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 Ⅰ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3

 

 

 

 

 

 (89) 강화도가 함락되다, Ⅰ

 

 

海戰 경험 적은 淸軍 얕보다 허찔려 ‘철옹성 와르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강화부도(江華府圖).

강화도와 김포 통진 교동 일대와 한강과 임진강 하구를 그린 지도.

갑곶, 광성진, 월곶 등이 표시되어 있다.

출전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갑곶 돈대의 모습.

 

 

 

갑곶나루의 모습.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는 지시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의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

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

‘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

‘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 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9-17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