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중국서안비림 명비 특별전] 서체의 흐름

Gijuzzang Dream 2008. 7. 15. 23:10

 

 

 

 

비에 새겨진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한자는 거북이 등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금을 내어 점을 치고 질문과 결과를 새겨놓은 갑골문에서

비롯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한자는 기록과 의사 전달이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차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로 발전하여 다섯 가지의 서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전서

 예서

 초서

 행서

 해서

 

서체

특징

대표적인 작품

전서

(篆書)

고대 한자에서 발전한 서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문자개혁 이전의 글씨는 ‘대전(大篆)’

문자개혁 이후의 글씨체는 ‘소전(小篆)’ 이다.

대전체는 모양이 다양하고 변화가 크며,

소전체는 네모반듯하고 고르며 글씨획도 단정하다.

여기에서 소(小)와 대(大)는 시대적인 앞뒤를 말한다.

 ▪대전 - 석고문

 ▪소전 - 태산각석

 ▪갑골문

 ▪종정문 모공정

 ▪이양빙 삼분기비

 ▪태종무열왕릉 비석 전액

예서

(隸書)

전서체에서 정리된 서체로 오늘날 한자 글씨 형태를 띤다.

글씨의 실용성이 중시되면서 보다 쉽고 빠르게 문자를 쓰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전한시대 예서체는 ‘고예(古隸)’

후한의 팔분예서체는 ‘팔분서(八分書)’

모양이 납작하고 물결모양의 가로획(파책)이 특징이다.

 ▪고예 - 내자후각석

 ▪팔분예서 - 예기비

 ▪점제현신사비

 ▪석문송

 ▪감곡한간

 ▪희평석경

해서

(楷書)

정자체인 해서는 예서를 정리한 것이다.

한자의 표준서체이기도 하다. 정서(正書) 또는 진서(眞書)라고도 불린다.

각 획이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읽고 쓰기에 좋다.

해서는 전서와 예서를 비롯한 각 서체의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서예를 배울 때 특히 공부가 많이 되는 서체이다.

전서와 예서가 각각 세로와 가로의 장방형 형태를 띤다면

해서의 글꼴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갈고리와 삐침 뿐 아니라 획마다 굵기와 기울기에 변화가 생긴다.

 ▪종요 선사표

 ▪손추생 조상기

 ▪구양순 구성궁예천명

 ▪저수량 안탑성교서

 ▪안진경 안근례비

 ▪조맹부 현묘관중수삼문기

행서

(行書)

해서의 획을 약간 줄여서 흘려쓴 서체이다.

흘려 쓰지만 읽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으며 초서와 같은 생동감이 있다.

규격체로 인하여 비능률적인 해서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이다.

해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로 초서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도 좋다.

 ▪왕희지 대당삼장교서

 ▪왕희지 쾌설시청첩

 ▪왕희지 난정서

 ▪미불 사보시첩

 ▪안진경 쟁좌위고

 ▪김정희 송별시

*** 안진경 - 쟁좌위고

독창적인 개성의 글씨를 이룬 그의 서풍은 웅건, 장중, 짜임새가 단정하면서도 순박하다는 평을 듣는다.

행초(行草) 작품으로 안진경이 곽영의에게 자신의 직위보다 높은 자리에 나아간 것에 대한 질책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이다. 심지어 “어찌 대낮에 돈을 챙기는 선비와 다르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많이 보급되었으며 석봉 한호, 김돈희 등이 특히 안진경체에 능하였다.

 

***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글씨풍 - 양송체

석봉체를 더욱 발전시켜 굳세고 강한 필체로 썼으며, 특히 송시열은 활달한 행서체를 잘 씀

초서

(草書)

획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흘림체.

기존 서체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이다.

속도감과 선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서체이다.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인 요소가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변화가 크고 주관적인 표현이 많아 읽고 쓰기는 매우 어렵다. 흥취와 예술성을 드러낸 초서작품이 많다.

