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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 河西, 세상으로 나오다 -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

Gijuzzang Dream 2007. 11. 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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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

 

전시기간 : 2007.9.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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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 - 하서, 세상으로 나오다> 특별전으로

2001년 울산김씨문정공대종중에서 기증한 31점의 기증유물을 토대로 기획하였으며,

보물로 지정된 필암서원 소장유물 등 70여 점도 함께 선보인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동국18현 가운데 유일한 호남 출신이다.

 

김인후는 군신의 절의를 지킨 의로운 선비이며,

산림은거(山林隱居)와 학문 정진은 당대 선비들의 모범이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의 유학자들에게 학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면앙정 송순의 문인이고, 송강 정철의 스승이기도 하다.
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나 미암 유희춘 등 당대의 문장가들과는

사돈지간으로 학문과 교분을 나눴다.

 

하서는 성리학의 최대 화두인 理와 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극(太極)에 관한 이론을 그림으로 그린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한 도학자였다.

특히 하서는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논변(四七論辯)'을 펼침으로써 조선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고봉 기대승(전남 광산 출신)의 학문에 자양을 공급한 유학자였다.

 

"율곡의 붓 아래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石潭筆下無完人, 石潭은 율곡의 또다른 호)".

그렇게 인물을 평함에 인색하기 짝이 없던 율곡조차도 하서 선생을 평하여

'淸水芙蓉 光風霽月(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 온 뒤의 달)'이라 할 정도였다.

 

우암 송시열은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 가운데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데 하서 선생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하서는 또한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계산풍류(溪山風流)를 노래한 1500여 수의 시문을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특별전은

1부 '김인후의 가계와 출사'   2부 '인종과의 만남'   3부 '조선성리학과 하서'

4부 '선비정신과 시 세계'     5부 '하서와 필암서원'   6부 '하서의 문묘배향'

7부 '하서와 호남유학' 으로 구성되며 100여 점의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1부 / 김인후의 가계와 출사

김인후의 아내, 아들, 손자가 받은 교지와

9세에 복재 기준(服齋奇遵, 1492~1521)에게 받은 붓을 중심으로

장성에 뿌리를 두게 된 연유와 어린 시절부터 출사 이전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2부 / 인종과의 만남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이 세자 시절

스승이던 하서에게 '묵죽도'를 직접 그려 하사했는데,

하서는 그 그림에 군신의 예로 시를 썼다.

 

"뿌리 가지마다 잎 모두가 정밀하고 은미해

돌을 벗삼은 굳은 정신 화폭 안에 들어있네.

비로소 성인의 정신이 조화롭다는 걸 알았으니

세상과 한 덩어리 되어 서로 어김없으리라."

 

김인후의 일생을 결정하게 한 인종과의 만남, 군신간의 신뢰와 절의의 의미를 조명한다. 

 

3부 / 조선 성리학과 하서

관직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하서 김인후를 살펴보면서

그가 이룬 성리학적 업적,

즉 하서 천명도(天命圖, 우주만물의 성정을 표현한 그림)를

정지운(鄭之雲), 퇴계 이황의 천명도와 비교하면서 집중적으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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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선비정신과 시세계

김인후는 평생 1500여 수의 시를 남긴다.

<수운당>, <낙성당>, <풍수당> 등 자연과 우정, 의리, 효 등을 소재로

많은 시를 쓴 시인으로서의 김인후를 만나 본다.

 

5부 / 하서와 필암서원

하서의 학문적 세계와 선비정신을 기리는 필암서원의 기능과 역할을

보물 제587호인 필암서원 문서 일괄을 통해 알아본다. 

전시유물은 총 14책 64매로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교관과 수강생들의 명단을 담은 ‘보강안’,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서재유안서’ 등이다.

 

특히 필암서원원적()은 모두 4권인데, 1-3권은 유생들의 명부이며,

4권은 필암서원의 사유재산을 기록한 문서로 

조선 중기 필암서원의 재정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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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 하서의 문묘배향

하서 김인후는 문묘에 배향된 호남 유일의 선비이다.

교서와 교지 등을 통해

전라도 유생 양학연이 하서 선생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비롯,

정조 때 내린 문묘배향을 결정하는 교서와

정조가 하서의 시호를 문정공으로 추증()한 교지 등을 통해

문묘종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본다. 

 

7부 / 하서와 호남유학

하서 김인후의 문인과 후학들의 영향관계를 정리해 본다.

