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으로 연행되는 과정에서도 여성 포로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당시 청군 장수들은 사로잡은 조선 여인들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예쁜 여인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강제로 빼앗는 사례가 있었다.
또 만주족 출신 장수가 한족 출신 장수가 데리고 있는 여인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여인을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던 셈인데,
이렇게 자신을 최초로 사로잡았던 장수로부터 또 다른 장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 포로들이 어떤 수난을 겪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으로 전락하여 심양에 도착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뜻밖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군 장수의 본처들이 자행하는 투기(妬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본처들 가운데 질투심에 눈이 멀어 조선에서 온 여성 포로들을 참혹하게 학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 여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이 같은 사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1637년 4월,홍타이지는 도르곤 등 신료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조선에서 데려온 여성들에게 계속 그런 짓을 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
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殉死)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홍타이지까지 직접 나서서 본처들의 악행(惡行)을 근절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성 포로들에게 닥쳤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환(贖還)의 난맥상
청이 조선인 포로들의 속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1637년 4월 이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군이 철수 길에 올랐던 2월 초부터
이미 속환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군이 철수에 앞서 자신들의 주둔지 부근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매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로들을 직접 끌고 가는 것이 귀찮거나 돈이 필요했던 자들이 매매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항복했던 직후부터 청군이 철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포로들의 몸값(贖還價)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청은 병자호란 이후 속환가를 은(銀)으로 계산했는데,
당시 남자는 한 사람 당 은 5냥, 여자는 3냥 정도였다. 또 아무리 높이 잡아도 10냥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종전 직후 조선은 이성구(李聖求)를 사은사(謝恩使),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심양에 파견했다. 사실상 최초의 속환사(贖還使)였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5월15일 이후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願贖人)들이 심양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말았다. 속환가가 최소 수백냥에서 천냥 단위로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신매매로 한밑천 잡으려는 청인(淸人) 소유주들의 탐욕과 그에 놀아난
일부 조선 고관들의 조바심과 무책임 때문이었다.
한 예로 이성구는 자신의 아들을 1500냥에 속환했다.
헤어진 혈육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지만 그들의 조바심은 몸값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뛰어버린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속환의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
최명길은 한 사람의 몸값으로 100냥을 넘기지 말 것과 청인들이 100냥 이상을 부를 경우,
속환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값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고관들은 사적 통로 등을 이용하여 여전히 높은 몸값을 치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은을 마련하기 위해 집과 땅을 팔고, 빚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환가를 마련한 사람들이 심양으로 달려가게 되면서
다시 값이 오르는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2-10 26면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