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고구려 머리모양과 화장(고구려고분벽화를 통해)

Gijuzzang Dream 2007. 11. 6. 19:56

 

 

 

 

壁畵에 나타난 고구려의 머리모양과 化粧文化

 

 

 

 

 

 

- 김용문(원주대)

 

 

 

Ⅰ. 서론

 

한국인은 의관을 갖추는 것이 예로 되어 있어 의관을 갖추기 전에 머리부터 가다듬었다. 머리카락을 가다듬는 수발(垂髮)은 의복이나 장신구보다도 더 먼저 행하여졌으며, 기본적인 신체보호 기능 외에 주술적이며 심미적인 기능을 지닌 인간의 종합적 표현수단의 역할을 하였다.

머리카락은 인종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가지고 태어나며 머리모양은 지역, 기후와 생활양식, 종교, 성별과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빗으며 보수성이 강하다. 머리모양에는 존두사상(尊頭思想)이 담겨 있어 머리를 소중하게 다루었으며, 머리모양으로 인간의 미의식을 표현하였고, 머리모양만 보아도 그 사람의 지위, 계급, 신분, 혼인의 유무 등이 구별되는 사회적 질서의 한 방법이었다.

 

인류는 4만년전 크로마뇽인 때부터 자연 그대로 늘어뜨린 머리를 손가락을 움직여서 땋을 수 있었다고 하므로 변발(?髮)은 4만년전부터, 전발(剪髮;단발)은 머리카락을 반달형 석기로 자를 수 있었던 10만년전부터, 상투는 청동기시대의 뼈비녀 출토로 B.C.300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고구려의 머리모양을 문헌과 벽화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고분벽화의 생활풍속도에 나타난 머리모양을 중심으로 평양지역과 집안지역으로 나누어 고찰하며, 고구려의 화장문화를 화장의 변천, 종류, 상징성에 관하여 살펴보고, 주변국가의 머리모양과 화장문화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 고구려의 머리모양

 

 

1. 문헌과 출토유물에 나타난 머리모양

 

환웅(桓雄)천왕 거발환(居發桓; B.C. 3898)은 부자와 군신, 남녀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으며 음식, 의복, 주거의 편의와 제도를 만들고 머리를 땋게 하였다.

2세 단군부루(檀君扶樓)는 계묘 3年(B.C. 2238)에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문헌비고』에 “단군 원년부터 머리를 땋고 머리를 덮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며 『사기』에는 “위만이 추계만이복을 하고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B.C. 3000년경 청동기시대의 뼈비녀가 소영자 옛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비녀의 머리 부분에 사람의 얼굴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전에서 발견된 청동기 의기(儀器)에는 밭갈이하는 농부가 머리를 상투로 빗고 있다. 그러므로 B.C. 3000년경에 이미 수발이 행하여졌고, 그 형태도 농경사회의 발달한 양식인 추계(椎?-머리를 끌어 올려서 정수리 위에 틀어 감아 맨 머리모양, 상투)였다.

 

마한(馬韓)의 남자는 괴두노계(魁頭露?)이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사람은 편두(扁頭)의 풍습이 있었다. 괴두는 둥글둥글 돌려 올챙이 같이 묶은 상투를 말한 것이다. 편두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누르는 머리의 변형으로 고대 한족(韓族) 내지는 동북아시아족 특유의 것이었다.

『해동역사』에는 “삼한의 부인은 머리를 얹고 남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여자는 말아서 뒤에 드리운다.”고 하였다.

 

문헌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풍속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머리모양에 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1) 고구려(B.C. 37-A.D. 668)

『북사』에 “그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한 것을 숭상한다.……”고 하였으므로 수발도 당연히 행하여졌을 것이며, 『구당서』와 『삼국사기』에 “춤추는 네 사람은 추계를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는 “부인은 건괵(=건귁, ?)을 더한다.”고 하였으니 괵(?)은 어여마니로 두르는 머리, 즉 가발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A.D. 357) 벽화의 부인이 가발을 이용하여 크게 얹은머리로 빗어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고 있다.

  

2) 백제(B.C. 18-A.D. 663)

『북사』와 『수서』에 “부인은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않고, 처녀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웠다가 시집을 가면 두 갈래로 나누어 위로 틀어 올린다.”고 하였고, 『주서』와 『통전』에는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얹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뜨려 장식했고, 출가녀는 이를 두 가닥으로 늘어뜨렸다.”고 하였다.