 

일생을 절의로 일관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탄신 500주년에 가까운 지금,

선비 김인후의 올곧은 절의정신(節義精神)은

필암서원으로 이어져 호남유학(湖南儒學)의 산실이 되었으며,

호남정신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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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를 기리는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 - 하서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기효간, 변성온, 변이중 등 호남유림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

1597년(선조 30) - 정유재란때 병화로 소실

1624년(인조  2) - 황룡면 증산동에 복설

1662년(현종  3) - 필암서원 사액

1672년(현종 13) - 수해로 인해 오늘날의 위치인, 필암리로 옮겨 세움(移建)

1786년(정조 10) - 하서의 수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3-1594)을 추가배향

1796년(정조 20) - 김인후의 문묘배향(文廟配享)과 더불어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으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면한 지역의 유일한 서원이다.

 

 

영남의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호남의 큰 선비 하서 김인후.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0년 되던 해 동궁(훗날 인종)에 대화재가 났다.

바로 그 해에, 아무도 조광조 등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거론을 못하던 때,

하서가 나서서 왕에게 군자의 道를 전언했다.

 

"예로부터 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그러나 중종이 이 상소를 흔쾌히 윤허하지 않자

하서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니 옥과현감이 제수되었다.

그 뒤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만에 승하하자 실성통곡하였다고 하며,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1일이 되면

그가 태어난 맥동마을 앞 난산에 올라 북망통곡(北望慟哭)하였다.

필암서원에서 가까운 곳 황룡면 맥호리에는

김인후선생이 매년 인종의 기일 망곡한 것(망곡단)을 기리기 위해

1843년(현종 9)‘김인후 난산비(卵山碑)’를 세웠는데

이 비로 말미암아 하서의 행적과 정신을 알 수 있으며

국상(國喪)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인종을 뒤이어 경원대군(慶原大君)이 명종(明宗)으로 즉위하였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1545년 겨울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였는데

명종 재위 중에 여러 차례 소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교리로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내키지 않는 길을 떠날 때 그는 술을 여러 말 준비해 가지고 떠났다.

길을 가면서 대나무 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쉬엄쉬엄 가다 가다 하다가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언어로는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간신의 화를 입은 인종을 위한 절의를 지켰던 것.

심지어 임종 무렵에는 을사사화 이후의 관작은 사후에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뒷날 효종은 세자 현종에게

"밖에서 보면 하서의 행동이 인종과 문정대비를 이간하려는 것으로 보이나

진실한 충성이었다"고 깨우쳤다 전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하서는

전북 순창에서‘훈몽재’라는 서당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강학을 전개한 이후

장성에서 타계하기까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오직 성(誠), 경(敬)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 외에도 천문, 지리, 율력에 밝아 주역관상편을 비롯하여

여러 저술과 시문집인 하서집을 남기고 있다.

 

필암서원 장판각에는

김인후선생의 문집인 하서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비롯,

인종이 하사한 어필묵죽도 등 1,300여권의 책과

보물 587호인 노비보(奴婢譜) 등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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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는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는데

하서선생 사후 8년만인 선조 1년(1568)에 처음 간행되어

숙종 12년(1686) 중간본과 1797∼1802년에 걸쳐 세 번 간행되었다.

초간본 목판 1매, 중간본 목판 258매, 세 번째의 목판 391매, 총 650매이다.

 

한편, 필암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하서선생 목판 일괄은

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천자문 18판, 해자 무이구곡 18판, 백련초해 13판, 묵죽도 3판, 유묵 4판 등

목판으로 모두 56판이다.

 

'해자무이구곡' 18판,

'초천자문(草千字文)' 18판 - 안진경체에 바탕한 김인후의 초서체 글씨는

                당시 성리학자 특히 호남 학자들 사이에 전형적인 모범 글씨였다.

'백련초해(百聯抄解)' 13판 - 100가지 싯구를 한글로 해석한 것인데,

                           『백련초해』한글판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섰다.

'유묵' 4판 - 선조 1년(1568) 초학자의 학습을 위하여 매 글자마다 음을 달고

             뜻을 풀이하여 새겼으며,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墨竹圖)판 3판 - 선조 1년(1568)과

                   영조 46년(1770)에 새긴 것으로 인종의 판체인 묵죽도판은

                   판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그 외 '필법(筆法)' 등 판각들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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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암서원에 최근 도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6년 2월 2-6일 사이 관리인이 어머니의 수술 때문에 서원을 비운 사이

필암서원에 전시중이던 목판 3점이 도난당했던 것이다.

난된 목판은 하서유묵목판(河西遺墨木板) 56점 가운데 3점으로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조선조 선조 1년(1568)과

영조 46년(1770)에 가로 70㎝, 세로 100㎝크기의 목판에 각각 새긴 것이다.

