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唐代 화장법 - 대미(黛眉), 연지, 액황, 화전, 면엽, 사홍

Gijuzzang Dream 2007. 11. 6. 18:54

 

 

 

 

요즘 방영되는 사극 <대조영>등에서 보이는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의 머리모양 및 화장법은?

 

고구려의 화장법은

안악 3호, 쌍영총, 수산리 고분벽화 등에서도 보입니다.  

 

이와 더불어 주변국가, 특히 화려했던 중국 唐代 여인들의 화장법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모은 것들을 짜깁기해서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중국어를 직역 비슷하게 한 부분들이 많아서 의미가 조금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한자도 중국어 원문 그대로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

 

 

 

  <이규태코너> 페이스페인팅

 이규태의 溫故而知新 / 2006년 8월26일


월드컵 기간 중 얼굴에 태극무늬 축구공무늬를 비롯한 다양한 무늬의 페이스 페인팅이 유행하고,

그 페인팅을 간소화한 스티커가 대량유통됐다. 이 페이스 페인팅이 무늬만 바뀐 새 유행이 되어

식물 물감으로 그리는 한시적 문신(文身)인 헤나와 보석을 살갗에 붙이는 판박이와 더불어

올여름 뉴패션으로 뜨고 있다 한다.

얼굴에 그리고 붙이는 화장은 동서가 다르지 않게 역사도 유구하다.

우리 연지곤지가 그것인데 그 뿌리는 화전(花鈿)에 있다.

 

낙매장(落梅粧)으로도 불리는 이 화전에 대해 중국문헌 「사물기원(事物紀原)」은 이렇게 적고 있다.

 

송나라 무제(武帝)의 수양공주가 신년점(新年占)을 치는 정월 7일에 함장전(含章殿) 다락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어디선가 매화꽃 한 잎이 날아와 공주의 이마에 들러붙는지라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꽃잎이 붙은 얼굴이 어찌나 예뻐보이던지

궁녀들이 이를 흉내내어 이마에 붙이고 다녔던 것이 연지의 뿌리라 했다. 

  

볼 페인팅인 곤지는 기원이 다르다. 「유양잡저(酉陽雜)」에 보면

삼국시대 오나라 남양왕이 자칫 잘못으로 부인의 볼에 상처를 냈다.

이에 수달피의 기름으로 만든 고약을 만들어 발랐더니 상처가 붉은색으로 변색했다.

그것으로 부인의 미색이 돋보이자 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궁녀들이

볼에 칠하기 시작한 것이 곤지가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원설은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요,

연지곤지의 인류학적 뿌리는 선사시대 신명을 대행하는 샤먼, 곧 무당 표시였다.

유럽에서도 16세기 이래로

얼굴에 해와 달 · 화초 · 마차 등 검은 패치를 얼굴에 오려 붙이거나 그리고 다녔다. 

  

원래는 치통을 낫게 하는 고약을 발랐던 것이

흰 얼굴을 돋보이게 하거나 이성의 눈을 끄는 수단으로 크게 유행했다.

어떤 모양의 패치를 어느 부위에 붙이느냐로 메시지가 나타내기도 했고

휘그당 지지자는 오른쪽 볼에, 토리당 지지자는 왼쪽 볼에 붙이는 등으로 정당을 나타내기도 했다.

귀부인들은 시녀에게 다양한 패치박스를 들려 외출하기까지 했다.  ....... 생략

- 조선일보, 2002년 6월27일

 

 

 

 

◆ 여자의 변신은 무죄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현대를 불문하고 남자든 여성이든 간에 멋지고 예쁘기를 바라는 것은

염원이자 소망이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들은 내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엄청난 시간과 물질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남자 혹은 사랑받는 남자의 이끌림을 더욱 강하게 끌어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남성들이 여성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을

그 어느 것보다 높이 평가했음을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는

그래서 여성들에게 폭풍과 같은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 호소력을 채워주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아마도 화장품과 옷일 것이다.

제아무리 옷이 날개라 하지만 화장술만은 못할 것이다.

화장품을 통한 기막히고 감쪽같은 화장술은 여성의 변신을 가장 확실히 해주는 도구였기에,

여성들은 눈부신 변신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거울 앞에서 바르고 그리고 지우기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다.

중국에 ‘거울을 안보는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박물관을 가보면 전시품 가운데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동경(銅鏡) 즉 거울이다.

