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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중국서안비림 명비 특별전] 서안 비림(碑林)박물관

Gijuzzang Dream 2008. 7. 19. 16:28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

 

 

연혁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서안(西安)은 중국문화의 발상지이자

일찍이 주(周)ㆍ진(秦)ㆍ한(漢)ㆍ당(唐) 등 13개 왕조가 도읍을 정한 중국의 옛 수도(首都)로,

유서 깊고 풍부한 역사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북송(北宋) 원우(元祐) 2년(1087)에 최초로 건립되어 92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국보급 134점을 소장하고 있다.

당시 여대충(呂大忠) 등이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전란으로 교외에 방치되었던

당나라의 《개성석경(開成石經)》이 황폐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문묘의 뒤에 옮기고

현종(玄宗) 황제의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및 안진경(顏真卿). 유공권(柳公權), 구양수(歐陽修), 저수량(褚遂良),서호(徐浩), 몽영(夢瑛) 등이 쓴 저명한 석비를 보호하고자 창건한 것으로, 당 상서성(尚書省) 부근의 문선왕묘에 모여 있던 비석들을 옮겨 보관하였다.

 

明나라의 성화(成化), 淸의 강희(康熙) · 건륭(乾隆) · 가경(嘉慶) 연간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당송 이후 근대에 이르는 비석을 증치하였고, 또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을 비롯한

유명한 서가(書家) 법첩의 석각(石刻)을 많이 수집하여 지금은 500여에 이르는데

보관 건물이 여섯 채나 된다.

 

서법석각이 계속 수집되면서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비석들이 우뚝 솟아 숲을 이룰 정도가 되자, 명대(明代)에 ‘비림(碑林)’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1992년에는 정식으로 ‘서안비림박물관’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시안 부근은 예로부터 비석이 많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파괴, 소실되었다.

다행히 비림만은 보존되어 당 이후의 서법 변천과 석비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 개요

 

서안비림박물관은 역대 비석과 석각예술품을 소장․전시하고 연구하는 전문 예술박물관으로,

1961년 국무원(國務院)의 허가를 받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으며

UN의 세계 50대 중점박물관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박물관은 크게 공자사당(孔廟)ㆍ비림(碑林)ㆍ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면적은 319,000㎡에 달한다.

현재 소장 유물이 11,000여 건에 이르며

전시면적 4,900㎡에 8개의 비정(碑亭)과 9개의 비석전시실, 1개의 대형 석각예술전시실이 있다.

특히 광장에 위치한 대형 비정(碑亭)은 서안비림박물관의 상징으로

정액(亭額)에는 ‘비림(碑林)’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으며,

정(亭) 내부에는 6m가 넘는 대형 비석인《석대효경비》가 마치 하늘을 받치듯 우뚝 솟아있다.

 

서안비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비석과 묘지의 수량은 중국에서도 최고(最高)를 자랑하며,

시대별, 계열별, 서체별로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뛰어난 작품이 한 곳에 모여 있어서

‘중국 고대서법예술의 보고’ㆍ‘역사문화의 보고’ㆍ‘서법예술의 전당’이라 칭송받고 있다.

 

 

비석의 숲, 중국서안비림박물관 명비탁본전 / <중국서안비림명비전(中國西安碑林名碑展)>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안비림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중국서안비림명비전>은

서안비림박물관이 920여 년 동안 수집한 명비(名碑) 3,500여 점 중에 125점의 탁본을 엄선하여,

전시물은 진(秦)나라부터 청대(淸代) 이후까지의 비석과 묘지(墓誌), 조상기(造像記) 등의 다양한 석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서예의 흐름을 알기 쉽도록 시대별로 구성하였다.

 

서체별로는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우아한 행서,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褚遂良)ㆍ우세남(虞世南)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 등

일가(一家)를 이룬 당(唐) 대가들의 해서,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거침없고 자유로운 초서,

송 휘종(徽宗)의 수금체(瘦金體), 황정견(黃庭堅)ㆍ미불(米芾)ㆍ소식(蘇軾)의 행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 등

오랫동안 우리나라 및 동양서예의 전범으로 숭상되고 있는 명필을 보실 수 있다.

