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광주박물관] 河西 김인후 선생과 필암서원 (풍수문화)

Gijuzzang Dream 2007. 11. 4. 23:54

 

 

 

 

 

 

 호남의 위대한 유학자 키운 붓(筆) 바위(巖)

필암서원의 이름이 유래된 필암(붓 바위).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지로 장성의 필암(筆巖)서원이 있다.

 

이곳은 하서(河西) 김인후 선생(1510~60)을 배향(配享)한 곳이다.

 

바로 가까운 곳에 하서가 태어난 맥동마을과 하서가 직접 자리를 잡은 부모 및 자신의 묘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일대가 퇴계 이황 선생을 상징하는 곳이라면, 필암서원 일대는 하서 선생을 상징하는 곳이다.

 

 

전북대 김기현 교수는 하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율곡 이이의 붓 아래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石潭筆下無完人·石潭은 이율곡의 또 다른 호). 그렇게 인물을 평함에 인색하기 짝이 없던 이율곡조차도 하서 선생을 평하여 ‘淸水芙蓉 光風霽月(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 온 뒤의 달)’이라고 할 정도였다. 호남 유학사에서 독보적 존재다.”

 

하서를 배향한 필암서원에 쓰여진 ‘필암’은 글자 그대로 ‘붓 바위’란 뜻이다.

필암(筆巖), 

필암서원 그리고 하서 김인후 선생은 풍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풍수 용어 가운데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文筆峰)이란 것이 있다.

필봉이란 이름을 가진 땅은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산의 생김새가 마치 붓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필봉의 지기를 받아 태어나는 사람은 훌륭한 학자가 된다고 한다. 실제로 반듯한 필봉이나 문필봉이 있는 마을에서 선생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심심찮게 들린다.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향한 필암서원.

필봉은 있으나 모양이 반듯하지 않거나 뒤틀려 있으면 훌륭한 선생이 되지 못하고 곡학(曲學)하는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풍수에서는 바위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데, 바위는 지기가 강하게 응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응 또한 강하거나 신속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바위가 다 좋은 지기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바위의 생김새가 지나치게 크거나 험하면 기운 또한 그와 같아 그곳에 사는 사람이 미치거나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고 풍수가들은 풀이한다. 무덤이나 집터 근처에 지나치게 크거나 사나운 바위를 피하는 것도 이와 같은 까닭에서다.

바위 모양이 단정하거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풍수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이렇게 풍수에서는 자연의 형상과 사람됨의 관계를 유비적(類比的)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필암서원이란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일대가 필암리이기 때문이다. 필암서원과 필암리란 이름을 가져다준 필암, 즉 붓처럼 생긴 바위는 어디에 있을까? 필암서원 근처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일직선으로 굵게 뻗은 주산을 배경으로 한 하서 부모 묘.

필암은 필암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맥동마을 입구에 있다. 맥동은 하서가 태어난 마을이자,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마을 좌청룡 끝부분이자 마을 입구에 그리 크지는 않으나 강단져 보이는 붓 모양의 바위가 있고, 바위에 ‘筆巖’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풍수에서는 ‘붓 바위의 지기와 소응(昭應)하면 장차 위대한 학자가 나온다’고 풀이한다.

마치 19세기 미국 작가 호손이 쓴 ‘큰 바위 얼굴’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년이 큰 바위 얼굴과 소응하여 나중에 위대한 현인이 되는 것처럼, 붓 바위가 있는 이 마을에서도 언젠가 그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 나올 것이라는 풍수적 설명이다.

 

위대한 유학자로서 하서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절차에 따라 집의 서쪽 원당산에 직접 터를 잡아 모셨다. 그의 무덤 역시 부모 무덤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풍수관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잡은 무덤 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산이 일자(一字) 모양으로 후덕하되, 주산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굵게 뻗어 내려온 점이다.

 

필암서원 누각 ‘확연루(廓然樓)’가 말해주듯 확연대공(廓然大公)한 대인의 후덕한 인품을 보여주는 터잡기다. 그의 생가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이다. 마을 입구 붓 바위는 그렇게 후덕한 산을 배경으로 솟아난 날카로운 붓과 같다. 이들이 모두 하서를 있게 한 자연물이다.

- 김두규/ 우석대 교수, 주간동아/ 2004년 7월 22일

 

 

              

 

 '팔뚝 무덤'으로 알려진 하서 김인후 선생의 손자며느리 묘

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는 우리나라 유학의 대가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 선생 묘가 있다.
하서 선생 묘 아래에는 손자인 김남중과 그 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 묘가 있는데

행주기씨 묘가 '일비장(一臂葬)'  즉 '팔뚝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신체의 일부인 팔뚝만 모신 무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기구한 사연과 슬픈 역사적 사실이 있다.


울산 김씨(蔚山 金氏)인 하서 김인후 선생은 동방18현의 한 사람인데 호남에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서 선생은 종룡, 종호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종호의 큰아들이 남중(南重)이며, 그 부인이 바로 행주 기씨 부인이다.

퇴계와 8년동안 서신으로 사단칠정론의 논쟁을 벌인 기대승(1527-1572)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남중은 강원도 산골로 피신하고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 집으로 가서 난을 피했다. 왜놈들은 수없이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도 부녀자들을 강탈 추행하고 심지어 코나 귀까지 베어가 그들의 전리품으로 삼아 본국으로 보냈다.
왜군이 물러간다는 소문을 잘못들은 부인은 다시 시댁으로 오다가 황룡강변에서 왜병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병이 부인의 손목을 잡고 만행을 하려들자 부인은 가슴에 품고있던 은장도를 꺼내어 자신의 팔목을 잘라버렸다.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왜놈에게 더렵혀진 몸을 잘라낸 것이다. 그리고도 몸을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택하여 황룡강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왜군들이 물러간 후 동네 사람들이 부인의 시체를 수습하려 했으나 강물에 떠내려가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땅에 떨어진 팔 하나만 수습하여 하서 선생 묘 아래에 고이 장사 지내주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묘를 팔뚝무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부인이 데리고 가던 어린 두 아들은 왜병에게 끌려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뒤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300년이 지난 일제시대 때 하서(河西)라는 성을 가진 일인 경찰서장이 부임해 왔는데 자기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도 끌려간 두 아이가 너무 어려 성도 이름도 몰랐으나 당시 유명했던 하서 선생 후손이라는 기억은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서(河西)' 라는 성을 창시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현재도 일본에는 하서라는 성을 가진 집안이 많다고 한다.

 

- 출처 : 형산 풍수강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