신분계급이 철저한 봉건사회였던 중국에서 동경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이 소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지체 높고 고상한 고대 중국여자들은 동경을 보면서 무엇을 했을까?

 

우선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발랐다.

미인의 필수조건인 뽀얗고 생기 있는 얼굴을 만들어주는 일등공신은 단연 분이었다.

분은 곡물을 물에 가라앉혀 부드럽게 만든 다음 햇볕에 말려 분말로 만들고

여기에 다양한 향료를 섞어 만든 것으로,

제아무리 피부가 검다하더라도 일단 분을 바르고 나면 병자처럼 허연 얼굴로 둔갑했다.


또 얼굴에 붉은 색이 나는 연지를 사용했다.

본래 연지는 감숙성 기련산맥 연지산이라는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의 즙에서 추출한 붉은색 안료로

여기에 소의 골수나 돼지기름을 넣어 윤기를 넣은 것으로

하얀 얼굴에 붉은 연지를 칠하면 얼굴에 생기가 감도는 것이다.


중국 고대 미인의 필수조건에는 눈썹과 입술화장이 중요하였다

눈썹은 석대(石黛)라는 검은색 광물을 이용했다. 잘생긴 눈썹 역시 미인의 필수조건으로,

누에나방 눈썹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아미(蛾眉)는 곧 미인의 대명사였다.

중당(中唐) 이후 가늘고 긴 눈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팔자모양 눈썹, 붓자국 눈썹, 일자 눈썹 등도 시대별로 크게 유행했다.


앵두같은 입술 역시 역시 매우 중요한 화장의 하나였다.

입술에 바르는 안료는 단(丹)을 사용했지만, 주로 작고 진한 입술을 그리는 방법이 다 달랐다.


여성들은 입술과 눈썹을 그리는 외에도

얼굴 각 부위에 특이한 장식이나 문신 등을 하는 것을 즐겨하였다.

이마에는 기하학적인 꽃잎무늬를 그려넣거나 잘라 붙이는 ‘화전(花鈿)’을 하였으며,

광대뼈 바깥쪽에는 혈흔(血痕)과 같은 초승달모양의 ‘사홍(斜紅)’을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엽기적인 화장술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행위들은 예뻐지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본능적 욕구에서 나온 것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 2005년 8월 23일, 스포츠조선, 송행근의 요절복통 중국

 

 

 


 중국 唐代 여인들의 화장  

 

  唐代 여인들의 화장순서도표


 

화장의 과정은 대략 다음의 7단계로 이루어진다.

1. 연분(鉛粉) - 분을 바른 다음

2. 연지(臙脂) - 붉은색의 연지를 바른다.

3. 대미(黛眉) - 석대(石黛)라는 검은색 광물을 이용해 눈썹을 그린다.

4. 액황(額黃), 화전(花鈿) - 이마에 꽃무늬 같은 문양을 그리거나 붙인다.

5. 면엽(面靨) - 입술양쪽으로 보조개를 진주알만한 크기로 찍는다.

6. 사홍(斜紅) - 관자놀이 양쪽에 반원모양의 사홍을 그려 넣는다.

7. 순지(脣脂) - 입술에 동그랗게 포인트를 주는 입술연지를 찍는다.

 

 

연분(鉛粉)

연지(脂,べに)나 백분(白粉,おしろい)을 바르는 것은 고대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인 화장법으로,

지분(脂粉)은 용모를 아름답게 해주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것을 아주 애용했다.

귀부인이든 서민이든 모두 이것을 사용해서 화장했던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전국시대에 이미 중국의 여성들은 백분(白粉)을 사용해서 얼굴을 꾸미고 있었던 것 같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

‘정국(鄭國)의 여자는 粉은 하얗게, 눈썹을 칠하는 대(黛)는 검게’한다고 했고

또한, <초사(楚辭)> 대초(大招)에

‘粉은 하얗게, 눈썹을 칠하는 대(黛)는 검게, 방(芳)이나 염(艶)을 했다.’등의 기술은

백분을 바르는 화장이 오래 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고대의 백분은 성분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미립(米粒)을 부순 후에 향료를 넣은 것으로 분(粉=米+分)이란 글자의 어원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호상(糊狀)으로 속어로 호분(胡粉)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연(鉛)을 변화시켜 만든 것으로 연분(鉛粉)이라고도 한다.


