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8.31-9.9)] 중국 섬서성 문물정화 展 (추가)

Gijuzzang Dream 2007. 11. 4. 23:14

 

 

 

 

 

'삼채기타재악용(三彩騎駝載樂俑)'

녹색, 남색, 갈색의 세 가지 채색을 넣은 당삼채(唐三彩) 일종으로,

낙타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했다.

1959년 시안시(西安市) 서교중보촌(西郊中堡村)에서 출토된 이 당삼채는

목을 길게 늘어뜨린 채 우는 낙타 등의 선반 위에 오색찬란한 양탄자를 깔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8명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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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로 참고하시면 좋을 듯 싶은 주변 언저리 .....

 

 

섬서성 서안에 도읍을 세운 13왕조

 

 

“秦中自古帝王州”라고 할 정도로 서안(西安)은

중국 역사상 도읍지를 세운 곳으로 가장 많고, 기간도 가장 긴 도시이다.

 

서주(西周: 기원전 1134-기원전 771), 진(秦: 기원전 350-기원전 207),

서한(西漢: 기원전 206-기원 8), 신망(新莽: 기원 9-24), 동한(東漢 헌제 초),

서진(西晉 민제: 313-316), 전조(前趙: 319-329), 전진(前秦: 351-383),

후진(后秦: 384-417), 서위(西魏: 535-556), 북주(北周: 557-581), 수(隋: 581-618),

당(唐: 618-907)의 수도였던 西安은

근 1,100여 년간 중국 고대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서안에 처음으로 도읍이 정해지던 기원전 1062년,

주나라 사람의 활동 지역이 관중 분지 서부의 주원(周原: 지금 섬서 기산 부풍현 일대)에서

지금 서안시 서남 교외 풍하(灃河)유역으로 옮겼다.

 

文王은 풍하(灃河) 서안에서 풍경(豊京)을 세우고,

武王은 기원전 1057년 벌주멸상(伐紂滅商)하고 西周王朝를 세우고

풍하 동안에 호경(鎬京)을 세웠다.

이리하여 서안지역에 장기간 중국고대 정치, 경제, 문화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호경은 서주 왕조 정치의 중심이 되고,

풍경은 종묘와 제사, 문화, 오락의 장소가 되어

중국 역사상 제일 먼저 “쌍자성(雙子城)”을 형성하였다.

 

 

■ 중국황제릉 중에서

(이번 특별전에 나오는 진시황과 서한의 황제만 중심으로...)

 

■ 秦

 

(1)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 :

영정(贏政) 장양왕의 아들, 함양에 수도를 세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진의 수도 함양은 북으로 지금의 함양시 咸陽原에서

남으로 지금의 서안시 서쪽 교외 三橋鎭일대까지 위하(渭河) 양안의 광활한 지역이다.

진시황은 통일 후 “천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천도시켰다”

수도의 인도는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북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했다.

한편 흉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장성을 수리하고 정리하여

요동에서 감숙성 남부 민현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했으며,

 

시황제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만기를 친람’하는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였다.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며

자신의 공덕을 새긴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섬서 역사박물관에 탁본이 있음)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보다 높고 오제(五帝) 보다 크므로

삼황과 오제를 겸할 수 있는 용어로 황제(皇帝)라는 용어를 만들고

본인이 처음이므로 시황제라 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구평대(오늘날 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죽었다.

왕위 25년 帝位 12년, 50세에 죽고 장지는 섬서성 임동현에 있음.

그리고 2세 황제로 호해(胡亥)가 등극하였다.

 

(2) 진이세 호해(胡亥: 기원전 230-207) :

이세황제 등극과정의 의혹(이사열전)

조고와 이사와 호해와의 관계,

중국 최초의 농민기의인 “진승과 오광의 농민기의” 장자 부소 사망(섬서 綏德縣),

장지는 섬서 서안시에 있음.

 

 

■ 西漢

 

서한에는 11개의 帝陵이 있다.

- - -  모두 12명의 황제가 다스렸으나,

3대 여후 여치(呂雉: 기원전 241-180)는 고조의 황후로 

사후 장릉(한고조제릉)의 동남쪽에 장사를 지냈기 때문 - - -

 

문제의 패릉(霸陵)이 서안시 패릉향(霸陵鄕) 모요원촌(毛窯院村),

선제의 두릉(杜陵)이 서안시 곡강향(曲江鄕) 삼조촌(三兆村) 남쪽에 있으며

낮은 쪽 변의 길이가 175m, 높이 29m로 되어 있다.

나머지 9릉은 위하(渭河) 북안(北岸)의 함양원(咸陽原) 위에 있다.