또한 청대에는 한자의 뜻과 모양에 의미를 부여한 문자유희(文字遊戱),

시와 그림을 결합한 다양한 형태의 석각자료,

비석의 숲에서 묵향을 느끼며 중국문화의 정수(精髓)를 음미하며  감상할 수 있다.

 

 

 

 

 서안비림(碑林)

 

북송 원우(元佑) 2년(1087) 처음 건립되어 92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수많은 비석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서안비림의 건립은 唐대에 새긴 <개성석경(開成石經)>과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의 이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唐 천보(天寶) 4년(745)에 당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가 효도를 제창하여 일찍이

“민간에서 소장된 것 중에 <효경(孝經)>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조령(詔令)하고

친히 서문과 주해(注解)를 짓고 예서로 <효경>비를 썼다.

비의 4면에 글씨를 새겼으며 그 아들 숙종(肅宗) 이형(李亨)이 비액의 글씨를 썼다.

비액 위에는 구름문양을 새긴 덮개를 더하였고,

비 아래에는 장대하고 웅장한 3층의 계단식 받침으로 받쳤다.

이 때문에 이 비는 <석대효경비>라고 일컬어지며,

완성된 후 唐 장안성 무본방(務本坊)의 태학(太學) 안에 세워졌다.

 

태화(太和) 4년(830) 唐 문종(文宗)은 어명으로 비석에 유교 경전을 새기게 하였는데

개성(開成) 2년(837)에 이르러 석경(石經)이 완성되었다.

모두 12종의 유교 경전을 새겼으며, 114개의 비석에 228면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들을 <개성석경>이라 일컬으며 또한 장안성 무본방의 태학 안에 세웠다.

이 2종의 석경은 비림의 건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唐말 천우(天佑) 원년(904) 주온(朱溫)이 반란을 일으켜

唐 소종(昭宗)을 협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하게 하고 장안성을 대규모로 파괴하였다.

당시 장안성을 주관하던 우국군절도사(佑國軍節度使)인 한건(韓建)은

방위의 관리를 위하여 장안성의 규모를 축소하여 건립하고

원래의 황성(皇城)을 신성(新城)이라 고쳤다.

이에 따라 원래 장안성 무본방에 있던 <개성석경>과 <석대효경비>가 교외에 방치되자

같은 해 한건이 <석대효경비>를 唐 상서성(尙書省) 부근의

문선왕묘(文宣王廟, 지금의 서안 鐘樓 서쪽)로 옮겼다.

 

후량(後梁) 개평(開平) 3년(909)에 장안 영평군절도사(永平軍節度使)로 있던 유심(劉鄩)은

<개성석경>을 성내에 있던 당 상서성의 서쪽으로 옮겼다.

 

즉 한건과 유심에 의하여

두 석경은 연이어 당 상서성 서쪽 부근의 한 곳으로 옮겨 보관되어진 것이다.

이후 여러 유명한 비석들이 계속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해방 후에 <안근례비(顔勤禮碑)><마린묘잔비(馬璘廟殘碑)><흥경궁잔도(興慶宮殘圖)>

등의 비석들이 이곳에서 모두 출토되었으니

이는 당 상서성 서쪽의 문선왕묘가 당시 석경 및 기타 비석들의 집산지가 되었음을

설명하여 준다.

이러한 석경과 비석이 이곳으로 옮겨져 어느 정도 규모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비림(碑林)은 원래 당 상서성 문선왕묘에 있던 당 석경 및 기타 비석들을

부학(府學)의 북용(北墉)으로 옮겨 보관하면서 형성되었다.

옮긴 목적, 시간 및 과정 등은 송 원우(元佑) 5년(1090)에 여지(黎持)가 지은

<신이석경기비(新以石經記碑)>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송 조운(漕運)이 여대충(呂大忠)에게 조섬우(漕陝右)를 다스리게 하면서

석경이 보관되어 있던 이곳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는 “이곳을 백성들이 사는 곳이고 지대가 낮아서 장마가 지면 흙탕물이 가득하게 된다.