 ▪왕희지 십칠첩

 ▪회소 자서첩

 ▪장욱 광초서

 ▪손과정 서보

 ▪황정견 이태백억구유시 권

 ▪축윤명 적벽부

*** 초결백운가(草訣百韻歌)

한문 서체 중 가장 익히기 어려운 초서를 익히기 위한 고민은 예로부터 계속되어 왔다.

이 ‘초결백운가’는 초서를 보다 효과적으로 익히기 위한 옛사람들의 초서학습서이다.

구별하기 어려운 글자들을 비교하고 글자 구성의 요령 등을 100개의 시운(詩韻)으로 풀어놓았으며, 전체 총 500자의 글자가 담겨 있으며, 왕희지가 지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다음에 보이는 비문의 글씨는 어떤 서체일까요?

  

 

 

- 전서천자문

 

이렇게 한자의 글씨체거 여러 가지로 이루어 진 것은 바로 으로 글씨를 쓰게 된 덕이랍니다.

종이에 주는 힘을 조금만 바꾸어도 선을 굵게 하거나 갸름하게 할 수 있죠.

 

 

비에는 어떤 내용들을 새겼을까요?

 

     

- 역산각석

<역산각석>에는 처음으로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이 새겨져 있어요.

 

2,20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랍니다.

비 중에는 앞면에는 불상을 만들고, 뒷면이나 옆면에 시주한 사람의 신분과 공덕을 비는 내용을

새겨 놓은 <조상(造像)>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황흥조상 앞면, 황흥조상 뒷면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묘비도 있어요.

<안씨가묘비>는 안진경이라는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묘비입니다.

  

 

- 안씨가묘비

 

한편,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글씨는

얼마나 훌륭했는지 사람들이 그가 쓴 글씨를 가지려고 서로 다투기도 했답니다.  

  

- 집왕성교서비(왕희지)

 

 

 

 

- 구성군예천명(구양순)

 

그럼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잘 쓴 분들은 누가 있을까요?

 

조선 선조 때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자신의 필법을 만들어 냈고,

국가의 주요 문서를 작성는 사자관(寫字官)이라는 관리가 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가 쓴 천자문은 많은 사람들이 글씨의 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석봉 한호)

 한석봉 천자문

 

왜 글씨를 잘 쓴 사람들을 우러러 보고, 글씨를 본받으려고 노력했을까요?

글씨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여겼기 때문이예요.

예쁘고 바른 글씨를 쓰는 사람은 곧 마음도 예쁘고 바른 사람인거죠.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대진은 옛날 중국이 서양의 로마제국을 부른 이름인데,

이 나라로부터 기독교의 한 지파가 중국에 전파된 이야기가 이 비에 새겨져 있답니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명필가의 글씨를 서로 비교해서 감상해 보세요.

  

공자묘당비(우세남)

 

 

안탑성교서(저수량)

 

 

석대효경비(당 현종)

 

 

다보탑비(안진경)

 

도인국사비(구양통)

 

  

삼분기(이양빙)

 

초서천자문(宋 휘종어필)

 

천자문(동기창)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의 일화를 알아보세요.

 

1. 서예대가 왕희지 : 중국 동진시대(317~420년)의 서예가

 

(1) 신선에게서 필법을 얻다.

 

(2) 노파의 부채에 글을 써주다.

 

 

(3) 거위와 도덕경을 바꾸다

 

 

2. 중국 당나라시대(618~907년)의 유명 서예가

 

(1) 구양순 - 3일 밤낮동안 비석의 서법을 연구하다

 

(2) 우세남 - 당 태종이 서법을 배우다

 

(3) 저수량 - 우세남에게서 서법의 가르침을 구하다

 

(4) 안진경 - 담장을 종이삼아 글씨연습을 하다

 

(5) 유공권 - 당 목종에게 필간(筆諫)을 하다

 

(6) 회소 - 파초잎에 글씨연습을 하다

 

(7) 장욱 - 머리카락으로 글씨를 쓰다

   

 

비석에는 유명한 인물의 초상화도 새겨 넣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 이 분은 시대가 어지러울 때 사람들에게 仁과 禮를 강조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주장하였어요.

