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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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조선 사신들 처음으로

홍타이지 ‘詔諭(조유 : 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에 네 번 절해

 

 

 

남한산성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낸 것이 어느덧 17일,

병자년(丙子年)이 저물고 정축년(丁丑年)이 밝아 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탄천(炭川)에 진을 쳤다.

청군 병력이 30만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성에 대한 청군의 정찰은 훨씬 강화되었다.

홍타이지까지 산성 근처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으니

청군은 이제 모든 역량을 다해 조선 조정을 압박할 요량이었다.

조선군 근왕병들이 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시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명길 · 김상헌 사신 파견 싸고 대립

 

1월1일 원단. 인조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마쳤다.

이어 2품 이상의 신료들이 인조에게 새해 인사를 올렸다.

새해를 맞아 광주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가 쌀로 떡을 빚어 인조께 진상했다.

신하들에게도 얼마간씩 떡이 돌려졌다.

성첩을 지키는 장졸들에게도 ‘새해 선물’로 특식이 주어졌다. 삶은 콩과 말고기였다.

나만갑(羅萬甲)은 떡을 대하니 아침부터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조정은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 위산보(魏山寶)를 청군 진영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술과 고기를 들려 보냈다. 신년 인사를 겸하여 적정을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군 장수들이 조선 사신 일행을 대하는 태도가 영 달랐다.

사신 일행이 도착했을 때, 어떤 자가 위산보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들어가려 했다.

다른 자가 만류하여 겨우 멈췄지만, 태도는 여전히 뻣뻣했다.

“황제께서 산성을 순찰 중이시니 우리가 함부로 받을 수 없다.”며 위산보 일행을 퇴짜놓았다.

이제 조선이 사신을 보내는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위산보가 돌아온 직후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먼저 청군의 군세(軍勢)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김류, 이홍주(李弘胄), 홍서봉(洪瑞鳳) 등

상당수 신료들은 청군이 군세를 과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청군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조선을 기만하기 위해 세력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료들은 홍타이지가 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 인식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청군이 이전부터 누차 ‘황제가 올 것’이라고 말해 왔던 것에 주목했다.

최명길은 ‘황제가 왔으니 조선 실정을 알리려 한다.’는 명목으로 청군 진영에 사신을 다시 보내

적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헌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김신국은, 근왕병들이 사신이 적진을 왕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역시 반대했다.

하지만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동조했다.

 

 

‘최악의 상황´ 예상 못한 화친론

 

김신국(金藎國)과 이경직(李景稷)이 다시 청군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했다.

청장 마부대(馬夫大)는 역시 황제가 순찰 중이라는 핑계로 즉답을 피했다.

이튿날에도 조선 조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지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황제가 진짜 왔는지, 황제가 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황제가 왔다는 것을 이유로 인조에게 출성(出城)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논의가 분분했다.

 

김신국, 이경직, 홍서봉 세 사람이 청군 진영으로 다시 가기로 결정되었다.

인조는 그들에게 실언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다며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김상헌은 적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 ‘와신상담’ 운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인조 또한 “강국도 약국에 거만하게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약국이 강국에 뻣뻣하게

굴 수 있냐.”며 최명길을 두둔했다.

 

논란 끝에 예상되는 청의 요구 가운데 두 가지만은 따를 수 없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하나는 인조에게 성에서 나오라는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왕세자를 입송(入送)시키라는 요구였다.

이식(李植)은 화친을 추구하되,

그 내용은 철저하게 기존의 형제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이제 청과 화친하겠다는 방침은 다시 확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청이 과연 조선의 바람대로 따라줄 것인가.

 

결과적으로 보면, 인조와 왕세자의 출성 거부를 ‘마지노선’으로 삼은 것은

그저 조선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홍타이지가 몸소 탄천까지 내려와 산성에 대한 압박을 독려하는 상황에서

청이 ‘인조의 출성 불가’를 용인할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비변사 신료들은 ‘최악의 상황’이 닥쳐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신료들은 여전히 근왕병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신국 등은 청군 진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마부대 등을 만나자 황제에게 전하는 문안 인사를 건넸다.

‘황제께서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먼길을 오셨으니 10년 형제의 의리상 염려가 되어

이렇게 찾아왔다.’며 분위기를 살폈다.

‘형제관계’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탐색하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용골대가 나와 누런 종이를 내밀며

황제의 조유(詔諭, 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라고 일컬었다.

그러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네 번 절한 뒤에 가져가라고 강요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김신국 등은 결국 네 번 절하고 그것을 갖고 돌아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의연히 그들을 ‘오랑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랑캐의 칸(汗)’이 황제가 되고,

그가 내민 쪽지가 ‘조유’가 되고 ‘칙서(勅書)’로 변한 기막힌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형제→신하관계로 바뀐 현실에 경악

 

김신국 등은 인조를 알현했을 때, 모두 죽지 못하고 돌아와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대청관온인성황제(大淸寬溫仁聖皇帝)가 조선 국왕에게 초유(招諭)한다.’는 문구로 시작했다.

 

내용은 과거의 국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은 조선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조선이 명에 붙어 자신들과 적대했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조선에 대한 섭섭함을 열거했다.

‘청은 강하다고 뻐긴 적이 없는데, 약소국인 조선이 왜 대드냐?’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러 왔던 몽골 버일러들을

만나주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과거 고려(高麗) 시절 요 · 금 · 원(遼金元) 세 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머리를 숙였던 조선이

지금은 왜 그리 뻣뻣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신을 보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홍타이지의 ‘조유’를 접했을 때 신료들은 경악했다.

답서를 보내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인조가 회의를 소집했을 때, 신료들은 머뭇거렸다.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상헌이 나섰다. 지금 사죄해 봤자 저들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군사들에게 적서(賊書)를 보여주어 적개심을 고취시키자고 촉구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막아섰다.

홍타이지가 온 이상 대적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뿐이라고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홍서봉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답서에서 홍타이지를 부르는 명칭을 ‘제형(帝兄)’이라고 쓰자고 했다.

일각에서는 최명길, 장유(張維), 이식 세 사람에게 답서를 쓰게 하되,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보내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엄혹한 현실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오랑캐가 ‘황제’와 ‘조유’를 운운하는 또 다른 ‘현실’을 직접 마주했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다시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은 조선 조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8-06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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