(비석이)서 있는 것 같으나 문득 넘어져 있고 썩은 흙에 파묻혀 세월에 깎이고 이지러졌으니,

아마도 경(經)을 높여 도(道)를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고

경조(京兆=서울, 수도)의 관리인 여지(黎持)와 상의하면서

“내가 부학의 북용으로 옮겨 보관하고자 한다.

무릇 비석으로 눕고 기울어진 것들을 모두 그곳으로 옮겨 보관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전 공사는 원우(元佑) 2년(1087) 초가을에 시작하여 초겨울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이를 통하여 석경 및 기타 비석들은 원래 문선왕묘 부근에 있었는데 환경이 좋지 못하여

‘부학의 북용’으로 옮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현재 위치에서의 비림의 서막이다.

 

현재 서안 문묘 고건축들로 구성된 서안비림박물관은 전체 면적이 35,000㎡에 달한다.

고건축들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그 기세가 웅장하며 좋은 주위환경을 지니고 있어

일급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중국 일급박물관에 속한다.

 

서안비림은 건립 이후, 宋, 元, 明, 淸을 거쳐 세상의 무수한 변화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인한 재해도 있었으나

매 왕조마다 국가를 비롯하여 민간에 이르기까지

일부 숭고한 뜻을 가진 사람과 덕망 있는 사람들이 비림을 보수하고 확충하였다.

그리하여 明대에는 비석이 숲과 같은 규모로 형성되어 ‘비림(碑林)’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비림(碑林)은 중화 전통문화의 강대한 응집력을 반영하고 있다.

 

서안비림박물관은 현재 9개의 비석전시실과 8개의 비정(碑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3,500여 점에 달하는 비석을 시대별로 완전하게 소장하고 있어

역사문화의 보고, 서법예술의 전당이라 칭송되어진다.

비석의 각 종류가 완비되고

서예 또한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가 골고루 완전하게 갖추어져

중국 고대 석각이 소장된 곳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 2008년 7월28일 특강자료<서안 비림과 서법예술>중에서

- 서안비림박물관장 趙力光

 

 

 

 

 

 

 

  안의 비림박물관(베이린보우관)    

 3천개의 비석들이 숲을 이루다      

 

 

 

▲ 비림 전경(조수영 그림)

비석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나라 이후 비석 3천여 개를 문묘 뒤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비림(碑林)에 도착했다.

원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었는데 비석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나라 시대 이후의 비석 3천여 개를 문묘 뒤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현종의 효경비를 비롯하여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과 같은 역대의 저명한 서예가들이 쓴 석비를

모아 비의 숲을 이루게 했다. 그 이름도 '비석들이 수풀을 이루는 것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다.

▲ 비림 입구, 공자의 뜻에 따라 반원으로 만든 연못

입구 앞에는 반원 모양의 연못 분수가 있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을 걸쳐 얻는 지식은 완전한 원형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의미를 담아 반원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석의 글씨체를 탐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여러 유생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작은 다리에서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항상 겸손함을 가지고 향학에 임했을 것이다.

비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과거 급제자만 출입할 수 있었고, 양쪽의 두 문으로 유생들이 출입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당당히 가운데 문을 통해 비림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시커먼 비석이 있을 것이란 상상과 달리

문묘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정원과 6개의 정자가 양쪽에 3개씩 있었는데,

한군데만 제외하곤 굳게 닫혀있었다. 이유인즉 이곳의 비석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의 것인데

내용이 대부분 한족을 비방하는 것이라 현대의 중국인들이 공개를 꺼리는 것이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비석의 한쪽은 한자로 다른 한쪽은 만주족의 말로 씌어 있었다.