 

 

형식상으로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패릉처럼 산으로 능을 삼은 형식으로,

묘장은 산애(山崖, 산 절벽)에서 파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분을 만들지 않는 애장(崖葬) 형식이다.

 

문제 부인능은 산애(山崖)의 상변에 있고,

어머니 박태후능(薄太后陵)은 산애의 상변 배후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제는 효자이기 때문에 능의 위치 배열상 ‘頂妻背母’의 형식이었다.

 

다른 10개의 능은 모두 머리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드는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부분은 150-170m정도이고,

높이는 약 20-30여미터로 무릉(茂陵)의 봉분이 가장 높다.

 

 

서한의 황제릉은 모두 배장묘(陪葬墓)를 갖고 있으며 능원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장릉의 배장묘(陪葬墓)는 장릉 동쪽에 규모가 가장 크고 지금도 60여 개의 봉분이 있다.

저명한 대신 소하(蕭河), 조삼(曹參), 주발(周勃) 등은 모두 장릉의 배장묘이다.

배장묘(陪葬墓)에서 출토된 채회보(彩繪步) 기병용(騎兵俑) 2,500여 건은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

 

 

서한 묘제의 제도에 의하면 황제가 즉위한 다음해부터 만들기 시작하고,

매년 국가 세수(稅收) 중 1/3을 내어 황제를 위해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다.

이처럼 생전에 만들어진 능묘를 ‘수릉(壽陵)’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한무제의 무릉은 유철이 황제에 오른 다음해(기원전 139)

자신의 능묘를 건조하기 시작하여 53년이나 걸렸다.

묘총의 낮은 부분의 동서 길이는 229m이다.

남북의 길이는 231m, 높이는 46m로 되어 있다.

무제가 죽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능 위의 수목이 이미 무성하게 자라나서

무릉(茂陵)의 공정 규모가 거대해졌다.

무릉의 묘실에는 금은보화와 살아있는 조수와 금수 등 190여 물건이 부장되었다.

 

 

능이 완성됨과 동시에 무향(茂鄕)은 무릉현(茂陵縣)으로 개칭되며

각지의 부호 27만명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역사학자 사마천이 이때 양하(陽夏)에서 이곳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西京雜記>의 <무릉추우병상여(茂陵秋雨病相如)>에 의하면

상여가 무릉(茂陵)의 젊은 아가씨를 소실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아내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그 내용에서 남편의 무절제를 나무라고 그와 헤어질 결심을 표명하자,

상여는 그에 감동하여 소실을 얻으려던 생각을 버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세에 만들어진 작품인 듯함)

 

 

무릉(茂陵)의 배장묘(陪葬墓)는 12개가 있다.

위청, 곽거병, 김일제(金日磾), 곽광 등의 묘가 있다.

곽거병 묘의 石刻에는 코끼리, 소, 말, 물고기, 돼지, 호랑이, 양,

그리고 맹수가 양을 먹는(怪獸食羊), 사람이 곰과 싸우는(人與熊鬪) 것과

말로 흉노를 밟고 있는(馬踏匈奴) 등 16건이 새겨져 있다.

 

 

능묘를 보호하기 위하고 실력이 있는 호족들을 장안에서 통제하여

한 왕조의 통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한초부터 능에 따라 능읍을 설치하고

공신(功臣) 귀척(貴戚) 고관(高官) 부호(富豪)의 家를 각 능읍으로 천사(遷徙)하였다.

장안 부근에 하나의 새로운 번화한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고조의 장릉현, 혜제의 안릉현, 경제의 양릉현, 무제의 무릉현과 소제의 평릉현이

가장 현저하다. 이 오릉읍 소재의 함양원(咸陽原)을 ‘五陵原’이라 하였다.

 

 

漢 元帝(기원전 40)시 陵邑을 설치하는 것을 폐지하였는데,

이유는 강제 이주에 대한 백성의 불만과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위릉(渭陵)부터 능읍의 설치가 폐지되었다.

 

 

(1) 한 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56-195) :

    자 季, 강소 沛縣人,

     원래 秦朝 정장(亭長: 10리를 관리하는 지방의 소관). 참사비(斬蛇碑: 하남 永城).

     척부인 묘(섬서 함양시).

     유방은 왕위 4년, 제위 8년이었으며 62세에 죽었는데,

     장릉(長陵: 섬서 함양시)에 장사지냈다.

 

 

(2)한 혜제 유영(劉盈: 기원전 211-188) :

    여태후가 실권을 장악. 미앙궁에서 죽음. 재위 7년 24세에 죽음.