사유(史游, 前漢 元帝때 사람)의 <급취편(急就篇)>에

‘향기로운 지분(脂粉), 고택(膏澤)의 통(?)’이라 했고, 

唐 안사고(顔師古)의 註에는

‘분에는 연분과 미분이 있어 모두 얼굴에 발라 색염(色艶)을 나타낸다.’라고 했다.


미분의 제법은 비교적 간단하여 통상적으로 원형의 발에 쌀즙을 넣어 그것을 침전시켜

입자가 고운 가루를 만들어 햇볕에 건조시켜 분말로 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연분의 제법은 과정이 좀 복잡한데 <계연(計然)>  <포박자(抱朴子)> 등에 의하면

연분은 화학처리해서 얻는 물질로, 가장 이른 인공안료이다.

이 제법은 鉛이나 석류(錫類)에 초산을 넣어서 반응시켜 연단(鉛丹)을 만들고,

그 연단으로부터 호상(糊狀)의 연분을 만드는 것이다.

보존을 위해 한대 이후에 화장용 연분을 건조시켜 분말이나 고체 상태로 발달되었다.


연분은 입자가 고운 純白으로 미분보다 보존이 용이했기 때문에 널리 대중화 되었다.

미분이나 연분 이외에도

송대(宋代)에는 익모초나 석고분(石膏粉) 등으로 만들어진 옥녀도화분(玉女桃花粉)이 있고 

또 명대(明代)에는 백분화(白粉花)의 종자로 만들어진 진주분(珍珠粉)이 있고,

청대(淸代)에는 활석(滑石)이나 광석을 연마해서 만든 석분(石粉) 등이 있다.


   

연지(臙脂) 

백분과 함께 사용되는 화장품에 연지가 있는데

연지는 언지(焉支), 연지(燕支)라고도 쓰며, 홍색(紅色)의 안료로, 여성의 중요한 화장용품이다. 

晋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연지(燕支)의 잎은 엉겅퀴와 비슷하며 꽃은 민들레와 비슷하고 서방에서 생산된다. 

당시 그 사람들은 이것으로 염색을 들여 연지(燕支)라고 불렀다.

중국인은 이것을 홍람(紅藍)이라 부르고

가루를 물들여 얼굴색처럼 물들여서 이것을 연지분(燕支粉)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西方이라는 것은 중국 서북의 흉노지구(匈奴地區)를 말하며

그 위치는 현재의 감숙성 기연산(甘肅省 祁連山)의 언지산록(焉支山麓)이다.


唐나라 장비(張泌)의 <장루기(張樓記)>에

“연지(燕支)는 가루를 물들여 부인의 색으로 한다.

옛날 흉노에 연씨(閼氏)라는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연지(燕支)와 같았다.

흉노에 연지산(燕支山)이 있고, 기연산(祁連山)을 잃으면 육축(六畜)은 한가하며, 

연씨산(閼氏山)을 잃으면 부녀가 안색을 잃었다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했다.


홍람(紅藍)은 초목식물로 紅색과 黃색의 두 종류의 색소를 지니고 있는데,

연지를 만들 때는 반드시 그 중에 황색의 색소를 제거해야만 된다.

황색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홍색의 액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화장에 사용되는 연지에는 2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순면에 홍람의 즙을 흡수시켜 만들기 때문에 <면연지(綿燕支)>라 불리며,

다른 하나는 작고 얇은 꽃잎을 가공하여 만든다 하여 <금화연지(金花燕支)>라 불린다.

이 두 종류의 연지는 그늘에서 말려야 하며 사용할 때에는 약간의 물을 부어 개어 바른다.


또한 남북조시대에는

사람들은 연지 속에 소의 골수나 돼지의 기름 등을 넣어 일종의 윤활제 형태로 사용하였다. 

그런 연유로 연지(燕支)는 연지(臙脂)라고도 쓰며 지자(脂字, 기름이라는)의 의미가 첨가된 것이다

 

한대 이후로, 홍(紅)을 바르는 여성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여

역대 詩文 중에 그것을 묘사한 시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남조, 梁 무릉왕(武陵王)의 <명군사(明君訶)>에

‘누가 거울을 보는 것을 참으리, 그것을 홍(紅)의 화장을 비춘다.’라고 했고,

북조의 <목란시(木蘭詩)>에 ‘언니는 동생이 올 때를 물어 연지화장을 하네.’라고 했다.