오늘은 운 좋게 정자 하나가 열려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당 경운종'이라는 커다란 종이 있는데,

서안성 한가운데 있는 종루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중국에서도 매년 정초에 우리의 보신각종처럼 이 종을 울리는데

실제로는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이 종이 유명한 이유는 당나라 13대 예종이 남긴 유일한 친필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공적을 쓴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림'의 편액에 획이 하나 부족한 사연은?

▲ 임측서가 썼다는 현판과 비림 전경

멀리서 모이는 '碑林(비림)'의 편액이 뭔가 이상하다. '비(碑)' 자의 획이 하나 부족하다.

이는 청나라 장군 임칙서가 쓴 것인데, 그는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당시 서안에 왔다가

광동성으로 가는 중에 비림의 현판을 남기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서안에 돌아와 점을 찍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패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신강에 가서 죽고 말았다.


 

▲ 당 현종의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

현판을 지나면 제1실 앞에 거대한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가 있다.

<효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효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이다. 큰 글자는 당 현종 때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이고, 작은 글씨는 현종이 해서체로 쓴 주석이다.

양귀비와의 열애로 역사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현종이지만 시와 서예, 음악에 능하고 미술애호가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비림 제1실에는

총 12부의 경서, 65만자를 114개의 비석에 새긴 비석들이 있다. 114개 비석에는 각각 앞면과 뒷면이 있으니 모두 228개의 면이다.

당나라 문종이 당현탁등에게 경서를 베껴 쓰게 하여

837년에 이 석각이 완성되었다. 이후 여러 곳으로 흩어진 것을 북송 때에 다시 수집한 것이다. 이는 돌에 새겨진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개성석경(開城石經)'이라 불린다.

개성은 당 문종의 연호이다.

개성석경은 당나라 개성년간 만들어져서 이와 같이 불린다.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어서 책의 내용을 보고 베껴서 공부했는데

도중에 잘못 쓸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의 비석들을 보며 확인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교과서의 원본,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돌 교과서'라 하면 되겠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여러 명이 쓴 관계로 글씨가 조금씩 달랐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탁본을 하면서 비석이 심하게 마모되어 지금은 유리로 싸서 보관하고 있다.

비석의 색도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비석들이 1555년 서안에 일어난 4도 지진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 비림 1실. 빼곡하게 서있는 개성석경(開城石經)

제2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781년 세워진 이 비는 로마를 '대진', 기독교를 '경교'라고 표기한 것으로

머리부분에는 '大秦景敎流行中國碑(대진경교류행중국비)'라는 9자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본체에는 한자와 고대 로마어로 당나라 시대에 페르시아의 알루뱅에 의해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또 교회가 생기게 된 과정, 교리 등이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일은 땅속에 묻혀있던 이것을 발견할 당시

영국의 윌슨이라는 사람이 이 비석을 사고자 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자

탁본을 해가서 이를 보고 다시 비석으로 새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조품이 전 세계에 4개나 된다고 한다.

또 2실에는

당나라 안진경의 풍만한 필체와 유공권의 해서체, 왕희지체, 구양순체 등을 볼 수 있는

다양한 비석이 있다. 고대 서예 대가들의 각종 글씨체로 이루어진 비석들이 산재해 있어

이 비림이 서예연구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3실로 가니 구멍이 뻥 뚫린 비석이 있다.

모두 제주도의 대문처럼 나무를 끼웠을 것이란 추측을 했지만

사실 이것은 해시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란다.

비석의 초기 형태는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관 위에 덮는 형태였다.

午시가 되어 해가 그 구멍에 그림자 없이 비칠 때 비로소 나머지 흙을 덮었다고 한다.

 


조조를 단념시킨 관우가 유비에게 보낸 댓잎 편지 '관제시죽'

제4실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관우가 유비에게 보낸 '관제시죽(關帝詩竹)'과

달마에 관한 '달마동도도(達磨東渡圖)', '달마면벽도(達摩面壁圖)'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 관우가 유비에게 충성을 확인한 관제시죽

동군(조조)의 후의에 감사하고픈 마음은 없네
홀로 붉은 마음으로 청청한 이름을 세우려 하네
다른 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외로이 남은 나뭇잎을 싫다 하지 말게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니
不謝東君意 (불사동군의)
丹靑獨立名 (단청독립명)
莫嫌孤葉淡 (막혐고엽담)
終久不凋零 (종구불조령)

관우는 위, 촉, 오의 삼국이 각축을 벌일 때

금전과 명예를 초탈하여 존경받은 인물이다.