(공자)  

 

  

 

 

 

   

- 이 분은 인도의 승려인데 중국에서 9년간 벽을 보며(달마면벽도, 達磨面壁圖) 수련하여

선종이라는 불교의 종파를 연 분이에요. (달마)

 

 

 

  

 

  

 

◆ 탁본(拓本)=탑본(榻本)

 

 

 

  

 

 

 

 

   

 

  

 1. 비석에 종이 붙이기

- 젖은 화선지를 펴서 비석 중앙에 바르게 놓는다.

- 솔을 사용하여 비석 중앙에서부터 골고루 종이를 펴서 비석에 붙인다.

- 고무망치와 받침조각으로 비석 가장자리를 두드려 종이와 비석을 더욱 단단하게 밀착시킨다.

 

2. 종이의 물기 말리기

- 종이의 물기가 빨리 마르도록 부채질을 한다.

 

3. 연하게 두드리기

- 붓으로 먹판에 먹물을 묻히고 다시 먹방망이로 먹판을 여러 번 두드려서

먹물이 먹망방이에 고르게 스며들게 한다.

- 종이가 적당히 마르면 이 먹방망이로 가볍게 종이를 골고루 두드려 연하게 한 번 탁본을 한다.

 

3. 먹물 말리기

- 부채로 잠시 먹물을 말린다.

 

4. 진하게 거듭 두드리기

- 먹물이 조금 마른 상태에서 먹방망이로 다시 진하고 고르게 두드려 탁본의 먹 농도를 조절한다.

 

5. 완성

- 약 15분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종이가 적당히 마르면 비석에서 종이를 떼어 낸다.

 

 

 

*** 연표 ***

 

B.C.1000   춘추전국시대(B.C. 770)

                  서주

                  동주

B.C.500    전국시대(B.C. 475)

                 통일진(B.C. 221)

                 전한

A.D.          후한(25)

                 삼국(220)

                 서진

                 동진(317)

                 남북조(420)

A.D.500    수(581)

                 당(618)

                 오대

                 북송(960)

                 요 

A,D.1000  

                 남송(1127)

              원(1206)

              명(1368)

                 청(1616) 

A.D.2000   중국(1912)

 

- 시대적 서체의 특징 -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우아한 행서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 우세남(虞世南),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 등 唐 대가들의 해서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거침없고 자유로운 초서

宋 휘종(徽宗)의 수금체(瘦金體)

황정견(黃庭堅), 미불(米芾), 소식(蘇軾)의 행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

청대에는 한자의 뜻과 모양에 의미를 부여한 문자유희(文字遊戱)

시와 그림을 결합한 다양한 형태의 석각.

 

 

진한대(秦漢代) - 문자의 통일과 예서의 발달

 ◆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전국시대는 나라 혹은 지역 간에 글자체가 서로 달라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진시황은 통일 후에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전(小篆)'으로 문자를 통일하였고,

진(秦)말기에 등장한 예서(隸書)는 한(漢)代에 주류를 이루었다.

동한 말기에는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출현하여 오체(五體)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동한 때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그 위에 쓰인 예서는 당시에 최고로 발달된 서체였다.

 

역산각석(山刻石)

  - 진(B.C. 221-206), 송 순화 4년(993) 중각, 서체 / 소전(小篆), 찬/서자 이사(李斯)

 

 

남북조시대(南北朝) - 묘지(墓誌)와 조상기(造像記)의 발달

 ◆ 남북조시대의 석각은 묘지와 조상기가 크게 성행하였다.

서체는 해, 행, 초서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크게 남조와 북조로 구분된다.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조는 북위체(北魏體)의 해서로 대표되는데 글씨가 소박하면서도 힘이 넘치며,

북방 이민족에 의하여 남쪽으로 밀려난 남조는 세련되고 온화한 서풍이 주를 이루게 된다.

 

특히 남조에서는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가 등장하여 행서와 초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왕희지(王羲之)는 위진남북조시대 동진(東晉, 317~420)의 서예가이다.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으며, 중국 서법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된다.

