 행군하는 연로에서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행여 접촉이나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들에게는 곧바로 철퇴가 날아들고 처참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대오(隊伍)를 유지하면서 걷는 과정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당시 홍익한, 윤집과 함께 척화(斥和)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던 오달제(吳達濟)는 ‘심양에 오기까지 60일 동안 옷을 벗지 못한 채 자야 했기에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성 포로들의 슬픔

 

포로들 가운데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특히 더 처참했다.

그들은 우선 사로잡힌 뒤 능욕을 당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다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또 많은 여성들이 청군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히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이 대거 피란해 있던 강화도의 비극이 처절했다. 강화도 함락 직후, 청군의 체포와 능욕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워낙 많은 여인들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청군은 아이가 있는 여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젊고 예쁜 여자는 가리지 않고 끌고 갔다.

당시 포로가 된 여인들 가운데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청군은 이들 여인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저항하는 여인들은 살해되었다. ‘강도록(江都錄)’을 비롯한 실기류(實記類)에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는 처참한 표현이 나오는 것은

그 같은 상황을 방증한다. 

심양으로 연행되는 과정에서도 여성 포로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당시 청군 장수들은 사로잡은 조선 여인들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예쁜 여인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강제로 빼앗는 사례가 있었다.

또 만주족 출신 장수가 한족 출신 장수가 데리고 있는 여인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여인을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던 셈인데,

이렇게 자신을 최초로 사로잡았던 장수로부터 또 다른 장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 포로들이 어떤 수난을 겪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으로 전락하여 심양에 도착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뜻밖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군 장수의 본처들이 자행하는 투기(妬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본처들 가운데 질투심에 눈이 멀어 조선에서 온 여성 포로들을 참혹하게 학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 여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이 같은 사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1637년 4월,홍타이지는 도르곤 등 신료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조선에서 데려온 여성들에게 계속 그런 짓을 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

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殉死)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홍타이지까지 직접 나서서 본처들의 악행(惡行)을 근절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성 포로들에게 닥쳤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환(贖還)의 난맥상

 

청이 조선인 포로들의 속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1637년 4월 이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군이 철수 길에 올랐던 2월 초부터

이미 속환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군이 철수에 앞서 자신들의 주둔지 부근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매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로들을 직접 끌고 가는 것이 귀찮거나 돈이 필요했던 자들이 매매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항복했던 직후부터 청군이 철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포로들의 몸값(贖還價)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청은 병자호란 이후 속환가를 은(銀)으로 계산했는데,

당시 남자는 한 사람 당 은 5냥, 여자는 3냥 정도였다. 또 아무리 높이 잡아도 10냥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종전 직후 조선은 이성구(李聖求)를 사은사(謝恩使),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심양에 파견했다. 사실상 최초의 속환사(贖還使)였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5월15일 이후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願贖人)들이 심양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말았다. 속환가가 최소 수백냥에서 천냥 단위로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신매매로 한밑천 잡으려는 청인(淸人) 소유주들의 탐욕과 그에 놀아난

일부 조선 고관들의 조바심과 무책임 때문이었다.

 

한 예로 이성구는 자신의 아들을 1500냥에 속환했다.

헤어진 혈육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지만 그들의 조바심은 몸값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뛰어버린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속환의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

 

최명길은 한 사람의 몸값으로 100냥을 넘기지 말 것과 청인들이 100냥 이상을 부를 경우,

속환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값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고관들은 사적 통로 등을 이용하여 여전히 높은 몸값을 치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은을 마련하기 위해 집과 땅을 팔고, 빚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환가를 마련한 사람들이 심양으로 달려가게 되면서

다시 값이 오르는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2-10  26면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