 

 


◆ 중국의 화장법  


옛날 중국 여성들의 일반적인 색조화장은 분과 눈썹먹, 연지를 바르는 것이었다.

분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쌀가루에 향료를 넣어 만든 것으로

분(粉)자는“쌀가루”라는 의미인‘米’와‘分’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미분(米粉)이라 불린다.

또 하나는 미분에 비해 부착력이 뛰어난 것으로

납과의 화학처리를 통하여 만들기 때문에 통칭 연분(鉛粉)이라고 한다.


"분대(粉黛)" 본래의 의미는‘분과 눈썹 그리는 먹'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색조화장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미인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즉 분대라는 말은 얼굴에 분을 칠하고 눈썹을 그리는 일이 화장의 중심적인 행위이며

화장품에 있어서 분과 눈썹을 그리는 먹이 중요한 화장품의 종류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여성들이 눈썹을 그리는데 사용한 재료는 석대라는 광물로 간단히 대(黛)라고 칭한다.

볼과 입술에 사용하였던 연지는 일종의 홍색안료로 여성 얼굴화장의 주요 용품이다.


연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문헌에 연지는 잎이 삽주와 비슷하고, 꽃은 민들레와 비슷하며,

흉노지구의 언지산에서 생산되는데 원주민들이 염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명칭이 연지가 되었다고 하며,

연지라는 명칭의 유래가 홍화의 주생산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화는 이집트가 원산지라고 전해지고

중국 내륙지방에서도 일찍부터 이 식물의 이식과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기후가 적합한 북방 연(燕)이 홍화의 명산지가 되고

연지는 연나라 것이 많아 그 이름이 연지(燕支)라고도 알려지게 되었다.

연지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중국여성의 색조화장이 풍부해지기 시작하였다.

 

 

(1) 先秦시대

先秦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였으며 철제도구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문화적으로는 중국고대사에서 크게 진전하여 중국문하 기본적인 형식의 토대를 구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여성 색조화장 문화의 초기단계라 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중국여성은 원시화장 단계에서 벗어나 연분을 제조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주(周)왕조 때에는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는 긴 눈썹을 선호하였으며 입술은 붉게 하는 화장법이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2) 秦, 漢시대

시황제의 중국통일로 중국의 중앙집권적인 고대제국이 성립되었고,

뒤이은 한제국은 안정된 정치질서로 당시 중국적 세계질서를 확립시켰다.

전국시기의 발전을 기반으로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며

전대에 비해 풍성하고 정교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색채에 대한 심미의식도 차츰 성숙해진 시기이다.

한(漢)대는 여성색조화장의 정착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 피부화장, 미묵(眉墨)을 이용한 눈썹표현, 입술을 붉게 칠하는 입술화장법 등

여성기본 색조화장은 일반화 및 정착된 듯이 보인다.


한나라 여성의 피부화장은 초기에는 백분을 사용하여 피부를 희게 표현하였으나

점차 연지를 섞어 붉게 하는 피부표현이 유행하였다.

긴 눈썹양식이 주류를 이루었고, 무제때에는 팔자눈썹을 주로 그렸고,

원제때에는 눈썹꼬리는 아래로 처지게 하여 처량함을 나타내는 수미(愁眉)가 유행하였다.

후한 말기에는 눈썹털을 모두 깎아 없애고 다시 먹으로 눈썹을 그리는 풍습이 일반화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의 가는 눈썹형이 대유행하였다.

긴 눈썹의 유행과 함께 넓은 눈썹 또한 즐겨 그리기도 하였는데

광미(廣眉) 혹은 대미(黛眉)라고 하였다.

사용된 입술연지의 주요 원료는 홍색의 광물질인 단(丹)으로 주사(朱砂)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사는 점성이 없어 부착력이 떨어져 주사 속에다 적당량의 동물기름을 첨가하여 제조하였다.


(3) 위진남북조시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이민족의 중국지배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족 귀족이 이민족에 밀려 강남으로 이전하여 강남이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문화의 성격이 자주 변모한 시기이다. 생기있고 정교하고 도덕적인 문화로 대변된 시기이기도 하다.

위진남북조는 여성색조화장의 부흥기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색조화장은 백분과 연지를 조합하여 시행하는 붉은 화장(紅粧)이 계속 성행하였고

눈썹화장 또한 부분화장 중 가장 즐겨하였다.