즉 백제사람들은 머리카락을 길고 아름답게 가꾸는 마한의 전통을 계승하여 남자는 상투를 틀었고, 여자는 혼인에 의한 신분의 구별을 하기 위하여 머리형태를 달리 하였던 것으로 처녀는 한 가닥으로 땋아 늘이다가 결혼 후에는 둘로 나누어 머리 위에 얹은 것이다.

 

“부여 정림사지에서 나온 도용(陶俑)의 머리형태가 머리를 둘로 나누어 위에서 묶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부여의 성양리에서는 은비녀가 출토되었고, 무녕왕릉(A.D. 501-523)에서는 왕의 화려한 머리 뒤꽂이가 출토되었다.

 

3) 신라(B.C. 57-A.D. 668)

『수서』와 『구당서』에는 “부인이 머리를 땋아서 감아올리고 비단과 구슬로 장식하였는데 머리가 매우 길고 아름다웠다.”고 하며, 『태평어람』에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우며 길이가 길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대체로 아름다운 머리로 휘감고 주채(珠綵)로 장식하였고, 남자는 머리를 잘라서 팔고 흑건(黑巾)을 썼다. 시장에서 모든 부녀들이 팔고 산다.”고 하였다.

 

『동경잡기』에는 “신라 때에는 국도(國都)의 북방이 결손되었기 때문에 여자의 머리를 머리 뒤에서 묶고 이것을 북계(北?; 쪽진머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고 하였는데, 황성동(隍城洞) 석실고분에서 머리를 정면에서 똑바로 가르마를 타고 뒤에서 쪽을 만든 북계로 빗은 여인상이 출토되었다. 소매에 파묻힌 왼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는 부끄러운 듯한 모습은 신라의 여성을 대하는 느낌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는 당(唐)과의 교역품으로 각종 비단과 가발 등이 주를 이루었고, 해가 갈수록 양이 증가하며 길이도 길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인의 머리카락과 외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질병도 가장 적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인의 가체(?)는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까지 그 우수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신라인의 가체가 중국보다도 아름다운 까닭은 동백, 아주까리, 수유의 열매로 머릿기름을 제조하여 머리손질을 하였고, 또 유두일(流頭日)에 머리를 감는 풍속과 목욕을 중시하는 신라인의 영육일치(靈肉一致)사상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신라시대의 남성의 머리만이 전해지고 있는 토용(土俑)에서 정수리가 뾰족하게 솟은 상투를 볼 수 있으며, 문헌의 ‘전발(剪髮)’기록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생각하게 된다.

은비녀와 채(釵; 두 가닥의 비녀)가 출토되어 여성의 전통적인 머리형태인 얹은머리나 쪽진 머리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벽화에 나타난 머리모양

 

고구려의 초기는 B.C. 1세기에서 A.D. 3세기로 부체제가 형성되는 과도기이다.

중기는 4세기부터 6세기 중반의 중앙집권적 영역구가 체제가 형성된 시기이다.

후기는 6세기 중반부터 668년까지 귀족연립 정권기로 나눈다.

 

대체로 초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와 그의 생활도가, 중기에는 주인공과 관련된 인물 풍속도와 사신도가, 후기에는 사신도가 그려지는 것이 상례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생활풍속이 묘사된 벽화를 평양지역의 고분(371-475)과 통구지역의 고분(427-475)으로 분류하였다. 편년은 전호태와 박진욱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평양과 안악 지역에서는 4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무덤주인 부부, 출행, 가무, 사신(四神), 연꽃 등 비교적 다양한 제재를 담은 고분벽화들이 잇따라 나타나는데 안악 3호분의 벽화가 대표적이다.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조성되는 평양, 안악 지역의 무덤양식은 구조계통상 요양의 위진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고분벽화 역시 내용과 양식상 요양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편 집안 지역에서는 5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제재와 구성의 고분벽화가 출현하며 대표적인 것이 각저총이다.

 

1) 평양지역의 머리모양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 약수리 고분, 수산리 고분, 쌍영총 고분의 인물 머리모양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남자들은 대부분 관모를 쓰고 있으며, 머리모양은 상투가 많았다. 다양한 관모를 쓰고 있으며, 책과 건의 착용이 많았다. 쌍영총의 승려는 종교적 이유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다.