그의 덕과 용기를 기려 사람들은 그 호칭을

성인의 반열에까지 높여 '관제(關帝)'라고 부른다.

조조는 이런 관우를 휘하에 두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관우의 마음은 한결같이 도원결의의 주군인 유비에게 가 있었다.

얼핏 보면 대나무 그림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댓잎으로 교묘하게 쓴 편지인데, 그 뜻을 알아차린 조조는 자기의 노력이 헛수고임을 알고 그를 단념했다고 한다.

그림으로 편지를 쓰려고 한 발상도 기발하지만,

그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조조 또한 영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 달마동도도와 달마면벽도

달마의 비석은 유리에 싸여 '관제시죽' 앞쪽에 있다.

달마는 원래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였으나 출가하여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다.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해 당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달마동도도'는 달마가 양쯔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달마면벽도'는 9년 동안 소림사 달마굴에서 벽을 쳐다보고 수련중인 모습을 담은 것이다.

"달마 스님이 갈잎과 같이 작은 배를 타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작은 배를 아예 갈잎으로 그려버렸다.

각진 부분은 강하게 새기는 각법으로 제작하여 더욱 그림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탁본을 떠서 판매하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12부의 경서

- 역(易), 서(書), 시(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효경(孝經), 논어(論語), 이아(爾雅)

* 연호

-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부르는 것.

   예를 들어 문종의 재위기간은 '개성', 현종의 재위기간은 '개원'으로 부른다.

- 2007-01-27

- 조수영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 2007 OhmyNews

 

 

http://blog.naver.com/anwjdrkdgh/110015041556 

 - <위의 기사내용> 中 다른 의견 제시

 

(1) 연못 앞 반원

제후의 태학인 반궁(伴宮)을 형상화한 것이며 공자의 말에 따른 것이 아니다.

공자가 그런 말흘 한 사실도 없다.

(2) 비림의 편액에 획이 하나 부족한 사연은?

원래 한대 예서 등에서 '碑'자에 점이 없어 으레 점을 찍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비림(碑林)'의 글자균형상 애초 점을 찍지않았다는 경우가 가장 신빙성을 가진다.)

(3) 임칙서에 대하여

장군이 아니라 행정가, 사상가, 정치가였다.

아편전쟁 전에는 1935년 양강 총독(지금의 省長)으로, 1837년 호광 총독, 1938년 흠차대신이었다.

또 신강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광동성에서 죽었다.

1841년 패전으로 강등되어 1842년 신강성 이리로 갔지만, 1845년 섬감(섬서성 감숙성) 총독이 되었고,

1847년 운귀(운남성 귀주성) 총독, 1850년 흠차대신으로 광서성의 농민봉기를 진압하러 가는 도중에

지금의 광동성에서 죽었다.

(4) <효경>에 대하여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孝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송 이후 학자들은 후인들이 공자와 증자의 이름을 빌려 지었고,

책의 성립은 漢代로 보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정설로 되어 있다.

(5) 개성(開城) ==> 개성(開成)

(6) 구멍이 뻥 뚫린 비석

漢代에 많이 제작되었으며, 비석을 관 위로 내릴 때 이 구멍에 끈을 넣어 내렸다.

午時에 흙을 덮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7) 댓잎편지 '관제시죽'

이는 淸代 한재(韓宰)가 1716년 임모한 비석이다.

이는 전적으로 당시 문인들의 문자유희(언어의 장난)이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다시 말해 관우가 실제로 이런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보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에 지어낸 내용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Time To Say Goodbye

with Sarah Brightman / Andrea Boce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