     안릉(安陵: 섬서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3)한 여후 여치(呂雉: 기원전 241-180) :

    한고조의 황후, 혜제 사후 궁중의 한 아이를 혜제의 아들로 삼아 황제로 올리고

     정권을 장악함.(고조 유방의 ‘非劉氏不王’의 서약 때문)

     여후는 근 16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미앙궁에서 62세로 죽음.

     장릉(섬서 함양시) 동남쪽에 장사를 지냄.

 

 

(4)한 문제 유항(劉恒: 기원전 203-157) :

    고조 유방의 3자, 어머니는 박희(薄姬).

     기원전 196년 대왕(代王)에 봉해짐.

     기원전 180년 여후가 죽자 呂産, 呂祿이 병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기도함.

     승상 진평(陳平), 태위 주발(周勃) 등이 여씨의 반란을 제압하고

     대왕 유항을 제위에 옹립함.

 

     휴양생식과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함.

     田租를 1/30로 감하였다. 연좌법과 肉刑을 없앰.

     文帝의 절검과 절제를 일상생활화 함. 한 대 정치 경제의 안정을 도모함.

     재위 23년 기원전 157년 6월 미앙궁에서 47세로 병사함.

     패릉(霸陵: 섬서 서안시)에 장사를 지냄.

 

 

 

 

 

(5)한 경제 유계(劉啓: 기원전 189-141) :

    문제의 3자, 어머니 두태후.

     경제는 문제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사회경제의 번영을 가져와 부고가 충실해짐.

     제후들의 실력이 팽창해지자 어사대부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삭번’ 정책을 실시함.

     이로 인하여 ‘吳楚七國의 亂’이 일어나고 이것을 평정함에 따라 사회적 안정 가져옴.

     그래서 사서에 ‘文景之治’라 함.

     재위 16년 기원전 141년 미앙궁에서 49세로 병사함.

     양릉(陽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6)한 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56-87) :

    경제의 아들, 4세에 膠東王에 봉해지고 7세에 황태자가 됨.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함(建元).

     추은령(推恩令: 제후왕의 모든 자제에게 봉지를 나누어주도록 함)을 반포하여

     제후왕의 정치세력을 더욱 삭약시킴.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을 채택함.

     군사상으로 흉노세력과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

     신 경제정책을 추진 - 소금과 철 전매제, 균수평준법, 화폐주조권 장악(오수전) 등

     무제의 외정을 통해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이광(李廣) 등의 장군이 등장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등장함.

     기원전 87년 2월 순시 도중 병사함. 재위 54년 당시 70세였다.

     무릉(茂陵: 섬서 흥평시)에 장사를 지냄.

 

 

..... 이하 한나라의 황제들은 릉호만 .....

 

(7)한 소제 유불능(劉弗陵: 기원전 94-74) :

    재위 13년 기원전 74년 4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21세였으며 평릉(平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8)한 선제 유순(劉詢: 기원전 92-49) :

    재위 25년인 기원전 49년 12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44세였으며 두릉(杜陵: 서안시)에 장사를 지냄.

 

 

(9)한 원제 유석(劉奭: 기원전 76-33) :

    재위 16년 기원전 33년 5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44세로 위릉(渭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10)한 성제 유오(劉鷔: 기원전 51-7) :

    재위 26년인 기원전 7년 3월에 중풍으로 미앙궁에서 사망 향년 45세였으며

     연릉(延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11)한 애제 유흔(劉欣: 기원전 26-기원전 1) : 

    재위 6년인 기원전 1년 6월에 미앙궁에서 병사하였다.

     당시 26세로 의릉(義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12)한 평제 유연(劉衍: 기원전 9 - 기원후 5) :

    재위 5년 14세에 죽었다. 강릉(康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 진시황릉

 

 

 

 

<병마용의 발견과 진제국의 군단 >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현 안채향 서양촌의

양배언(楊培彦), 양지발(楊志發), 양전의(楊全義) 등 농민은

마을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 남쪽 감나무숲 가운데에

관개용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계 제8대 기적이라는 진시황 병마용이 발견되었다.

 

 

1호 갱(숙위군 주력) :

이 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 14,260평방미터로

3개의 병마용 갱중 제일 큰 갱이다.

 

갱내에 6,000여 점의 토용․토마와 40여 승의 목조 전차를 안치,

전차와 보병을 혼합 편성한 장방형 군진이다.

이 군진은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3열 경장비 보병용으로

매열 68점, 도합 204점이 있다.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고 속발을 하고 다리에 행전을 매고 손에 궁노를 든 이들 토용은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선봉부대이다.