 

여자의 머리모양은 다양한 얹은머리와 쪽진머리, 묶은머리로 나눌 수 있다. 얹은머리는 가발을 사용해서 고리모양으로 높이 틀어 얹은머리(環?)와 자신의 머리를 틀어서 얹은머리로 나눌 수 있다. 가발을 사용해서 크고 화려하게 빗은 얹은머리는 높은 지위의 상징으로 생각된다. 묶은머리는 미혼녀에게 많았고, 쪽진머리는 쌍영총 벽화의 부인에게서 볼 수 있다.

 

(1) 안악 3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으며, 357년에 세워진 고분이다. 북한에서는 한때 미천왕 무덤으로 부르다가 현재는 고국원왕릉으로 표기한다. 벽화는 돌벽 위에 직접 그렸으며,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안악 3호분이 동수(冬壽)의 묘로 보는 것이 확실하다는 견해도 있다.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과 두 명의 여자는 조선시대 떠구지처럼 타원형의 머리묶음에 다시 머리카락을 양쪽에 늘이고 있다. 여주인공의 머리모양은 가발을 두른 것으로 당(唐)의 금은 비녀와 보요 장식을 한 보계(寶?)로 보기도 하며, 힐자계(?子?) 또는 환상계(環狀?)로 보기도 하며, 환계(環?)로 보기도 한다. 떠구지 모양으로 크게 두른 환계가 계급이 더 높은 경우이며, 옆의 두 여인은 가발이 조금 작고 양 옆의 머리장식이 없다. 시녀는 2-3개의 고리로 올려 빗었다. ‘고계운환(高?雲環)’이라는 기록이 바로 이런 머리모양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귀족여자들은 금, 은, 주옥으로 만든 비녀와 두식으로 그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었다.






부엌의 여인들은 머리를 올려서 2개의 환으로 빗은 모양이 북위의 십자계와 같은 모양이다. 우물가의 여인은 1개의 환으로 빗은 머리모양이다.

행렬도에는 4명의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3등분하여 정수리와 양옆에서 하나씩 묶었고 붉은 색 댕기로 묶어 고정시킨 후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2) 덕흥리 고분

덕흥리 고분은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에 있으며 영락 18년(408)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생활풍속에 관한 벽화를 그렸다.

 

인물 옆에 직명(職名)이나 설명문이 적혀 있으며, 앞방 상단에 14행 154자의 묘지명이 있다. 덕흥리 고분의 피장자인 진(鎭)은 유주자사를 지냈다. 유주란 대체로 중국 하북성과 요녕성을 포괄하는 지역을 말한다. 큰 벽화고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누렸으나 그의 관등은 ‘소대형(小大兄)’에 그쳤다. 덕흥리 고분의 묘주는 관을 쓰고 있으며, 13태수는 책을 쓰고 있다.

 

전실 남벽의 견우직녀도의 견우도 관모를 쓰고 있으며, 직녀는 머리를 빗어 올린 모양으로 직녀의 머리모양도 얹은머리로 바람에 날리고 있다. 주인공의 시녀, 선녀 모두 직녀와 비슷한 머리모양이다.

 

우교차도(牛轎車圖) 뒤의 나이가 든 시녀와 위쪽의 4명의 시녀 중에서 나이가 든 2명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얹은머리 모양이다. 어린 시녀와 아랫부분의 4명의 시녀는 모두 양쪽으로 머리를 묶었다. 

(모사도)

(3) 약수리 벽화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에 있으며,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벽화에는 일월성신도, 행렬도, 수렵도 등이 그려져 있다. 문지기는 상투로 빗고 오른 손에 힘을 주고 있는 역사의 모습이다.

북벽의 묘주 부인은 머리꽂이로 가발을 고정시켜 빗은 얹은머리 모양이다. 시녀의 머리모양은 안악3호분 행렬도의 여인과 같은 모양이다.

 

(4) 수산리 벽화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에 있으며 5세기 후반의 고분이다. 섬세하고 우아하게 그린 수산리 벽화는 현실의 남벽 서쪽에는 검은 모자를 쓴 주인공과 시종의 모습을 그렸고, 동쪽에도 인물의 여유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부인의 머리모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머리카락 전체를 틀어 올려 빗은 것으로 보인다. 양산을 쓴 여인과 시녀는 높이 올린 머리모양이다.