청대미(靑黛眉), 연두미(連頭眉) 등 긴 눈썹형이 여전히 유행하였다.

당나라때에 유행하였던 화전(花鈿)의 초기단계인 매화장(梅花)이 시작되었다.


(4) 隋, 唐 시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한족의 왕조를 수립한 수, 당 시기의 정치적발전은

'정관의 치’와‘개원의 치’로 대변된다.

문화적으로 중국역사상 가장 발전된 시기로 귀족적 문화와 국제적 성격의 문화양상을 띠고 있다.

당은 개방정책을 표방하고 경제적, 외교적 최성기를 이루었으며

동북아시아의 문화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생기있고 솔직하며 화려한 성격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농염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선호하였다.

 

수양제는 여자를 좋아하여 이란에서 대량의 눈썹먹을 수입하여 후궁들과 비빈들에게 나누어주고

눈썹을 그리게 하여 수나라대에는 눈썹화장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수나라 여성들 역시 섬세하고 길게 수식된 눈썹양식을 매우 좋아하였다.

 

연지는 분과 조화시켜서 사용하였는데 안색에 생기를 주는데 사용하였다.

연지를 사용함에 따라 붉은 화장법이 나날이 증가하여

당대에 이르러 얼굴 전체를 붉게 하는 홍화장(紅粧)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당나라때에는 여성의 눈썹화장이 화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다른 화장은 하지 않아도 눈썹화장은 반드시 하게 되었다.

당 현종은 여자들의 눈썹화장을 중시하여 현종이 화공에게‘십미도(十眉圖)’를 그리게 하였는데,

그린 눈썹으로는 소산미(小山眉), 분초미(分梢眉) 등이 있었고 명칭과 양식이 다양하였다.

당대의 눈썹화장은 전대에 비하여 넓게 그리는 양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버드나무잎과 같이 그려 유미(柳眉) 즉 버드나무 눈썹, 혹은 유협미(柳?眉) 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양쪽 끝을 날카롭게 솟아나게 하는 것,

한쪽은 날카롭게 하고, 한쪽 끝은 가늘게 갈라지게 하는 경우,

눈썹의 중심을 갈라지게 하는 것으로 양쪽 눈썹이 밀집되어있고, 중간에는 좁게 갈라지게 하는 경우, 

어떤 눈썹꼬리는 새의 깃털꼬리처럼 하는 경우,

어떤 눈썹은 끝이 아래로 처진 경우 등 이상한 형태와 특수한 모습의 눈썹양식이 공존하였다.

 

 

    唐朝 流行的 眉型


                                                                    세장미(細長眉)

                                   

    
    유협미(柳?眉)   분초미(分梢眉)         각월미(却月眉)        아미(蛾眉)

    

 

 

.......(중략)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화장을 했을까?

중국의 그림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 혹은 발굴된 유물 가운데 채색된 토용 등을 보면 

고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가장 화려하게 발달된 때에는 唐代이며

그 화장법의 중심에는 중국의 미인의 대명사인 양귀비가 있다.

唐代에는 경제적 발달과 함께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육식을 많이 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찐 체형이 되었기에 통통한 체형이었던 양귀비가 미인의 전형으로 등장했다.

다이어트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양귀비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미모를 가꾸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양귀비는 특히 얼굴 화장에 매우 많은 신경을 썼는데, 그녀가 평소에 사용한 화장법은

"얼굴을 붉고 윤기 있게 만들어, 바른지 15일이 지나면 얼굴이 홍옥(紅玉)처럼 된다"는

'옥홍고(玉紅膏)'의 사용이었다.

또 눈과 눈썹 화장도 중시하여 다양한 화장법으로 눈썹에 수시로 변화를 주었는데,

낮에는 누에나방이나 원앙 모양의 눈썹을 그리고

밤에는 코 위 부분을 매우 굵게 그리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게 그렸다.

또 입술 화장을 할 때 다소 진하게 하여 입술이 도톰하게 보이도록 하였으며,

단청(丹靑)으로 양쪽 볼의 보조개에 포인트를 주어 웃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 (생략)

 

- 2005년 10월5일 스포츠조선, 송행근의 요절복통 중국, 양귀비의 화장법

 



역대 여인들의 입술화장(脣粧) 양식도표

 


 

당나라에 이르러 안색에 생기를 주기 위하여 분과 함께 사용하던 연지로

입술에 화장하는 화장법이 생기고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

당나라때의 입술연지는 일정한 모양으로 제조되었는데

현대의 립스틱과 유사한 스틱형태도 제조되었던 것 같다.

