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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유물전시관] 특별전 "고려청자 보물선"

Gijuzzang Dream 2008. 6. 18. 18:44

 

 

 

 

 고려청자 보물선의 신비와 감동! 

 

- “고려청자 보물선! 탐진에서 고려수도 개경을 향하다” -
 

 

 

 

 

 

 

 <고려청자 보물선 - 강진, 태안, 그리고 - > 특별전

 

전시기간 : 2008년 6월 23일(월)부터 8월 3일(일)

 

전시장소 : 국립해양유물전시관(전남 목포)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관장 성낙준)은

2007년 7월부터 2008년 5월까지 안 대섬 앞바다에서 수중발굴한 성과를 알리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발굴성과 속보전은 이후에 강진으로 귀향하여 순회전시(8월 9일~9월 21일)된다.

 

주꾸미가 감싸 안은 고려청자가 알려지고, 고려청자를 가득 실은 보물선

900년간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KBS TV(역사스페셜)를 통해 생생하게 국민들께 전해진 바 있다.

“고려청자 보물선” 특별전은 수중발굴 유적의 감동을 하루 빨리 전하기 위한 속보전이자

태안선 발굴 성과를 종합적으로 공개하는 첫 전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출토품 2만3천 여 점 중에서

고려시대 청자와 화물표(木簡), 닻돌, 닻줄 물레(호롱), 솥 등 1천 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 테마는

고려시대 태안선의 항로 / 태안청자 탐진에서 빚어지다 / 새로운 역사기록 ‘목간’ /

강진청자의 생산과 유통 / 태안청자의 예술세계 / 고려시대 생활 속으로 /

깨달음의 그릇 ‘청자발우(靑磁鉢盂)’ / 산예출향 사자장식 향로 / 두꺼비모양 벼루 /

침몰상태 재현 / 선상생활 / 태안선의 닻돌과 닻줄 물레

등으로 구성하여 보물선에 담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줄 것이다.

 

태안은 고대로부터 해상교통과 조운해로의 주요 경유지로, 드센 물살과 암초 때문에

고려~조선시대에는 운하건설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태안선의 청자는 빛깔로 승부하던 순청자 시기의 우수한 도자기이다.

출토품 중에는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산예출향'이라 칭찬한 비취색의 “사자장식 청자향로”도 있다.

또한 사찰에서 승려들이 사용하는 최상급의 청자발우도 만날 수 있다.

 

한편, 마이크로필름처럼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고려시대 목간(화물표)도 공개된다.

태안선의 목간은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목간이자, 고려청자 보물선의 항로를 담은 귀중한 열쇠이다.

목간에는 지명을 뜻하는 耽津(탐진) · 京(개경),

받는 사람을 뜻하는 崔大卿(최대경) · 安永戶(안영호) · 柳將命(유장명),

수량을 표시하는 글자, 그리고 담당자의 서명으로 추정되는 수결(手決)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고려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문의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전시홍보과 박예리 - 061)270-2043~2044


「고려청자 보물선」 특별전

 

 

○ 새로운 역사기록 ‘목간’ / 태안청자 탐진에서 빚어지다

 

‘강진에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보내다’

<앞> “탐진(耽津)에서 개경(開京)의 대정

        인수에게 사기 80을 보낸다”

<뒤> “앞의 것을 싣고 서명한다”

<앞> “최대경(崔大卿) 댁에 보낸다”

‘사기를 배에 실어 보내다’

‘담당한 사람이 목간에 서명하다’

<앞> “개경의 안영호(安永)의 집(戶)에 사기 한 꾸러미를 보낸다”

 

 

 

○ 고려청자에 펼쳐진 예술세계

 

바다를 담은 그릇 - 파도 · 물고기 무늬 대접

  

 

 

하늘을 품은 그릇 - 앵무새 무늬 대접

꽃을 피운 그릇 - 연꽃무늬 접시

 

○ 고려시대 생활 속으로

사자장식 향로

두꺼비모양 벼루

 

 

차문화 : 참외모양 주전자와 완(盌)

철화 초화무늬 잔

작은 단지(小壺)

기름병(油甁)

 

 

 

 

 


 

 

 

 

 

 

  

 

 

 

 

 

 


 바다에서 건진 고려시대의 역사

 

 

 

임경희(중세사 1분과)


 

지난 5월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한 어부가 주꾸미를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통발을 걷어 올리다 청자 접시를 발견하였다.

