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2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항복형식 왈가왈부 하는 동안 포탄은 성안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강(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지역을 그린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중앙에 경성(京城)과 북한산성,

오른편에 남한산성, 왼편에는 강화도가 그려져 있다.

서울 주변의 군사 · 방어시설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한산성 부근을 간략하게 묘사한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

산성의 4대문과 옹성, 서장대(西將臺)가 표시돼 있다.

남문에서 삼전야(三田野)를 거쳐 송파진(松波津)에 이르는 길

중간에 있는 비석은 청태종 송덕비다.
출처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남한산성 남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은 이 남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

‘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

‘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8-09-0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