립스틱 형태의 입술연지는 여성뿐만이 아니고 남자도 사용하였는데

남성용의 입술연지는 일종의 투명한‘입술이 트는 것’을 방지하는 기름이었다.

여성의 입술연지는 주로 장식을 위한 것으로 입술의 형태를 변화시키는데 사용되었으며

사용된 입술연지의 색상은 10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여성의 입술 그리는 양식은 매우 다양하였지만

일반적으로 교소농염(嬌小濃艶)을 가장 좋아하여 이 기본적인 특징은 유지되었다.

즉 보편적으로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입술형태로 인정하는 것은

앵두와 같이 아름답고 작으면서도 선명하고 짙은 모양이었다.


唐代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세장(時世粧)>에는

입술에 흑색을 칠하는 것이 유행하였음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당시 소극적으로 기운이 없는 사회, 정신적 면모와 연관되어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기말의 영향을 받고 어슴푸레 화장한 퇴폐적인 유행이라 할 수 있겠다.

  

 

 唐朝?期 <???片>   

 

안색, 눈썹, 입술 등의 기본적인 화장을 제외하고

액황, 화전, 면엽, 사홍 등의 기교적인 부분화장이 성행하였다.

唐나라는 역대 중국을 통하여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색조화장문화를 이루었다

 


 
 

액황(額黃)은 이마 부분에 황색을 칠하는 것으로 남조시기 이후 유행한 풍습이다.

4세기경의 작품인 고개지(顧愷之, 345-406)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에는

머리를 땋은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어떤 여인이든 이마 주변에 일(一)자 또는 십(十)자의 황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마 주변의 머리칼을 정리하기 위한 화장법으로 액황(額黃)이라고 했다.

이 풍습은 한대초에 몽골 등의 주변 유목민족에게 전해져 널리 중앙아시아까지 유행했다.

액황은 불교의 성행과 관계있는데

여성들이 금을 칠한 불상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의 이마에 황색을 칠하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문헌을 보면 고대 부녀자들이 이마 부분을 누렇게 화장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염화(染畵)로서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찰진 것을 붙여서 완성하는 방법이다.

 



- 고개지 <여사잠도권> 中에서

 

화전(花鈿)의 기원은 남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화전(花鈿)은 화자(花子), 미자(媚子)라고도 한다.

화자(花子)의 명칭은 남조 송무제의 딸 수양공주(壽陽公主)에서 시작됐다.

그녀가 나른하여 전정옥첨(殿庭屋檐) 밑에 누웠는데 매화꽃잎이 나풀나풀 떨어져

공주의 이마 위에 붙어 꽃잎 형상을 했는데 그것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들이 이 모양을 보고 서로 앞다투어 흉내내기 시작하여 화자첩면(花子貼面)을 만들고

이런 종류의 화자를 ‘매화장(梅花粧), 낙매장(落梅粧)’이라 했다.

 

, 일설에는 唐代의 상관 완아가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서 이마에 흉터를 남겼는데

후에 이것이 화자(花子)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여하튼 당대 여인들은 이마에 화전을 붙이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눈썹을 그려 넣어 하나의 아름다운 꽃과 같은 형상을 한 ‘만면종횡화엽(滿面縱橫花葉)’이 유행했다.

각종 양식을 미간 사이의 이마에 붙이는 화전은

가장 단순한 한 개의 작은 둥근 점 모양에서부터 꽃모양, 추상적인 문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화전의 색채는 붉은색이 주류를 이루는데,

재료 자체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금박(金箔片)은 금색, 흑광지(黑光紙)는 흑색, 어시골(魚시骨)은 백색,

그 외 나전각(螺鈿殼) 및 운모편(雲母片) 등의 재료를 가위로 각종 색의 꽃송이 형상을 만들었다.

그 구체적인 이미지는 서안 등의 당나라 묘에서 출토된 토용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인상 머리(女人像頭部)

                   투르판(吐魯番), 7-8세기, 소조, 높이 6.8cmⅩ폭 5.5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투르판의 당(唐, 618-907) 시기의 무덤에서는 나무와 흙으로 만든 작은 인물상(人物像)이 많이 출토된다. 죽은 이가 사후의 세계에서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남녀 시종, 무사, 관리를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은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전형적인 미인을 보여주는 여인상으로, 당시의 화장법을 잘 알려 준다.