산란한 알을 보호하기 위해 주꾸미가 청자 대접으로 통발 입구를 막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과에 의해서

긴급탐사와 본격적인 수중발굴이 이루어졌다.

 

물속에 잠겨버린 유물이나 유적을 발굴하여,

인류의 생활방식이나 역사 등을 밝혀내는 학문을 수중고고학이라고 한다.

고고학의 영역이 수중으로까지 넓어진 것이지만,

바다라는 특수 환경으로 인해서 육상고고학에 비해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고

첨단장비의 도움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을 담당하는 기관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유일한 형편이다.

 

우리나라 수중발굴은 1976년 신안선 발굴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14건이 있었다.

발굴지역은 서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고선박(완도선, 달리도선, 십이동파도선, 안좌도선, 대부도선)과

청자, 선상생활용품 등이 인양되었다.

이외에도 중국 선박(신안선, 진도선)과 도자기도 발굴되었다.

 

이번 충남 태안 대섬 수중발굴은 이제까지의 우리나라 수중발굴의 집약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성과가 있었다. 내년에 인양될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을 비롯하여

2만 여점에 달하는 양질의 고려청자, 많은 선상생활용품이 나왔다.

 


사진 1) 도자기 적재 상태의 사진

 

도자기는 12세기 중반 것으로 추정되는데, 순청자에서 상감청자로 넘어가는 시기의 것들이다.

수량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청자들이다.

청자는 기종이 매우 다양하고, 청자철화퇴화문두꺼비형벼루[靑磁鐵畵堆花文蟾形硯]와

청자사자형향로와 같은 독특한 기형도 있다. 또한, 고려시대 백자도 발굴되었다.

이번 발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 목간이 나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14차례에 걸친 수중발굴에서 목간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발굴한 ‘新安船’에서 나온 것이다.

‘신안선’ 목간에는 ‘至治三年’이 적혀 있어, 적재 유물의 연대를 파악하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또한, ‘東福寺(동복사)’ ‘筥崎(거기)’ ‘釣寂庵(조적암)’ 등의 명칭을 통해서

신안선이 일본으로 향하던 배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신안선’에서 발견된 목패는 일본인 화물주에 의해서 작성된 것들로

신안선의 항로와 편년 등을 파악하는데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번 태안 대섬 수중 발굴을 통해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시대 목간이 출토되었다.

10월 12일까지의 발굴을 통해서 나온 목간은 4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편의상 A~D형이라고 하겠다.

 정확한 모양이나 크기 등은 생략하고 여기에서는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사진 2) 목간 A형

 

A형은 앞면에는 “耽津在京隊正仁守付沙器八十□ (탐진역재경대정인수료부사기팔십□)”

(이탤릭체로 표시한 는 이두),

뒷면에는 “□□載船進(또는 尾)수결”이 적혀 있다.

 

“탐진(현재의 강진)에서 서울에 있는 대정(고려시대의 정9품 무반) 인수에게

도자기 80□을 보낸다.”라고 해석되는데, 도자기 생산지가 강진임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수취인은 개경에 있는 대정 인수로

그가 최종 수취인인지 아니면 중간단계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결론은 추후에 내리고자 한다.

 

뒷면의 두 글자는 아직 판독이 되지 않고,

나머지 부분은 “배의 앞머리 (혹은 뒷부분)에 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수결이 적혀 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목간에 적혀 있는 수결은 모두 동일하다.

 

B형은 앞면에는 “□安永戶付沙器(一)裹 (□안영호부사기(일)과)”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수결만이 있다.

“안영 호에 사기 한 꾸러미를 보낸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판독이 되지 않아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지만,

‘安永戶’ 앞부분에 글씨가 쓰여 있는 다른 목간이 있고 전체적으로 앞의 A형과 구조가 동일하여

‘안영호’를 발송 주체가 아닌 수취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뒷면의 수결은 앞의 A형과 동일한 것이다.

여기에서 ‘안영’과 ‘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사진 3) 목간 C형

 

C형은 앞면에는 “崔大卿宅上”이라고 적혀 있고, 뒷면은 아무런 내용이 없다.