 

(5) 쌍영총

남포시 용강군 용강면에 있으며, 5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의 좌우에 8각 돌기둥이 하나씩 있어 썽기둥 무덤 즉, 쌍영총이라고 한다. 연도의 동벽에 기마무사, 남녀 등 30여명의 인물상 등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은 라관을 쓰고 있으며, 부인은 단정하게 빗은 머리모양이다. 시녀들은 머리를 빗어 올리고 수건을 접어서 헤어밴드처럼 두르고 있다. 마차 뒤의 여인은 쪽진머리로 빗고 있다. 쌍영총 고분은 수도가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시기라는 점에서 집안지역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2) 집안지역의 머리모양

 

현재까지 집안지역에서 발견된 23기의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삼실총 고분, 장천리 1호분, 무용총, 각저총 고분의 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남자들은 대부분 관모를 쓰고 있으며 상투로 빗은 모습은 역사, 씨름꾼, 수박(手搏)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신선은 1-2개의 상투로 빗거나 내린머리로 빗었으며, 도사나 승려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다. 집안유적지에서 동비녀가 출토되고 있어 당시의 중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발전된 머리형태라고 생각되는 독특한 추계문화권(椎?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묶은머리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얹은머리, 머리수건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무용총벽화 주방의 여인은 현대 여인들의 머리모양과 같은 형태이다. 머리끝을 올린 것은 특히 현대에 볼 수 있는 형이다.

 

(1) 삼실총 고분

삼실총은 5세기 중엽의 것으로 방 셋이 ㄱ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천장을 받치는 역사의 모습과 남쪽 벽의 행렬도에는 주인공 부부와 시녀 등 11명이 그려져 있다. 성별,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른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장사는 하나의 상투로 단정하게 빗고 있다. 매사냥을 하고 있는 남자는 머리카락을 뒤로 내리고 있다. 부인은 머리를 올리고 수건을 쓰고 있으며, 시녀는 낮게 올린머리를 하거나 어린 시녀는 머리를 묶고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양옆 머리를 애교스럽게 내리고 있는 시녀도 있다. 이런 머리모양을 푼기명머리라고도 한다.

 

(2) 장천리 1호분

5세기 중엽 또는 후반기의 것으로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무용장면은 무용총 벽화에 못지않은 상당한 형상의 대규모 군무형태이다. 묘주 부인의 머리모양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잡고 비틀어 올려 끝을 정수리 부분에서 고정시킨 단순한 모양이다. 



(3) 무용총

5세기 초 또는 중반의 것으로 동벽의 가무도에는 남녀가 대열을 짓고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연주인은 쪽진머리 모양으로 빗었다. 무용하는 여자는 얹은머리로 빗었고 한 여자는 뒤로 머리를 묶은 것 같고 옆머리를 애교스럽게 내리고 있다. 채머리라고도 하며 미혼녀의 머리모양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는 머리를 빗어 올려 위에서 양쪽에 각각 3개의 환으로 묶은 모양이다.

주방에서 일하는 나이든 여인은 조선시대 일반 부녀자의 머리모양과 비슷한 얹은머리이다. 어린 시녀는 뒤에서 묶고 끝이 약간 올라간 모양이다.

 

(4) 각저총

길림성 집안현 여산남록에 있으며, 5세기 초의 것으로 고구려 생활풍속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씨름을 하고 있는 두 남자는 머리를 빗어 올렸으며 오른 쪽 사람이 상투로 빗고 있다.

두 여인 중 앞의 부인은 머리를 위에서 하나로 묶고 땋아서 귀옆으로 감싸 돌려 올린 후 위에서 고정시키고 머리 수건을 쓰고 있다. 머리수건을 건괵(=건귁, ?)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건괵은 머리수건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사용한 장식으로 머리털을 실로 짜듯 만든 머리장식 즉, 가발이다.



나들이 나온 귀부인은 머리를 뒤에서 하나로 모아서 반을 접어서 올리고 접은 밑 부분을 묶고 끝이 약간 올라온 모양이며, 일본의 다카마쓰(高松塚)의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머리모양인 굴계(屈?)와 비슷하다. 야외에 나갈 때는 간편한 머리모양으로 빗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녀들은 세 가닥으로 묶은머리 모양이다.