 

선봉부대 뒤에는 격리토담에 의해 11개 동․서 향의 통로로 나뉘어져 있는데,

38종대의 전차․보병이 서로 엇갈아 배열되고 있다.

이들 토용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정강이에 대발을 치고

손에 창(戈), 긴 창(戟) 등 병장기 및 소량의 궁노를 들고 있는데 중장비한 갑사에 속한다.

이들은 전차와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반석같고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갱 내의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무사용이 각각 남북을 향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 측으로 그들의 임무는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다.

 

군진의 제일 후단에는

대군과 등을 지고 서쪽을 향해 서있는 무사횡대로서 군진의 후위이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들의 배후기습을 방어함으로써

대부대 진군시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2호 갱(고대 군진) :

2호 갱 군진은 1호 갱의 동단 북쪽에 위치하며 1호 갱과 약 20m 떨어져 있다.

갱의 평면은 곡척형(曲尺形)으로

동서 길이 124m, 남북 넓이 98m, 면적이 약 6,000평방미터이다.

 

시추 및 시굴자료의 추산에 의하면

이 갱내에는 전차에 메인 토마 350필, 기병용 안마 116필, 각종 무사용 900여점,

도합 1,400 여점의 토용․토마와 89대의 목제 전차가 있는데,

보병․기병․전차 3개 병종을 혼합 편성한 곡진을 이루고 있다.

포진방법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잇달아 구성했다.

 

첫 번째 작은 진은 노병(弩兵)진으로 곡형진의 최선봉에 위치,

도합 330여명의 弓弩手로 구성되었다.

그 중 약 160명은 갑옷 중장비를 한 궤사(跪射) 토용으로

8개 종대로 나누어 진중에 자리해 있다.

그 둘레에는 약 170여 점의 전포 경장비를 한 입사(立射) 토용이 진을 에워싸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적이 쳐들어 올 때 서기도 하고 꿇기도 하면서 번갈아 사격할 수 있어서

화살이 빗발치듯한 정세를 조성하여 적들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두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우측에 위치, 64대의 전차로 구성,

전차마다 3명의 전사가 타고 있는데 1명은 어수(御手), 2명은 갑사(甲士)이다.

전차의 앞․뒤로 수행하는 예속 보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집중된 순 전차편대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중부에 위치, 전차․보병․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이 진은 19대 전차를 위주로 하고 260여명의 보병을 보조로 하며

동시에 8명의 기병을 후미로 하였는데 군진의 편성이 매우 원활하다.

 

마지막 작은 진은 곡형진의 좌측에 위치한 기병진으로

108명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를 보조로 하였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머리에는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으며 몸에는 흉부와 배부를 보호하는 짧은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었는데 날렵하게 보인다.

전마는 피둥피둥 살이 찌고 안장과 다래가 비치되어 있다.

이런 기병들은 전쟁판에 뛰어들기만 하면 행동이 번개처럼 빠르고

동작이 선풍처럼 날쌔며 불의에 출격하여

적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하고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을 넘나들며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리는

신기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

 

 

3호 갱(군막: 지휘소) :

3호 갱은 1호 갱 서단 북쪽에 위치, 1호 갱과 25m, 동쪽의 2호 갱과 120m 떨어져 있다.

총면적은 500평방미터도 안되는데 갱 안의 면적은 가장 크고 병용이 제일 적다.

 

토용 66점, 전차를 끄는 토마 4필, 목제 전차 1승이 출토되었다.

갱 내의 무사용은 전투대형에 따라 편성된 것이 아니라,

남북 2개 곁채에 분포되어 있는데 손에 의장병 병기인 동수(銅殳)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지휘관을 보위하는 경위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 갱에서는 또 제사․기원을 위한 살생후의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3호 갱이 보통 군진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일컫는 ‘군막(軍幕)’,

즉 현대인이 말하는 사령부의 소재지임을 알 수 있다.

 

 

 

*** 중국고대 사회에서의 군대를 좌, 중, 우 또는 상, 중, 하 3군으로 편성하는데

진나라 때에도 역시 이러하였다.

진나라 병마용 갱의 배치를 총괄하면

3호 갱의 지휘부, 1호 갱은 오른쪽에 있는 우군, 2호 갱은 왼쪽에 있는 좌군이다.

 

그러면 중군은 어디에 있는가?

고고학 탐사에 의하면

원래 1호 갱 중부 북측과 2호 갱 서측 사이에 또 용 갱이 하나 있었다.

이 갱은 형상이 규격에 맞고 깊이도 다른 3개 용 갱과 같다.