목죽도 원본 그림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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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연루(廓然樓)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

필암서원(筆巖書院) 편액은 병계 윤봉구의 글씨

경장각(敬藏閣) 편액은 정조 어필

본래 진원현(珍原縣)의 객사(客舍)였는데 1672년 옮겨온 청절당(淸節堂)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

동재인 진덕재(進德齋), 서재인 숭의재(崇義齋)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 글씨

사묘인 우동사(祐東祠)의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우동사 북벽(중앙)에 하서 김인후 선생,

동벽(왼편)에 고암 양자징을 배향(配享)하였는데,

이곳 외에 남원 노봉서원, 옥과 영귀서원 등에도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였다.

매년 4월에는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 김인후와 계회도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중인 이 계회도는 종이에 채색, 104.5× 62㎝ 크기이다.

 

  - 아래는 계회장면의 일부분 광경.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는

1531년(중종 26)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장성의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비롯한 7인이

1542년(중종 37) 즈음에 다시 모여 옛 정을 나눈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계회도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맨 위에 계회의 이름을, 중앙에는 모임의 장면,

아래에는 참가자 이름과 자와 호, 본, 관직 등을 기록한 좌목과 그 좌우에 묵죽과 묵매를 그리고 있다.

 

위쪽 여백에

"겨를을 틈타 모쪼록 좋은 강산을 향하여 서로 쫓아 잠시 세속의 굴레를 벗어났으니

술잔 앞에 우스개 소리나 늦추지 말게나."라고 그날의 정황을 김인후는 시를 지어 적고 있다.

 

 

 

  ******* 소쇄원과 하서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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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1519)와 을사사화(1545)가 계기가 되어

도학과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을 기본덕목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논리로 확립한

호남사림을 중심으로 특별한 문화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담양군 남면 일대, 광주호 상류부근은 무등산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별뫼(星山)를 중심으로 식영정과 서하당, 소쇄원과 환벽당 등이

그들의 활동무대가 된 것이다.

 

하서 김인후는 이곳 담양 정자문화권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소쇄원 1세대 : 양산보, 송순, 김인후, 임억령, 김윤제

星山四仙 :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우리나라 전통 원림(園林) 소쇄원(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은

양산보(梁山甫, 1503∼1577)의 별서정원이다.

소쇄원의 광풍각은‘마치 물 위에 떠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열어젖히는’곳으로

손님의 공간인 사랑채와 같으며,

양산보의 벗이며 사돈이었던 김인후와 같이 친근한 장기 투숙객이 기거했다.

양산보의 둘째아들 고암 양자징(梁子澄)과 김인후의 둘째딸이 혼인을 맺었던 것.

그러나, 그 딸이 요절하고 홀로 남겨진 사위 양자징과 술로 벗하며

애틋한 연민의 정을 나눈 장인이었던 김인후,

김인후는 사돈 집이었던 소쇄원을 너무나 사랑하여

한 번 소쇄원에 오면 돌아갈 일을 잊고 독서와 토론에 빠졌는데

연못의 물고기조차 그를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아예 광풍각에서 10년을 생활하였다고 한다.

 

흔히, 소쇄원을 조성한 사람은 양산보이지만,

이 소쇄원의 가치를 더욱 높인 사람은 하서 김인후라고 한다.

하서는 소쇄원의 경관을 읊은 <소쇄원 48영>을 남겼기 때문이다.

 

소쇄원 입구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쪽 담에 '애양단'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있는데,

겨울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세운 단으로,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기 때문에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孝의 공간 상징이 되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 48가지를 노래한 <소쇄원 48영>의 詩들을

목판에 써서 입구에서부터 애양단까지의 직선 담장에 붙여 놓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애양단의 겨울낮(愛陽冬午)' 에서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노래했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평소 도연명을 존경하여

도연명이 했던 그대로 동쪽 담 아래에 국화를 심었다는데

역시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의 제27영에도

'동쪽 울타리아래 국화를 심었는데 점점이 핀 형국이

늦가을의 풍상과 잘도 어울린다'는 대목이 있다.

현재는 애양단 앞에 동백나무가 심어있다.

 

늦가을인 딱 요즘, 지금쯤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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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7영: 절벽에 흐트러진 소나무와 국화 (散崖松菊)

           북쪽의 고개는 층층이 푸르고          北嶺層層碧

           동쪽의 울타리는 점점이 노랗네.       東籬點點黃

           녹색의 벼랑에는 갖가지 나무가 있으니 緣崖雜亂植

           늦가을의 풍상에도 여전하구나.        歲晩倚風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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