 

 

 

. 고구려의 화장문화

 

 

화장이란 선천적 자신의 용모를 그 시대, 그 문화권 내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선별, 선호,  선택된 ‘미’의 개념에 부합하도록 수정, 보완해서 꾸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장품은 그러한 작업에 쓰이는 물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원시시대의 화장은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인 의미에 의해 행하여지는 것이 많았다. 얼굴에 색을 바르는 것은 각 시대에 화장이라고 불렀으나 예전에는 제례 등의 특별한 경우에 색을 칠하는 것이 많았다. 화장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적인 성적 본능, 주술적, 종교적 욕구, 사회적 지위, 성별, 소속집단의 표시, 신체의 보호를 위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화장은 복식의 한 요소이며, 복식을 총정리 해주는 의미를 지니므로 시각적으로 보이는 미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환경과 가치체계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화장에 반영된 정신적 기반과 미의식을 유추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1. 화장의 변천

 

1) 상고시대

단군신화에 의하면 한민족(韓民族)의 첫 거주자가 태백산의 단목(檀木)근처로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태백산을 지금의 묘향산으로 향내 나는 산이라고 하였다.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등 향료가 생활과 밀접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조선시대에 만주지방에 살았던 읍루인들은 돼지기름을 몸에 두텁게 발라 추위를 막았고, 말갈인들은 인뇨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화장은 추위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생하여 차츰 미화수단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2) 고구려

삼국시대는 상고시대의 화장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한(漢)문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화장문화를 융화 발전시킨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삼국 중 중국과 지역적으로 가장 인접한 고구려는 신라나 백제에 비해 화장문화의 유입이 빨랐다.

특히 “연지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쓰이고(推古) 천황 18년(610) 9월로 고구려의 중 담징이 그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한 기록에서 고구려는 일본에 연지를 전파할 정도로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7세기 이전에 신라의 스님이 일본에 건너가서 연분을 만들어 크게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의 화장문화가 상당히 발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왕지신총 벽화 여인, 수산리 고분벽화의 귀부인, 쌍영총의 시녀가 연지와 눈썹화장을 한 모습이고, 황해도 송죽리벽화의 여인이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눈썹은 초생달같이 그리고 입술을 붉게 화장한 모습으로 생동감이 있다. 당시에는 모든 여인들이 화장을 하였을 것이다.

 

『위서』와『신당서』에 부인은 분대(粉黛)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백제나 신라의 화장문화가 크게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화장이 옅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 화장의 종류

 

고구려의 화장의 종류와 화장품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벽화에 나타난 모습으로 추측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삼국시대에 중국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었고, 중국인들이 선약(仙藥)이라 할 단(丹)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왔다. 사람이 오래 살기 위해서는 단사(丹砂) 또는 주사(朱砂) 즉, 금가루를 먹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고구려인들은 단사를 불로장생의 먹는 약뿐 아니라 나중에 얼굴과 입술에 바르는 붉은 연지로 발전시켜 화장의 효시를 이루었다.

 

1) 분 화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을 귀인으로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예부터 백색피부를 숭상한 데서 유래한 것 같다. 한민족과 같은 샤머니즘 문화권인 야쿠트족의 창조신화를 보면 최초의 인간인 흰 사람이 흰 산, 흰 나무, 흰 연못 근처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의 화랑이 분바르고 단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도경』에도 백분을 즐겨 바른 기록이 있다. 색분은 쌍영총 벽화의 여인처럼 아이섀도로 바르기도 하였다.

분은 피부가 희게 보이도록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으로 백분과 색분이 있다. 백분의 원료는 분꽃씨, 쌀가루와 조개껍질을 태운 분말, 진주가루, 곱돌가루, 칡가루 등이며 형태도 다양하여 분말, 고체, 액상 등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분은 분말인 백분을 가리킨다.

 

2) 눈썹화장

눈썹화장(眉黛)이란 묵으로 눈썹을 그리는 화장으로, 그리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눈썹은 화장에 있어서 얼굴의 균형을 잡는데 중요하며 인상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시대에 따라 눈썹의 모양도 다르며, 조선시대 미인의 눈썹은 아미와 같다고 하였다.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의 눈썹은 가늘고 까맣게 짧게 그렸으며, 옆의 두 여인은 짙고 길게 그리고 있어 당시에 다양한 모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눈썹을 그리는 먹의 재료는 송연 먹, 버드나무, 굴참나무의 재, 밤나무의 목탄, 목화꽃, 달개비 꽃잎을 태운 재 등이다. 원료에 따라 검정색, 검푸른색, 짙은 밤색, 회색, 자색 등 다양한 색이 만들어진다.