다만 갱내에 토용, 토마와 기타 유물이 없고 침적토에 의해 메워져 있어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이 빈 갱이 바로 건설을 계획하였던 중군이었는데

진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진왕조가 신속히 붕괴됨에 따라

미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견해다.

당시 진나라의 “병사 100 여만, 전차 1,000 여승, 전마 1만 여필에 달한다”는

3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생경하게 반영하였다.

 

 

현재 발굴된 진나라 병마용 갱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미 검, 창, 극, 긴 창, 쇠뇌, 수(殳), 화살촉, 금구(金鉤) 등 10여종의 병기가

출토되었고, 총 수량이 무려 3만여 점에 달한다.

 

진시황릉 속 건축물 발견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秦始皇)의 능 안에
높이 30m의 건축물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산시(陝西)성 고고학연구원 돤칭보(段淸波)는 전자파 등을 이용해 탐측한 결과
높이 50m의 진시황릉 안에 높이 30m, 동서 168m, 남북 142m에 이르는
커다란 구조물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건축물은 진시황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하 궁전의 상부에
흙을 다져 만드는 방식으로 축조돼 있다"며
"각 층은 약 3m에 이르는 계단형으로, 벽을 쌓아 올려 만든 모양"이라고 말했다.
"진시황의 영혼이 밖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구조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구조물 상단부에서는 많은 기와 조각이 발견돼
축조 당시에는 지하궁을 덮은 누각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돤 연구원은 "발굴을 할 수 없어 원격감지기로 확인했다"며
"건물 전체가 봉토 안에 묻혀 있어 전체적인 윤곽은 더 조사해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대 왕릉에서 이런 고층 구조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앞으로 이런 건축양식을 '진시황릉식'으로 명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산시성 시안(西安) 근교에 있는 진시황릉의 봉분은
동서 345m, 남북 350m, 전체 둘레가 1390m에 이른다.
지하에 대량의 부장품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은(水銀)강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국 당국은 문화재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아직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진시황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통일 뒤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정책을 추진했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 등 거대한 토목 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력을 낭비하고 분서갱유 사건을 비롯한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은 진시황이 기원전 210년 사망하자,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그의 제국은 급속히 무너졌다.
 ===>  2007년 7월 2일, 중앙일보 기사
 
 
 

[횡설수설/ 허승호] 산시 省

 

 

 

중국의 현재 수도는 베이징(北京)이지만

중국 왕조가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삼은 곳은 시안(西安)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을 비롯해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완성한 한(漢), 서역 교역을 통해 중국을 세계 국가로 만든 당(唐) 등 14개 왕조가 1100년 동안 이곳에서 번성했다.

 

우리에게는 옛 이름 장안(長安)이 더 익숙하다. 시안을 성도(省都)로 하는 산시(陝西) 성은 하(夏) 은(殷) 주(周)로 이어지는 황허(黃河) 문명의 발상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9일까지 ‘산시성 문물 특별전’이 열린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석궁수(石弓手) 병마용이 전시장 입구를 지키고 있다.

8000여 개의 병마용 가운데 채색이 가장 잘 보존된 10점 중 하나로

이번에 귀한 걸음을 했다.

함께 출토된 청동거위도 선이 유려하고 생동감이 뛰어난 걸작이다.

당삼채(唐三彩) 낙타도자기는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세계화 거점도시였던

7∼9세기 장안의 당당한 자신감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이렇게 잘 보존된 당삼채는 세계적으로 드물다고 한다.

 

 

 

▷진귀한 유물들이 나들이할 수 있었던 것은

산시 성 정부가 워낙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시 장소만 제공해 달라”며 유물 대여료는 물론 보험료, 운반료까지

모두 중국 측이 부담한 덕에 입장료도 공짜다.

사실 이번 전시회는 내년 베이징 올림픽 관광객을

비행기로 1시간 반 거리의 시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면밀히 기획된 ‘미끼 상품’이다.

그래서 전시회 안내문에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관광은 시안으로’라고 씌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달까지 ‘중국 국보전’이 열렸고

그 전시품 325점 중 65점이 산시 성에서 왔다.

산시 성 측이 “기왕 유물을 보낸 김에 산시 성 특별전을 따로 열고 싶다”며

더 귀한 소장품 30여 점을 추가로 보내온 것이다.

산시 성뿐 아니라 중국의 다른 지방 정부들도

한국인 관광객 유치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관광자원이 풍부한 중국이 저렇게 애를 쓰는데,

우리는 여행수지 적자가 거듭 기록 경신을 하는 데도 태평하기만 하다.

 

- [동아일보   2007-09-07]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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