아직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비슷한 유형의 것이 발견되면 정확한 의미파악이 가능하겠지만,

현재로는 ‘대경’의 해석에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먼저, ‘최대경’을 단순히 人名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大卿’을 관직명으로 볼 가능성이 있는데, 고려시대 관직을 일괄적으로 정리한

『高麗史』 白官志에는 大卿(대경)이라는 관직명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편년자료나 고려시대 묘지명을 살펴본 결과 몇몇 사례들이 보이고 있다.

이중 인종대 인물인 金義元은 동일한 시기의 관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대경’으로, 묘지명에는 ‘예빈경’으로 적혀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고려시대 시(寺)나 감(監)에는 卿이나 少卿이 있었는데,

소경에 대칭하여 특히 정3품 내지 종3품의 卿을 대경으로 불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앞으로 고려시대 관제에 대한 연구를 더욱 진행하다 보면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D형은 청자를 묶은 쐐기목에 수결만 적혀 있는 형태이다.

여기에는 중간 부분이나 밑 부분에 위의 목간들에 적혀 있는 것과 동일한 수결이 적혀 있다.

수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화물의 선적을 총괄했던 인물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상으로 10월 12일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을 내용 중심으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앞으로의 발굴 조사를 통해서 위에 소개한 것 외에 다른 목간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목간을 통해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선적한 곳이 강진이라는 점과

개경에서의 수취인(대정 인수, 안영호, 최대경)을 알 수 있었다.

 

향후 많은 목간이 나오게 되면, 고려시대 청자의 유통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청자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 상품의 유통 과정을 추정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필진 : 임경희 / 2007-10-29

 

 

 

 

 

 

 

 

 

 

고려청자 운반선 복원

- 청자보물선 '온누비호' 진수식 -

 

 

약 800년 전 전남 강진에서 개성까지 서해를 오르내렸던 고려청자 운반선이 복원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고려청자 운반선을 3월 30일부터 복원에 착수하여 3개월 동안 완성하고

7월 10일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앞바다에서 진수식을 갖는다.

이번 복원은 고려청자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강진군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려청자 운송뱃길 재현사업 중의 하나이다.

 

이 배는 2008년 태안군 근흥면 대섬에서 발굴 인양된 고려청자 운반선을 모델로 복원하였으며,

고선박전문가의 자문과 문헌, 수중 발굴된 5척의 고려시대 고선박을 참고하여

옛 청자운반선의 구조 및 형태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였다.

배의 규모는 길이 19m, 너비 5.8m, 깊이 2.2m 이며,

이름은 강진군이 국민 공모를 통해 청자보물선 ‘온누비호’로 지었다.

온 세상을 누빈다는 뜻이다. 부위에 따라 소나무 전나무 참나무 등을 사용했다. 

황톳물 들인 광목천으로 대형 돛 2개를 달았고 동력 추진이 가능하도록 엔진(450마력)을 장착했다

  

 

 

이번에 복원된 ‘온누비호’는 8월 3일 강진(미산)에서 출항하여

신안(증도)․ 부안(비안도)․ 군산(십이동파도)․ 태안(대섬)․ 강화(월선포)까지

옛 청자 운송뱃길을 항해할 예정이며,

이와 함께 무사항해 기원과 청자운반선 뱃사공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8월 8일 강진으로 귀항할 예정이다. (강진청자축제, 8월8일-16일)

  

진수식은 10일 오후 4시 전남 목포의 해양문화재연구소 앞바다에서 열린다.

한편 이번 진수식에서는 명명(命名)식, 뱃고사, 축하선상공연, 승선체험 등의 행사가 진행될 계획이다.

 

■ 행사개요

◦ 일 시 : 2009년 7월 10일(금)/ 16:00~18:00

◦ 장 소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앞바다(목포)

 

- 2009-07-08 문화재청

 

 

  

 

 

 고려청자 운반선 다시 태어나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고려청자 운반선을

2010년 3월 30일부터 복원에 착수하여 3개월 동안 완성하고

7월 10일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앞바다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이번 복원은 고려청자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강진군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려청자 운송뱃길 재현사업 중의 하나이다.