 

3) 입술화장

입술화장(口脂)은 각 민족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화장이지만, 스기모토(衫本正年)는 원래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라고 하였다. 현대에도 겨울에는 입술이 건조해지므로 입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술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장식효과를 주는 화장법이다.

벽화에는 입술을 본인의 입술크기보다 작게 그린 것이 많았으며, 색깔은 붉은 색이나 짙은 적색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주고 있다.

 

4) 연지

고구려의 수산리, 쌍영총 벽화의 여인들은 연지와 곤지를 하고 있으므로 혼례 때 신부가 이마에 곤지를 찍고 양 볼에 연지를 바르는 풍습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화장법이다.

뺨을 붉게 칠하는 화장인 홍분(紅粉)은 백분에 홍(紅)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백분을 뺨에 칠한 것은 당(唐)대의 시녀, 무희 등으로 봉사하던 호녀(胡女)의 하얀 피부를 흉내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마를 다듬기 위하여 황분을 칠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화장을 액황(額黃), 아황(鴉黃)이라고 한다.

현재 몽골의 부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연지를 두 볼에 찍는다. 우리와 다른 점은 결혼식 때가 아니라 평소 모양을 낼 때 그리고 반드시 부인들이 연지를 찍는다는 사실이다.

원료는 주사 또는 홍화이다. 주사는 광물질로 빨간 색이 선명하나 중독성이 있다. 홍화는 환약으로 만들어 기름에 개어 그리거나 둥근 연지도장을 찍어 사용한다.

 

5) 향과 기름

향은 옛날부터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급할 때는 구급약으로도 사용되었던 대표적 화장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귀한 사람의 몸에서 향내가 나며, 왕녀를 위해 향을 피우며 축원하였으며, 고구려의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을 찾아갔을 때 평강공주의 향취에 노모가 놀랐다고 하므로 고구려에서도 향유를 사용하였다. 향즙을 몸에 바르거나 피우면 신성한 영험이 있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향이 좋은 식물의 화즙을 모아서 기름에 개어 사용하고 말린 향나무 분말을 옷에 뿌리거나 목욕에 사용하였다.

읍루인들이 사용한 돼지기름은 몸에 발라서 추위를 예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자연 상태의 돼지기름이 아니라 가공을 한 것으로 햇볕의 그을림과 눈 그을림 예방효과가 있으며,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만드는 성분이 있다.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머리모양을 보면 형태를 유지하도록 기름이나, 풀 등으로 고정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의 여주인공이나 시녀, 쌍영총의 여인과 무용총의 시녀의 얹은머리와 묶은머리에도 머릿기름과 풀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백, 아주까리, 수유열매로 만든 기름을 머리에 바르면 검고 윤기가 나고 접착성이 뛰어나서 애용하였으나 가격이 비싸서 일반인은 쌀겨나 살구, 호도로 만든 기름을 사용했다.

 

6) 세안용품

화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화장을 지우는 세안이다. 『후한서』동이전에는 말갈인이 사람의 오줌으로 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쌀뜨물이나 약초 물이 비누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어린이의 오줌으로 세수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오줌 세수는 미백효과가 있으며 민속에서 전해지고 있는 색다른 미용법이다.

 

 

3. 화장에 나타난 상징성

 

1) 불교의 영향

 

(1) 향료의 보급

불교의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공향(供香)의식이다. 불전에 향을 피우면 부처님이 내려와 기원하는 소망을 들어준다는 믿음으로 인해 향료의 보급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2) 목욕의 대중화

불교가 대중화됨에 따라 목욕도 일반인에게 대중화되었으며 목욕에 필요한 용품과 용구들도 보급되었다.

 

2) 전통사상의 영향

 

(1) 영육일치사상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은 신라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인의 독특한 사상이다. 목욕을 중시하는 유두(流頭)민속은 고려, 조선까지 계속되었으며, 백색피부를 선호한 것은 내면의 순결함과 외면의 깨끗함을 동일시한 것이다.