예서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서ㆍ행서ㆍ초서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켰다.

비록 그의 친필은 전하지 않으나 전해오는 임모본과 모작을 통하여 그의 서풍이 우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역대 황제 중에서도 당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왕희지전(王羲之傳)」을 지어 찬양하고,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모두 무덤으로 가져갈 정도였다.

왕희지의 서풍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신라의 김생(金生)ㆍ탄연(坦然)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중기에도 새로운 서체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석봉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황흥조상(皇興造像) - 북위 왕흥 5년(471), 해서

집왕성교서비(集王聖敎序碑)

  - 唐 함형 3년(672), 행서, 찬자/ 태종 이세민(太宗 李世民), 고종 이치(高宗 李治),

    서자/ 왕희지 글씨 집자(集字)

 

 

수대(隨代) - 남북조의 서체 융합

 ◆ 수(隨)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서체에 있어서도 북조의 힘찬 서체의 전통을 이어받는 한편 남조의 수려한 서체를 융합하여

서예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작품을 볼 때, 수대의 서예는 대부분이 석각서예이자 해서로

다른 서체는 매우 드물어서 마치 당대(唐代) 해서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수대의 서체는 대부분 해, 행서로 당(唐)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화(李和) 묘지(墓誌) - 수 개황 2년(582), 해서

 

 

당대(唐代) - 석각예술의 융성과 해서의 완성

 ◆ 당대는 석각예술이 크게 융성하여 수많은 비석과 묘지가 새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해서가 완성을 이루게 되는데, 초기에는 수의 전통을 이어받은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 등의 대가들이 등장하여 단정한 구조미와 풍격을 살린 해서의 범본을 만들었고,

그 이후에는 안진경, 유공권 등이 출현하여 새로운 해서의 풍격을 만들어냈다.

한편 장욱과 회소는 막힘없이 자유롭게 붓을 놀리는 초서를 유행시켜 해서와 대조되는 자유분방한 멋을

즐겼다. 당대 석각은 글씨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명비가 많아서

석각예술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 당대(唐代) 묘지

중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에 고고학발굴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다량의 당대(唐代) 묘지가 서안비림박물관으로 입수되었다.

이들은 수려한 글씨와 화려한 문양, 풍부한 내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택목(韓擇木)의 《남천현주묘지(南川縣主墓誌)》는 깨끗하고 수려한 해서이며,

동경인(董景仁)의 《경왕이기묘지(慶王李沂墓誌)》는 배치가 또렷하고 서법이 유창하여 당대 묘지 중 행서의 걸작이라 할만하다.

《이훈부인왕씨묘지(李訓夫人王氏墓誌)》에는 왕씨가 천보(天寶, 742~756) 초년에 대운사(大雲寺)의

신라스님에게 법명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어서 당과 신라사이의 불교문화 교류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

  - 唐 천보 4년(745), 예서, 찬자/ 현종 이륭기(玄宗 李隆基),

    서자/ 현종 이륭기, 숙종 이형(肅宗 李亨)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唐 건중 2년(781), 해서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 唐 건중 원년(780), 해서, 찬자/ 안진경, 서자/ 안진경(顔眞卿), 이양빙(李陽)

 

 

송원대(宋元代) - 시서합일(詩書合一)의 흥취

 ◆ 송원대는 당(唐)의 서풍을 계승하면서도 의취와 형식에 있어 각기 다른 비중을 두었다.

심미의식을 중시하였던 송(宋)代는 개성적이고 활달한 서풍이 유행하였고,

채양(蔡襄), 소식, 황정견, 미불의 송4대가(宋四大家)는 각자의 개성적 필법을 완성하였다.

복고주의가 성행한 원(元)代는 옛 서법의 형식미를 더 존중하였으며,

조맹부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균형잡힌 해서와 유려한 행서를 구사하였다.

