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9) 조선, 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6

 

 

 

 

 

 (99) 조선, 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청나라 “인조를 국왕에 봉하니 충성하라” 칙서

 

 

청군의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조정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전란을 불러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놓고 불거졌다.

인조는 그 책임을 온전히 척화파들에게 돌렸다.

‘그들이 명분만 앞세워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임금과 종사(宗社)를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인조는 척화파들을 조정에서 내쫓고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 대신들을 중용했다.

척화신들을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주화파 대신들 가운데도 척화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척화신들만 희생양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책임 공방’에만 몰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혹했다.

청측의 서슬은 여전히 시퍼랬고, 감시의 눈길은 여기저기서 번뜩이고 있었다.

조정은 결국 혼돈 속에서 점차 청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종친부(宗親府).

왕실과 종친의 일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인조 4년(1626) 여름 다시 세웠다.

원래는 경복궁 동쪽의 서울 소격동 기무사 터에 있었으나

1981년 화동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문화재청 사진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

 

1637년 3월21일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나섰다.

그는 조정에서 쫓겨난 윤황(尹煌)이나 조경(趙絅) 등의 이야기가 부당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대의(大義)를 지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선처하라고 촉구했다.

사간 김세렴(世濂)은 ‘윤황 등이 죄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며 그들을 복직시키라고 촉구했다.

 

인조도 물러서지 않았다.

‘작년에 윤황 등이 헛된 명분에 매몰되어 실사(實事)를 도외시하는 부박(浮薄)한 행동을

저질렀다.’며 사면 요청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3월26일 부제학 윤지(尹?),교리 정치화(鄭致和), 윤강(尹絳) 등이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윤황 등이 망령된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어찌 유독 윤황 등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묘당(廟堂)의 책임입니다.’라고

비변사와 대신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인조는 다시 격앙되었다.

‘작년 용골대 등이 왔을 때,그들이 우리에게 바로 표(表)를 받들고 칭신(稱臣)하라고 강요했다면

척화신들의 언동이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척화신들이 망령되이 들고일어나

용골대의 목을 치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 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국가를 도모하기 위한

권도(權道 · 임시 방편)였는데 이들이 한갓 큰소리로 저지하여 나랏일을 혼미하게 만들었다.’고

일갈했다. 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져 보지도 않고 ‘참수(斬首)’ 운운하면서 ‘오버’했던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신료들도 다시 반격에 나섰다.

6월21일 유백증(兪伯曾)은 영의정 김류(?) 등 주화파 대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작년 가을 이전에는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하여 ‘청국(淸國)’이란 말을 쓰지 말고

사신을 보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다.’고 하자마자

주화(主和)로 돌아서 윤집(尹集)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 등의 죄를 다스리자고 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책임을 맡아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유백증의 반박에 인조는 입을 다물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있는 이경석 묘소.

주화파 최명길, 인조를 위로하다

 

병자호란 직후 김류는 분명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였다.

전쟁 수행의 총책임자인 영의정이자 체찰사로서 김류가 보여준 난맥상이나 그의 아들 김경징의 과오를 생각하면 김류를 당장 내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실제 삼사 신료들은 ‘종사를 망친 죄’를 들어 김류의 관작을 삭탈하고 조정에서 쫓아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에게 김류는 분명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일개 왕손에 지나지 않았던 인조를 보위(寶位)에 추대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원훈(元勳)이었다.

김류가 없었다면 ‘국왕’ 인조도 있을 수 없었다. 인조는 끝내 그를 버릴 수 없었다.

더욱이 당시 인조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원죄 때문에 권위가 말이 아닌 상태였다.

위기 상황이었다. 위기 상황일수록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측근이 필요했다.

인조는 결국 유백증 등의 탄핵을 무시하고 김류를 감싸주었다.

 

호란 직후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에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한 사람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관 주화론을 견지한 데다,

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 자연히 인조는 그를 신임했고, 최명길은 전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5월15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인조를 다독이려고 시도했다.

그는 상소에서 ‘지난번의 호란은 천지 개벽 이래 일찍이 없던 병란(兵亂)입니다.

전하께서 융통성 없이 필부(匹夫)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셨다면

종묘사직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전하께서 묘당의 의견을 받아들이시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종묘사직의 혈식(血食)을 연장하게 되고 생령이 어육(魚肉)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지극한 어짐과 큰 용맹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최명길은 인조가 순간의 굴욕을 참음으로써 종사가 유지되었으니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찬양했다.

 

최명길은 이어 ‘전하께서는 이 일로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운세는 돌고 돌아, 흘러가면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否)가 극에 달하면 태(泰)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울해져 있는 인조를 격려하고,

그를 움직여 전란 후의 난제들을 풀어가 보려는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인조, 홍타이지에게 다시 책봉 받아

 

사실 당시 조선의 처지는 ‘책임 공방’에 몰두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폭주하는 청의 압박과 이런 저런 요구 사항을 처리하는 데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병력을 뽑아 보내라.’  ‘대신들의 자제를 빨리 들여보내라.’  ‘도망친 포로들을 잡아 보내라.’

‘처녀를 뽑아 바쳐라.’ 등등 요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 1637년 3월21일 의주부윤 임경업이 장계를 올렸다.

내용은 청이 곧 용골대에게 어보(御寶)를 들려 조선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조를 다시 책봉한다는 소식이었다.

 

용골대는 이제 ‘상국(上國)’의 책봉사(冊封使)로서 조선에 오는 것이었다. 조정은 비상이 걸렸다.

원접사(遠接使)와 관반(館伴)을 선발하고 각 지점에서 그를 접대하는 문제를 놓고 법석을 떨었다.

바로 과거 명사(明使)들이 왔을 때 접대를 준비하던 방식이었다.

 

이윽고 11월20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칙서를 갖고 서울로 들어왔다.

인조는 서쪽 교외까지 거둥하여 용골대 일행을 맞았다. 칙서의 핵심은 간단했다.

‘왕이 전의 잘못을 뉘우쳤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새로워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것이다.

이미 번봉(藩封)을 정하였으므로 전국(傳國)의 인(印)을 만들어 너를 조선 국왕으로 봉한다.

이제 우리의 번병(藩屛)이 되었으니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닳도록 변하지 말라.’

 

‘옥새를 내리나니 황하가 띠가 되고 태산이 숫돌이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명으로부터 받은 옥새를 청측에 넘겨 주었었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난 지금,청은 조선 국왕의 옥새를 새로 만들어 가져온 것이다.

 

인조는 ‘칙사’ 용골대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뒤 홍타이지의 칙서를 받았다.

홍타이지는 인조를 다시 조선 국왕으로 책봉한 것이고,

조선은 청의 번국(藩國)이 되기로 다시 맹세하는 순간이었다.

청은 철저히 과거 명의 행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이튿날 신료들은 인조에게 하례를 올리고,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황제의 칙서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조처였다.

 

하지만 조정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침울했다.

책봉’을 마친 용골대 일행은 다시 요구 조건들을 쏟아냈고,

자괴감과 부담감 때문에 조선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11-26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