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최천약 - 18세기 조선 최고의 만능 과학자

Gijuzzang Dream 2007. 11. 6. 18:23

 

18세기 조선 최고의 만능 과학자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과학 기술자는 누구일까.

열에 아홉은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15세기 세종 때의 장인 장영실을 손꼽을 듯하다.

그러나 400여 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도 장영실에 필적하는 과학기술의 명인이 있었다.

 

서양 문물인 자명종 시계의 제작과

오늘날도 거의 오차가 없는 탁월한 수준의 도량형자를 만들었던 명인이라면?

그의 이름은 최천약.

18세기 초중반 영조 시대를 풍미했던 경남 동래 출신의 무인이다.

 

한학 연구자인 안대회 명지대 교수는

다음주 나올 국학계간지 <문헌과 해석>겨울호(37호)에

 ‘영조시대 기술자 최천약의 삶과 업적’란 글을 내고

영조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자로 군림했던 이 장인의 삶을 처음으로 발굴해 소개했다.

 

안 교수는 글에서 최천약을

‘각종 기계와 도량형 자를 제작한 만능 기술자이자 악기, 조각품을 만든 예술가’라며

“가장 주목할 만한 18세기의 거장”으로 소개했다.

 

최천약은 본래 나라 변방에서 장교급인 첨사로 근무했던 군인이었다.

그에 얽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승정원일기> 등을 비롯한

각종 의궤에 자주 등장한다.

사료에 첫 등장하는 것은 숙종 37년인 1711년.

일본 막부의 축하사절인 일본 통신사 사행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사실이 <동사일기>에 나온다.

이후 <승정원일기>에도 동래부 출신의 무인으로 물건을 만드는데 재주 있는 젊은이로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궁중도감에서 옥을 가공하는 일을 맡았다가 교묘한 손기술이 눈에 띄어

관상감의 천문기계와 자 등을 만드는 기술자로 등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총융청 교련관으로 군직을 맡았다가

천문기기 기술자 일을 본격화하면서 두각을 드러낸다.

 

가장 중요한 그의 업적은 1740년 총애하던 영조의 명을 받아

도량형과 악기, 물시계를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현전하는 '놋쇠자' 이다.

 

 

 

이 자는 다섯 가지 각기 다른 척도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척도로서는 가장 정교한 것이다.

길이 246cm, 폭 12㎜, 높이 15㎜의 사각 기둥으로 각각의 사면에

각기 다른 옛 척도인 예기척과 주척, 포백척, 영조척, 황종척의 명칭과 명문을 새겼다.

 

눈금 새김이 정교할 뿐 아니라 자의 용도를 설명한 명문 글씨의 미감도 좋다.

최근 실험을 통해 현대 공업 기술을 이용한 정밀 측정치와도 거의 차이가 없을

정교하고 황동재질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면서

과학계 일부에서는 국보 지정감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또 무기인 화기 제작에도 밝아 이덕리가 편찬한 국방 저술 <상두지>를 보면,

4개층의 수레에 20문의 대포를 탑재한 총차를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인의 능력을 가장 탁월하게 발휘한 분야는 서양 자명종 제작이었다.

 

1631년 중국에 갔다온 사행 사신들이 처음 갖고 들어와 보급된 자명종의 경우

전문가가 드물어 수리가 힘들었으나,

최천약은 처음 봤는데도 곧장 수리를 해냈다고 한다.

 

18세기 각 분야 명사를 기록한 이규상(1727~1799)의 전기집 <병세재언록>을 보면

그가 영조 앞에 불려가 바늘이 떨어진 영조의 자명종에

즉석에서 다듬어 만든 은바늘을 꽂고 수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영조는 “천하의 뛰어난 교묘한 솜씨”라고 찬탄했다.

 

 

이규상은 자명종이 서양 것을 본따 우리나라에서 완성된 것은

최천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적고 있다.

부산 초량의 왜관(옛 일본인 집단거주지)까지 출입하면서

일본에서 수입된 서양식 시계 기술을 습득하고, 제작법까지 익혀

조선의 옛 시계 제작자의 계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실학자 이규경도 명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자명종변증설’에서

최천악(최천약)을 자명종의 명인으로 거론했다”면서

 “아쉽게도 현재 그가 만든 자명종 유물은 찾을 수 없다”고 전했다.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보루각을 그가 개보수한 인연도 눈길을 끈다.

 

안 교수는 문인 서명응이 쓴 영조의 행장(行狀)을 분석해

영조 18년 7월에 최천량에게 악기와 세종조의 물시계인 보루각 제도를 복구하는 사업을

벌이게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악기의 경우도 1741년(영조 17)에 대보단(大報壇) 제례를 거행할 때 악기 조성청을 만들었는데,

당시 의궤에 최천약이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한 편경, 편종 의 제작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전남 고흥의 사도진 첨사로 있던 최천약을 급히 상경시켜

악기제작을 감독하도록 임금에게 특별청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 교수는 최천약이 기술을 왕성하게 발휘한 시기는

영조 4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했다.

 

영조는 그에게 “계사년(1713)부터 나라의 큰 일들(역사)을 돌본 이래

지금 계년(1753)까지 돌보고 있으니 후한 상을 내려 마땅하다.

변장에서 체직시켜 오게 한 뒤 영구히 급료를 주라”고 할 정도로 신임했다고 한다.

 

벼슬도 장교직에서 무공 2품직까지 발탁됐다.

기술자로서는 유례없는 고위직까지 오른 것이다.

 

 

그는 영조 치세 말기인 1753년 이후 사서에서 사라졌다.

정조 등극 당시에도 불려나간 기록은 나오지 않아 몰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정조와 대신들이 “장인들의 솜씨를 최천약의 수준에 맞추었”고,

최천약이 없어 완벽하게 물건을 만들 수 없다고 개탄했다는 내용이

실록과 의궤에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전설적 인물로 후대까지 인정받았던 셈이다.

 

 안 교수는

“지금도 최천약이 만든 많은 왕실 유물과 직접 만든 자, 새긴 비석 등이 남아있다”면서

“장영실, 이민철 같은 옛 과학기술자들의 역사 속에 그도 당당히 기억되어야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 [한겨레  2007년 2월3일]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