송원대 석각에서는 서법 대가들이 남긴 글씨의 조형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뛰어난 시문(詩文)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대관성작지비(大觀聖作之碑) - 宋 대관 2년(1108), 해서, 찬/서자: 휘종 조길(徽宗 趙佶)

미불사병(米四屛) - 宋(960-1279), 행서, 찬/서자: 미불(米芾)

 

 

명대(明代) - 한족 문화예술의 부흥

 명대에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된 한족(漢族)은 중국의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전통문화의 육성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축윤명(祝允明)과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는 모두 왕희지의 전형을 근본으로 삼았지만 明 전기의 지나치게 단정하고 깔끔한 서풍과 달리 기력(氣力)을 갖추어 明代의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말기에 등장한 동기창(董其昌)은 이전의 복고적인 서풍과 자신의 개성적인 서풍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날카로우면서도 변화가 풍부한 글씨를 만들어내 명말청초 서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익소공가훈(徐翼所公家訓)

  - 明 만력 45년(1617), 행서, 찬자/ 서학주(徐學周), 서자/ 동기창(董其昌)

 

 

청대(淸代) / 근대(近代) - 다채롭고 풍부한 석각예술의 발달

 ◆ 淸 초기에는 조맹부와 동기창의 서체가 서단을 지배하여 변화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발달로, 전서와 예서가 다시 부각되고

안진경과 구양순의 서체가 유행하게 되어 예술적으로 좀 더 풍요로워지게 된다.

문인, 황족명신(皇族名臣), 민족영웅들이 남긴 다양한 내용의 글과 개성적인 서체를 담고 있으며,

한자의 뜻과 형상, 배열에 의미를 부여한 문자유희(文字遊戱),

시와 그림의 결합 등 다양한 형태를 갖춘 석각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관중팔경도(關中八景圖) - 淸 강희 19년(1680), 작자/ 주집의(朱集義)

공자상(孔子像) - 淸 옹정 12년(1734), 작자/ 과친왕 윤례(果親王 胤禮)

주자교묘지(朱子橋墓誌)

  - 민국 30년(1914), 전서, 해서, 찬자/ 엽공직(葉恭綽), 서자/ 엽공작, 우우임(于右任)

  

 

 

 

 

중 국 (中國)

상(商)-진(秦)

 B.C.17세기무렵

       - B.C. 207

 ▪갑골문(商)

 ▪종정문 모공정(周)

 ▪B.C.5세기-4세기 석고문(戰國)

 ▪B.C. 219년 태산각석(秦)

한(漢)

 B.C.202 - A.D 9

신(新) 9-23년

후한(後漢) 23-220년

 ▪16년 내자후각석(新)

 ▪156년 예기비(後漢)

 ▪175년 채옹(132-192) 희평석경(後漢)

위진남북조

 220-581

남조 서풍

 ▪2-3년 종요(151-230) 선사표(魏)

 ▪353년 왕희지(307-365) 난정서(東晋)

 ▪514년 예학명(梁)

북조 서풍

 ▪498년 시평공 조상기(北魏)

 ▪511년 정도소(?-516) 논경서 시(北魏)

수(隨)

 581-618

당(唐)

 618-910

 ▪626년 우세남(558-638) 공자묘당비

 ▪632년 구양순(557-641) 구성궁예천명

 ▪653년 저수량(596-658) 안탑성교서

 ▪672년 대당삼장교서(집자성교서)

 ▪776-779년 안진경(709-785) 안근례비

 ▪777년 회소(725-785) 자서첩

5대10국

 907-979

송(宋)

 960-1279

 ▪1082년 소식(1036-1101) 황주한식시 권

 ▪1094년 황정견(1045-1105) 이백억구유시 권

 ▪11세기 중반이후 미불(1051-1105) 사보시첩

원(元)

 1206-1368

 ▪1299년 조맹부(1254-1322) 현묘관중수삼문기

 ▪1304년 조맹부 편지(척독)

명(明)

 1368-1644

 ▪1522년 문징명(1470-1559) 도연명의 시, 음주 20수

 ▪1589년 동기창(1555-1646) 행초서 권

청(淸)

 1616-1911

 ▪1746년 금농(1687-1763) 이국시

 ▪19세기 하소기(1799-1873) 화마찬

 

