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왕들보다 그 모습이 유달리 많이 남겨져있는 고종황제의 표정만큼이나
특별전에서 초상화로 보여지는 운현궁家의 모습은 깊은 생각들을 하게 만드네요.
고종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운현궁家, 황실의 위상들, 조선과 대한제국. . .
▲ 유화와 입체적 표현 등 서양화의 기법과 재료가 선보이며
고종의 모습을 담아낸 서양화가들이 있습니다.
(1)
일본을 거쳐 1890년 12월말 조선에 도착한
영국인 화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Savage Landor, 1865~1924)는
1891년 1년동안 조선의 풍경과 사람을 유화 및 수채화로 그렸고,
조선체험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30여점의 조선그림을 수록했다고 합니다.
당시 아주 빠르게 또 실물과 똑같이 잘 그리는 서양화가에 대한 소문이 궁중에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고종 어진과 민영환 등 중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새비지 랜도어는 그의 저서가 1999년 번역 출간되면서 비로소 알려졌지만
국내 최초의 본격 유화라 할 만한 작품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2)
1999년에 새비지 랜도어가 알려지기 전까지, 국내에 처음으로 많이 알려진 서양화가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입니다.
1899년 서울에 왔던 보스는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등신대 입상을 유화로 그렸고,
경복궁과 광화문을 바라보고 그린 ‘서울풍경’도 남깁니다.
보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본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 사실성에 대단히 만족하였다고 합니다.
덕수궁 소장품인 보스의 그림은 화재로 불탔지만 화가의 후손이 보관해온 한국관련 그림 3점이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기념 ‘구한말 미국인 화가가 그린 고종황제 초상화 특별전시’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대여 전시되었는데, 후손이 소장해온 한국 관련 그림 3점중 1898년에 그린 ‘고종초상’ 과
‘민상호 반신상’ 은 뉴욕 경매를 통해 한국인 컬렉터가 사들였고,
‘서울풍경’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해 2003년 재공개되기도 했습니다.
". . . . 일본인들은 한국미술의 모든 건축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 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 . . .
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황제가 보신 후 저는 황제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 . . .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픔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휴버트 보스)"
- 미술세계 2002년 11월호에서
서양화가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그린 고종 초상화에서
서양화가인 석지 채용신은 서양화기법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한편, 1900년을 전후하여 새롭게 정착된 서양식학교 제도의 교과 과목 중의 〈도화(圖畵)〉는
바로 서양화법을 따른 것입니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한양에 와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의 전신상(全身像)을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묘사의 유화로 그린 일은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인데,
그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정상적 서양화법의 접촉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인 서양화가의 탄생은 1910년대 고희동이 동경의 미술학교에 유학한 뒤
이어 오지호(吳之湖) · 길진섭(吉鎭燮) 등이 등장 하면서부터입니다.
<서울 풍경>. 휴버트 보스가 1898년 초봄에 그린 작품.
지금의 정동에 있는 미공사관 쪽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것으로
보스는 1911년 친구에게 보낸 자서전적 서한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한국은 가장 흥미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 꿈같은 호숫가에 정말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그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인종 중의 하나로
늘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조용히 걸어 다니지만 . . . . "
(3)
32.5×25.0㎝의 이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드 라 네지에(J. D. La Neziere)가 1902년 그린 것으로
1903년 발간한 <극동의 이미지 (L'EXTREME-ORIENT EN IMAGES)>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황제' 고종의 인상에 대해
"우아하고 선량하며 성격도 쾌활하며 영리하다"고 했습니다.
극동지방의 민속을 만주족, 한민족, 일본으로 나누어 일러스트기법으로 수록한 책이
<극동의 이미지>인데,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청색이 중국의 색이라고 한다면 흰색은 한국의 색이다.
