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순종황제의 어차 관련

Gijuzzang Dream 2007. 11. 6. 11:54

 

 

[융희황제를 모시던 사람들] 창덕궁 자동차 운전수 나카야마(中山)군

     
     ▲ <매일신보> 1926년 5월 10일자  ====> (해당신문기사가 맨 앞쪽)
         일요일(日曜日) 능행(陵行)에는 반드시 사찬이 계셨다.
         친용자동차(親用自動車) 운전수(運轉手) 나카야마군(中山君)

 


<매일신보 내용>
 
겉은 자지빛ㅡ 속은 샛노랑ㅡ 대하는 이의 마음까지 숭엄하게 하는 이화표 자동차가 융희황제를 뫼시게 되기는 대정 육년(즉 1917년) ㅡ 이제로부터 약 9년전 가을이었섰다.
 
융희황제께서 자동차를 새로이 타시고 덕수궁에 문후를 가실 때에 부왕을 그리시는 전하께서는 그 신속함에 만족하옵시어 그 대에 배승하였던 민병석 자작에게 "참 자동차가 좋고나" 하시던 말슴을 들은 이는 자동차 운전수 중산말길(中山末吉, 나카야마 스에요시)군이었섰다.
 
그는 본시 통감부에 배근하다가 다시 한국황실에서 용두마차를 쓰게되자 명예있는 마차의 교자가 되어 태조고황제(고종태황제의 착오인듯)와 융희황제를 내리 뫼시다가 마침내 대정 6년에 이르러 마차가 폐지되고 자동차로 뫼시게 되자 중산군은 즉시 자동차운전술을 연구하여 마차교자로써 ㅡ 자동차운전수로 세태와 함께 업을 갈게 되었던 것이다.
 
길은 행인도 얼씬도 못하게 순사가 치워놓겠다, 자동차의 기계는 좋겠다, 환도(핸들?)를 잡은 중산군은 그야말로 태연자약히 최후까지 융희황제의 홍릉능행을 삼가 뫼신 것이었섰다.
 
금곡능행으로 말년의 일을 삼으시던 융희황제게서는 어느 때에든지 생각나시는대로 자동차 대령분부가 내리시었는지라, 이로 인하여 중산군은 일시도 자동차 격납고에서 멀리 떠나보지를 못하였섰다 하며,
 
그 중에도 일요일 같은 날에 능행이 계실 때에는 반드시 친명으로 "일요일에 부려서 미안하다"하옵시는 내의의 사찬이 있어서 중산군은 항상 우애 깊으신 은덕에 감읍하였섰다고 한다.
 
전후 십칠년 동안 융희황제를 뫼시던 그는 요사이도 매일 이왕 은전하를 뫼시고 낙선재에서 빈전인 선정전으로 왕복을 하니 그의 감개야 어떠하랴.
 
(정리 : 2006.6.9,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이 기사를 보면 창덕궁에서 자동차를 처음 도입한 때가 1917년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언을 사실관계와 좀 더 세밀히 고증해보면 실제로는 이보다 몇 년 앞서 자동차가 운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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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창덕궁에 자동차를 처음 들여온 것은 1914년(?)

창덕궁 안 어차고에 보존관리되고 있는 2대의 어차(御車)는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 (2006년 12월 4일자) 및 문화재청 고시 제2007-14호 (2007년 2월 9일자 변경고시)를 통해 등록번호 제318호 순종어차와 제319호 순종황후어차로 문화재로 등록고시되어 있다. 
이 어차들은 복원 수리과정에서 각각 미국 GM사가 1918년 제작 캐딜락 리무진과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에 제작한 리무진으로 조사 확인된 바 있다. 


 
       
             ▲ <관보> 2007년 2월 9일자 ==> (해당내용이 맨 앞쪽 표에 나와있음) 
 

이러한 조사자료가 말해주듯이 창덕궁에서 자동차를 운행하였던 시기는 1914년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간혹 이것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대한제국시기에 황실에서 자동차를 굴렸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물증(사진자료 및 공식기록)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므로 이 얘기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관계를 놓고 본다면, 이 보다 앞선 시기에 왕실에서 자동차를 이용했던 흔적은 잘 눈에 띄질 않는다. 그 이전에는 왕실에서 행차를 할 때에는 자동차가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마차(馬車)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것은 사진자료 또는 신문기사를 훑어보더라도 그대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창덕궁에 자동차를 들여온 시기가 "1914년경"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또 있다. 
이왕직 서무과에서 연차발행한 <이왕직직원록>에 드러난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료는 현재 1911년 9월판, 1914년 7월판, 1915년 4월판, 1918년 8월판 등 4가지를 활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 기재된 이왕직 직제표를 보면 '운전수(運轉手)'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창덕궁에 자동차를 들여온 사실과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운전수(運轉手)와 어자(馭者, 마부)에 관한 부분을 뽑아보면, 이러하다.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직원록> (1911년 9월 현재)
회계계 구사실(廐舍室)
고(雇) 혼다 本田鑛五郞 월65원,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43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33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28원, 김동규(金東奎) 월26원, 이병희(李秉禧) 월25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직원록> (1914년 7월 1일 현재)
회계과 경리실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54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4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47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5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3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이병희(李秉禧) 월30원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5년 4월 1일 현재)
회계과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65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4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47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5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3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이병희(李秉禧) 월30원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8년 8월 1일 현재)
회계과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70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7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50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9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8원, 이한명(李漢命) 월33원
 
[<매일신보> 1926년 5월 10일자에 등장하는 나카야마 스에키치의 이름도 위의 이왕직직원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다만 신문기사에서는 1917년 이후 마차 교자에서 자동차운전수로 전환하였다고 하였으나, 위의 직원록에서는 자동차운전수가 아니라 '어자'의 항목에 여전히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의아하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운전수의 직책이 공식 등장하는 것은 1914년부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1912년판 및 1913년판 이왕직직원록의 내용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제부터 '운전수'의 직책이 신설되었는지는 정확히 단언할 수 없다.] 

현존하는 어차의 제작연도가 1914년 이후의 것이라는 점, 이왕직에 운전수의 직제가 처음 보이는 것이 1914년판부터라는 점에 비춰 본다면, 창덕궁에 자동차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14년(이거나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라고 보면 큰 오차는 없을 듯싶다.
 
(정리 : 2007.5.17, 이순우)



****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이라는 카페에 올려진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