이마에 그려 넣은 꽃무늬는 화전(花鈿)이라고 하며,

입가 좌우에는 보조개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면엽(面)도 보인다.

관자놀이에도 비스듬하게 문양을 그렸는데, 이는 사홍(斜紅)이라고 한다.

 

 

면엽(面)은 장엽(??)이라고도 한다. 양 볼 입가의 보조개 부위에 점처럼 찍었던 화장으로

궁에서 궁녀들이 월경을 할 때마다 뺨에 표시를 하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보조개에 그리던 것이 당나라에 이르러 보조개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심지어 온 뺨에 모두 실시하였다. 

면엽은 일반적으로 연지로 점을 칠하거나 화전과 같은 방법으로 행하였다.

처음에는 두 개의 원점을 찍다가 당나라 이후에는 양식이 다양해져서

그 모양으로는 콩과 복숭아, 살구, 별, 달 등이 있었으며 대부분 주홍색과 붉은색, 노란색, 흑색이 쓰였다.

화전과 면엽의 과장된 얼굴화장은 송나라 이후 점차 사라졌다 

 

 

사홍(斜紅)이란 사선으로 빨강을 칠한다는 뜻으로 중국여성들이 뺨에 행했던 부분화장이다.

사홍은 불상의 한 종류의 꾸밈새로 초승달과 같은 모양으로,

빛깔과 광택은 선홍색이고 볼 양쪽, 귀밑머리, 눈썹 사이에 각기 배열했다       

 

唐대 여성의 얼굴에서 사홍은 일반적으로 태양혈 부위에 그린 장식으로

이런 꾸밈새의 내력과 연관은 삼국시대 魏 문제 조비(曹丕)가 궁녀 설야래(薛夜來)를 총애하였는데

하루는 뺨을 치게 되어 상처가 났는데 피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상처가 다 나은 뒤에도 여전히 두 개의 흉터가 남았으나 문제의 총애가 여전하자

다른 궁녀들이 그녀가 총애를 잃지 않는 것을 보고 잇따라 모방을 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때의 무덤 안에서 출토된 여자인형(토용)의 뺨부분 양쪽은

빨강색의 초생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화장은 색채가 매우 짙고 모습은 괴이하여

멀리서 보면 희고 깨끗한 뺨 위 양쪽에 상처 흔적이 있는 듯하다.

 

사홍은 일반적으로 모두 태양혈 부위에 그리는데,

깔끔하고 세밀한 것은 초승달 같았지만 어떤 것은 상처(흉터)와 비슷하여 잔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홍은 요즘 여성들의 볼터치와는 다소 다르다.

볼터치는 흰 얼굴바탕에 생기를 주기 위하여 얼굴바탕과 뚜렷한 경계선이 없도록 엷게 펴 바르는데 반해

사홍은 뚜렷한 경계선이 보이는 마치 사선의 칼자국과도 같으며, 때로는 특별히 아래로 그려있어,

연지로 어지럽게 핏자국모양으로 물든 듯 섬뜩한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唐代 유행한 지분과 눈썹을 진하게 그리는 화장은 그 절정에 달했다.

특히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얼굴을 백분을 칠한 후에 붉은색 또는 연지로 붉은 빛을 띤 '홍장(紅粧)'으로,

그 중 가장 고운 것을 '주훈장(酒暈粧)'이라 한다.   




입술도 한층 아름답게 치장했고, 궁중의 여인들은 다투어 홍분(紅粉) 화장을 했다.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바르는 것을 좋아한 唐 여인들의 화장은

완성된 정형을 이루어 농염한 것이 되었다.

 

당대 이후는 대부분 당대 화장의 답습이었으며,

이들의 화장법은 그 재료와 함께 한국과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 조선일보 이규태코너 등 신문 게재내용 정리

-「노빈손의 으랏차차 중국대장정」, 강영숙, 2003년, 뜨인돌

- 인터넷 중국 홈페이지에서 인용

高春明著《中國歷代婦女裝飾》?自周? 編制

 

 

 

 

- EL CONDOR PASA / 二胡(얼후)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