 

(2) 벽사사상

연지와 곤지 찍기, 손톱의 봉숭아 물들이는 풍습은 붉은 색이 잡귀를 물리친다고 믿는 속신(俗信)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3) 자연순응사상

전통화장은 농담(農談)을 살려 곡선감 있는 완만한 면(面)에 중점을 두었고, 자연이상으로 예뻐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화장철학을 낳았다.

 

 

 

. 주변국가의 머리모양과 화장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록에 의하면 현도군으로 와서 조복과 의책(衣?)을 받아갔다고 한다. 『삼국지』 한전(韓傳)에서도 낙랑군으로부터 의책을 받은 이들이 1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의복과 모자는 낙랑군에 공무로 온 하호들에게도 주었다. B.C. 75년 현도군이 퇴축된 이후 고구려와 한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평양지역 벽화에 그려진 여인의 머리모양은 화려하고 머리장식의 사용이 많았다.

 

주천 가욕관의 진(晉)묘 벽화에 그려진 여자의 머리모양도 위로 올려서 고리로 틀어 얹은 형태이다.

 

정가갑 5호묘의 여주인공은 세 개의 둥근 머리를 빗어 올리고 양옆에 머리카락을 장식으로 내리고 있다. 연주인과 무용인은 여러 가닥의 고리로 묶어 올려서 빗고 있으며 바람에 날리는 듯한 모양이다. 안악 3호분의 시녀와 무용총의 악기연주인과 비슷한 형태이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유리왕 3년(A.D. 3년)에 선비족을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A.D. 1세기 초에 선비족의 일단을 복속시킨 일이 있었음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 집단이 A.D. 49년 고구려에서 한(漢)으로 이탈해 나간 선비족의 이종(異種)이라는 만리(滿離)집단으로 추정할 수 있다.

427년 평양천도이후 435년 6월과 439년에 고구려는 북위(A.D. 386-493)에 조공을 보냈다. 440년부터 461년까지 양국은 외교가 두절되었으나 46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며, 465부터 매년 사신의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북위간의 조공, 책봉 관계는 지극히 명목상의 상하관계에 불과한 것으로 북위와의 무력충돌 위험을 줄이려는 것이고 조공사를 빈번히 파견하여 북위의 문물을 도입하였다.

 

 

   
  (북위 십자계)

서안 초장파(草場坡)에서 출토된 북위시대 도용의 머리모양은 십자계(十字?)로 1900년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부녀자들이 상을 당할 때 이와 같은 머리모양으로 빗었다고 한다.

북위시대 출토된 사마금릉묘 출토 칠관화의 시녀들 중에는 십자계와 같은 모양으로 머리를 빗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부엌에서 일하는 시녀들도 같은 모양이다.  

 

요동, 요서벽화의 내용은 집안지역 1, 2기 벽화에 뚜렷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무용총은 요양 3도분 무덤과 조양(朝陽) 원태자(袁台子) 무덤의 영향을 받았다. 같은 내용을 그린 그림이 매우 비슷하며, 화풍도 유사하다. 원태자묘의 주인공 여인의 머리모양은 여러 개의 환을 만들어 올려 빗은 머리모양으로 안악 3호분과 약수리 고분의 여인과 비슷한 모양이며, 화장을 하고 있다.

 



배정룡은 고구려의 머리형태는 4-5세기경까지는 고계(高?)이며 장식적이던 것이, 6세기에 이르면 형태가 낮아지고 간편해지며 변발(?髮)로 틀어 얹거나 쪽머리를 하는 양식 등이 보이고 있다. 즉 4-5세기에는 한(漢)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6세기에는 북방 민족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진대 시종의 환계)

 

(晉)대의 묘주생활도는 아스타나에서 출토된 4세기의 것으로 묘주는 중국식 복식을 입고 있으며, 옆의 시녀는 둥근 고리모양으로 빗어 올렸다. 수환계(??)라고도 한다.

아스타나 98호묘 벽화의 부녀도 머리를 땋아서 둘러 얹었다. 이는 하서(河西) 지역의 습속으로 선비족에 의해 고창지역에 도입되었다.

 

선비족은 피발좌임이며 옛날에는 색두(索頭)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색두는 변발을 말한다. 흉노가 서쪽으로 옮겨간 후 선비족이 서하(西夏)에 유입하여 거주하면서 환계라는 머리모양으로 빗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투르판의 벽화에서 출토된 쌍환계(雙??)로 빗은 모습도 있다.