조선의 고유 의상에서는 생동감이 넘치는 백옥 같은 밝은 흰색부터
광목처럼 거칠고 투박한 흰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흰색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조선의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흰 옷 물결이 만들어 내는 조화는
마치 음색의 향연 그 자체인 것이다. 앞으로 세계정세 속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라도
조선민족은 영원토록 백색제국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드 라 네지에, 1902)"
(4)
한편, 고종황제 사진을 처음 촬영한 사람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ㆍ1855~1916)입니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기행문 <조선(1885)> <극동의 정신(1888)>을 발표하여 '미지의 세계'를 서양에 알렸습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25년이나 지내면서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에 사재(私財)로 로웰천문대를 세운
로웰은 화성을 관측하여 화성의 운하가 양극의 얼음에서 나오는 물을 적도 근처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또한 화성인들은 인류보다 역사가 긴 진보된 종족이라고 생각했고,
계절에 따라 화성 표면의 색깔이 변하는 부분은 식물들이 성장하고 시들기 때문이라고 믿었답니다.
한편 해왕성 바깥에 X-행성이라는 "제9의 행성"의 존재에 대해 탐색하였으나,
그의 사망 14년 뒤 제자였던 클라이드 톰보가 1930년 명왕성(冥王星)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인이 발견한 최초의 행성에 대해
미국에서는 열한 살 소녀 베네시아 버니가 제안한 ‘Pluto’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하의 신, 즉 명부(冥府)의 왕(王)이라는 뜻으로,
퍼시벌 로웰을 기리기 위해 앞 두 글자를 딴 이름이랍니다.
퍼시벌 로웰은 동양의 신비에 매혹당해 극동의 언어와 풍속을 배우기 위해
주일외교대표로 일본에 10년간 체류했는데,
체류기간 도중인 1883년 8월, 한미수교조약이 성립되면서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파견되는 조선의 수교사절단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1882, 조미수호통상사절단, 앞줄 왼쪽이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뒷줄 유길준)
그리고 임무를 마친 일행을 다시 미국에서 일본까지 인도한 후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귀국하는 사절단과 함께 조선에 왔습니다. 그때가 1883년 12월.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제의 환대를 받으며 국빈으로서 그해 겨울을
조선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기행문을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412쪽으로 펴냅니다.
원제는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가장 완벽한 한국에 대한 보고서이자 소개서였으며,
외국인의 시각에서 조선 말기의 정치, 경제, 사회, 지리 등 문화 전반을 그린 가장 오랜 글이자
가장 세밀한 기행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천문학자 조경철씨에 의해
2001년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지요.
△ 로웰이 본 서울 모습들에 대한 표현
“. . . . 완벽하게 어릴 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동화 같은 모습, . . . . "
". . . . 조선인들의 흰옷과 느리고 우아한 움직임은 잠시나마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 . . . "
“. . . . 타인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고종황제 . . . . "
“. . . . 투명한 유리창이 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한지와,
예술적인 면에서 경탄을 금치 못할 의복기술인 옷고름. . . . "
“. . . . ‘모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조선에 보내는 찬사가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 . . . ”
". . . . 규격에 맞춘 번듯한 이정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조선의 이정표에 신기함마저 느낀다.
또한 모퉁이를 돌자마자 불쑥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과 마주칠 때면 깜짝 놀랄 뿐 아니라
그 표정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 . . . " → 이 '이정표'는 바로 장승을 말하는데
로웰은 이 장승을 '극악함이 최고에 달했던 흉악범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네거리에 그의 초상을 내다 걸었다는 것'이라고 표현.
△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부분
" . . . . 서울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왕을 알현하는 일이 고위 관리들일 경우에는 그리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나
왕이 미국인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의 경우 그것은 이 나라에서 모종의 사건과도 같았다. . . . . . .
누각은 완전히 트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건물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탁자를 앞에 둔 채 한가운데에 왕이 앉아있었고 그 뒤로 네댓 명의 관리가 서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 이르자 홍영식은 얼굴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바닥에 엎드렸다.
조선인들이 왕 앞에서 행하는 부복(俯伏)이었다.
홍영식이 부복하는 동안 영사와 나는 연속되는 세 번의 절 중에서 첫 번째 절을 시작했다.