 

 

 

한국 (韓國)

B.C.2세기 무렵

중국의 한자문화를 수용하며 한국 서예문화의 시작

삼국시대

고구려

(B.C.37-668)

 ▪85년 무렵 낙랑 점제현신사비

 ▪414년 광개토왕릉비

 ▪415년 ‘광개토지호태왕 호우’가

            새겨진 그릇

 ▪589년 평양성 성벽에 새겨진 글씨

북조계통의 강하고 날카로운 글씨풍 수용

백제

(B.C.18-660)

 ▪525년 무령왕묘지

 ▪654년 추정 사택지적비

남조계통의 유연한 글씨풍과 북조계통 글씨풍을 함께 수용

신라

(B.C.57-676)

 ▪545-551년 무렵 단양적성비

 ▪568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북조계통 글씨풍 수용

삼국시대의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 글씨의 영향 받음

7세기 중반부터 唐의 구양순 해서체 유행

통일신라

(675-935)

 ▪801년 무렵 -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813년 - 단속사 신행선사비

 ▪886년 - 화엄사 화엄석경

구양순 해서체 유행

8세기 - 저수량, 안진경 해서, 왕희지의 행서 유행

서예가 金生의 활동(김생의 글씨는 조선시대까지 계속 유행)

성덕대왕 신종 제작(771년)

9세기 - 비석글씨를 중심으로 구양순 해서체 등장

고려

(918-1392)

 ▪954년 - 태자사 낭공대사비

 ▪1085년 - 법천사 지광국사비

 ▪1130년 - 청평산 문수원기비

 ▪1141년 - 묘향산 보현사기비

 ▪1327년 - 청평산 문수사 대장경 시주를 기념하여 세운 비

미불, 소식, 황정견 등 중국 북송 서예가들의 영향

10세기 전반 - 구양순체 바탕의 날카롭고 강한 필치 글씨가 비석의 글씨로 주로 쓰임

11세기부터 왕희지 행서체 유행

탄연(1070-1159)의 탄연체 나옴

14세기 -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가 들어옴

조선

(1392-1910)

 ▪1447년 -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발문

 ▪1450년 - 봉사조선 창화시 권

 ▪15세기 후반 - 성종 어필 선면첩(성종임금이 쓴 부채글씨)

송설체의 유행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유행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송설체는 조선시대 서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16세기 - 자암 김구선생이 쓴 송별시

 ▪퇴계 이황선생 필 경간당시첩

 ▪1602-1604년 석봉 한호선생 필 두보 시

 ▪17세기 - 동춘당 송준길선생 필 논어

 ▪1661년 미수(眉叟) 허목선생 필 척주동해비

16세기 - 송설체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과 함께

자암 김구(金絿, 1488-1534), 이황(1501-1570) 등의 왕희지 서체 연구 진행

왕희지 글씨를 기반으로 한 한호(1543-1605) 석봉체

송시열(1607-1689)과 송준길(1606-1672)의 양송체

허목(1595-1682) 미수체 등장

明의 문징명, 동기창 글씨 유행, 조선 후기에도 계속됨.

 ▪1737년 - 백하 윤순 필 고시 권

 ▪18세기 - 원교 이광사선생 필 두보 시

 ▪1799년 - 정조어필 증 철옹부백 지임지행

17세기 후반-18세기 : 왕희지 서체를 비롯한 중국의 서체 연구

옥동 이서(1662-1723)

공재 윤두서(1668-1715)

백하 윤순(1680-1741)

원교 이광사(1705-1777)로 이어지며 동국진체 나옴.

 ▪19세기 - 추사 김정희선생 필 예서

 ▪19세기 - 추사 김정희선생 필 묵소거사 자찬

중국 淸과의 학문교류,

중국고대비석 글씨를 연구하는 비학(碑學)의 영향으로 고대서예 연구 진행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추사체 완성

추사체는 중국 전한시대 예서에 각 서체의 장점을 융합한 서체로 조형미가 뛰어남.

 - 참고 표 (기주짱 정리) / Gijuzzang Dre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