 

아스타나의 토욕구(?)에서 출토된 악무(樂舞)를 하는 여인은 경곡계(驚鵠?)로 머리를 빗고 화려한 화전(花鈿)장식을 하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의 사녀들은 다양한 화전 장식과 홍분을 바르고 있다. 머리모양은 올리거나 어린 시녀는 양쪽으로 묶었다.

 

 

. 결 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머리모양과 화장에 관하여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남자들은 대부분 관모를 쓰고 있으며 외상투가 많았고, 집안에서는 쌍상투로 빗은 모습을 문지기 장수, 역사, 씨름꾼, 수박(手搏)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매사냥을 하는 젊은 남자와 시종들이 내린머리로 빗고 있으며, 스님 등은 종교적인 이유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다.

 

고구려 여인의 고유한 머리 모양은 집안지역에서 볼 수 있다.

집안지역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만을 얹은머리와 묶은 머리가 많았다. 뒤에서 하나로 묶고 끝을 약간 올린 모양, 양옆의 머리를 내린 애교머리 등 고구려의 고유한 머리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유목생활에 편리한 머리모양이 선호된 것이다.

평양지역에서는 고유한 형태보다 외래양식의 영향을 받아 가발을 덧붙여서 크고 화려하게 빗은 머리모양이 많았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머리모양이 선호된 것은 당시에 고구려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자의 머리모양은 매우 다양하다.

크게 나누면 얹은머리와 묶은머리, 쪽머리로 나눌 수 있다. 얹은머리에는 가발을 덧붙인 얹은머리와 본인의 머리카락만을 얹은 두 종류가 있다. 가발을 덧붙여 빗어 올린 얹은머리는 환계(?)라고 한다. 2-3개의 환으로 빗은 것으로 안악 1호분, 안악 3호분, 약수리 벽화고분 등 평양지역 벽화의 여주인공과 시녀들의 머리모양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머리카락만을 얹은머리는 안악 2호분, 수렵총, 쌍영총, 무용총의 부인들과 시녀에게서 볼 수 있다. 무용총 벽화의 부인은 음식을 나르는 여자의 머리모양도 자신의 머리를 올려 빗어 얹은머리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가발을 사용해서 풍성하게 빗은 얹은머리이고 계급이 낮은 여자는 자신의 머리카락만을 사용한 차이점이 있다.

 

그밖에 양옆에 애교머리(빈하수: ?下垂)를 내린 형태도 있고 머리수건(巾)을 쓰거나 접어서 헤어밴드처럼 두르기도 하였다.

 

화장이란 선천적 자신의 용모를 그 시대, 그 문화권 내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선별, 선호, 선택된 ‘미’의 개념에 부합하도록 수정, 보완해서 꾸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 천왕지신총 벽화의 여인, 수산리 고분벽화의 귀부인, 쌍영총과 무용총의 시녀들이 연지와 눈썹화장을 한 모습이므로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여인들이 화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의 여인들은 눈썹을 검게 칠하고 연지를 바르며, 입술은 붉게 칠하고 있다. 또한 향을 사용하고, 머리에는 기름이나 풀 등의 접착용품을 사용하였으며 세안용품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장은 신체보호와 장식의 역할을 하며 불교와 전통사상의 영향, 향료의 보급과 목욕의 대중화에 따라 화장이 발전하였다. 화장에는 영육사상의 일치와 벽사사상이 담겨져 있다.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의 떠구지 같은 환계는 조양의 원태자묘에서 볼 수 있으며, 빗어 올려서 고리를 튼 얹은머리는 위진시대의 머리모양과 비슷하다. 북위의 십자계(十字?)와 안악 3호분의 주방에서 일하는 시녀, 사마금릉묘 벽화의 여인의 머리모양은 동일한 형태이며, 집안지역보다 평양지역의 벽화에 그려진 여인의 머리모양이 크고 화려하다.

아스타나의 벽화에 그려진 사녀와 출토된 도용들도 화전장식과 홍분, 눈썹과 입술화장을 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머리모양과 화장에서 주변국가와의 교류에 의한 영향이 나타나 있다.

 

 

......... 위 내용중에 들어간 그림들은 고구려고분벽화 모사도를 이용하여 기주짱이 덧붙였습니다.

 

 

 

 

Andre Gagnon - Pour Ma Soeur En Allee (나의 누이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