 

이 배는 2008년 태안군 근흥면 대섬에서 발굴 인양된 고려청자 운반선을 모델로 복원하였으며,

고선박전문가의 자문과 문헌, 수중 발굴된 5척의 고려시대 고선박을 참고하여

옛 청자운반선의 구조 및 형태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었다.

배의 규모는 길이 19m, 너비 5.8m, 깊이 2.2m 이며,

이름은 강진군이 국민 공모를 통해 청자보물선 ‘온누비호’로 지었다.

 










- 2009-07-13 , 문화재청

 

  

 

 

고려청자 운반선 ‘온누비호’ 항해 동승기

 

닻을 올려라, 청자를 품고 천년 뱃길로... 

 

 

《“닻을 올려라.” ‘둥둥’ 북이 울렸다.

황토 물을 들인 광목으로 만든 돛이 팽팽해지자 선장은 힘차게 소리쳤다.

곧이어 선원과 도공 10여 명이 닻을 매단 밧줄을 힘차게 끌어당겼다.

뱃머리가 바닷물을 가르기 시작하자 고요했던 강진만이 조금씩 일렁였다.

3일 오전 11시 반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항.

900여 년 전 그때처럼, 전통 돛배 '온누비호(온 세상을 누빈다는 뜻)'는

청자 200점을 싣고 포구를 떠나 서해로 향했다.》 


               

 


소나무로 만든 전통 돛배

강진서 청자 200점 싣고 강화 왕복 엿새 대장정

“개성까지 못가 아쉬워”


형형색색의 만선기(滿船旗)를 단 쪽배들이 멀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날 항해는 고려청자의 고장 강진군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마련한

고려청자운반선의 뱃길 재현 행사.

마량항을 출발해 전남 신안군 압해도∼전북 부안군 격포항∼충남 태안군 안흥항∼인천 강화군 외포항까지 항해한 뒤 8일 강진으로 귀항한다. 왕복 1000여 km의 대항해다.

 

온누비호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태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청자운반선을 모델로 삼아 건조한 전통 돛배(길이 19m, 너비 5.8m). 2개의 대형 돛과 호롱, 치(방향타) 등을 갖췄다.


건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배에는 소나무향이 그윽했다.

다양한 모양의 청자들은 뱃머리 쪽 선실 바닥에 볏짚을 깔고 대나무와 새끼줄로 묶어 고정시킨 채 안전하게 놓여 있었다. 뒤쪽엔 옛날 배처럼 밑 부분을 뚫어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배는 샛마파람(동남풍)을 타고 평균 8노트(시속 약 15km)의 속도로 항해했다.


오후 6시경, 배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전남 해남군의 울돌목에 다다랐다.

김훈 씨가 소설 ‘칼의 노래’에서 ‘겨울 산 속의 짐승이 우는 듯 엄청난 소리를 낸다’고 묘사했던 곳. 물살은 거칠고 빠르게 흘렀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치잡이를 맡은 신연호 씨(71)가 “중장(배의 난간)을 꽉 잡아. 그리고 청자를 살펴”라고 소리쳤다.


선원들은 서둘러 선실로 내려갔다. 단단하게 묶어 놓은 청자는 모두 무사했다.

신 씨는 “젊은 시절 30년 넘게 돛단배를 타고 부산, 제주도, 안흥항까지 옹기를 팔러 다녔다”며 “청자를 싣고 예전처럼 돛단배로 항해하다니 뭐라 말할 수 없다”고 감격해했다.


울돌목을 무사히 빠져나온 배는 서해로 접어들었다. 오후 8시 바다에 어둠이 깔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성낙준 소장(55)은 망망대해 북쪽을 바라보며 “원래 고려 수도였던 개성까지 가려고 했는데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에 개성까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오후 8시 반 첫날 정박지인 신안군 압해도 송공항이 눈에 들어왔다.

선원과 도공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장을 맡은 김종열 강진군청 경제발전팀장(55)은 “첫날이라 긴장했는데 날씨가 좋아 무사히 항해를 하게 돼 정말 다행”이라며 “고려청자 해상 루트를 따라 항해를 하니 너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천천히 닻을 내리는 선원과 도공들의 표정은 청자의 비색처럼 맑았다.

 

- 2009-08-10,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