절을 하며 나아가기를 되풀이해 마지막 절이 끝났을 때는 왕 앞의 탁자에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왕은 우리를 접견하려고 일어섰는데 약 서른 살 가량의 나이에
키는 조선인의 평균치보다 좀 작아 보였다.
1인치쯤 커 보이게 하는 신을 벗는다면 5피트 7인치 정도 될 성싶었다.
왕의 의복은 대체로 관리들이 입은 궁중복과 유사했으며 부분적인 장식만 달랐다.
모자는 관리들의 것과 비슷했으나 그들 것이 검정색인 반면 왕의 모자는 짙은 청색을 띠었다.
겉옷 역시 관리들의 옷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으되, 색깔은 밝은 적색이었다.
조선에서는 적색이 왕을 나타내는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띠 역시 장식은 화려했지만 형태는 다른 것과 유사했다.
가슴 장식으로는 학이 아니라 중국에서처럼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왕의 첫인상은 무척 호감을 주었다. 그의 웃음은 특히 타인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왕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나는 그가 비록 격식상 한 말이었지만,
진실로 이날의 만남을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알현하는 동안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으나
꼭 오랜 만남이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자리였다. . . . . . .
우리에게는 왕자를 알현하는 일이 또 남아 있었다. . . . . . . .
왕자는 왕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은 채 우리를 맞았다. 그는 열 살 정도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왕자로서의 격리된 궁중생활과 강요된 위엄은 그를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으며,
부친에게서 느껴지던 조화의 미는 결여돼 있었다.
그러나 아직 청춘을 모르고 성년에 도달하지도 않은 어린애에게서 그런 흠을 잡아낸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왕자의 복식은 모자, 겉옷, 허리띠, 가슴 장식 등이
모두 왕의 차림과 유사했으며 신발도 낮은 것이었다.
옷 색깔만 달랐는데 그의 옷은 왕의 옷보다 색이 엷은 적색이었다.
엄한 궁중생활로 표정을 잃어버린 듯, 그는 시종 의무적인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안색은 유난히도 핏기가 없어 보였는데, 나중에야 호분(胡粉)을 썼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극동지방에 흔히 있는 관습이기도 했다.
왕자의 눈은 동양인 중에서도 가느다란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반쯤 졸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두 명의 키 큰 대신이 뒤에 서서 허리를 굽혀가며 그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석상처럼 앉아서 신하들의 귓속말을 받아 어린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다.
무언가 묻고 나서 대답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은 흡사 권위와 무력(無力)이 혼합돼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창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왕자는 거의 번개같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뜰을 가로질러 돌아가는 일행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로써 모든 일정이 끝이 났고
우리는 곧 궁을 출발해 다시 한 번 넓은 바깥뜰을 지나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 . . . . .
-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 내용 중에서
(5)
한편, 고종황제의 모습은 유화그림으로, 사진으로 남겨져 있지만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년 8월 27일자에 삽화로 남겨져 있기도 합니다.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조선에 온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특파원들이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단상 왼쪽이 고종이고 오른쪽은 황태자(순종),
단 아래에서 특파원을 대표하여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빌리어스 기자가
명함을 건네주고 있는 모습인데 명함을 받는 군복입은 사람은 시종 무관장일 거라네요.
▲ 사진 속에 재현된 대한제국 황제의 표상
고종은 임금 중 가장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를 남긴 왕이다.
현존하는 이미지들과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고종의 초상은 왕실행사의 차원에서 이뤄진 전통적인 御眞뿐 아니라
채용신, 휴버트 보스, 조셉 드 라 네지에르 등이 제작한 다양한 초상화들이 있으며
그밖에도 외국인 촬영 사진이나 삽화들이 상당수 전한다.
한편에서는 권력의 강화를 위해 어진 전통을 재창출시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진이나 판화, 삽화 등의 복제된 이미지들에 의해 어진의 신성성이 해체되었던 상황은
근대로의 전환기에 시각문화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권 박사는 상상속의 조선의 왕이 중국왕의 모습으로 외국인들의 책에 삽화로 등장하다가
1880년대 사진으로 제작되어 유포되기 시작해 대한제국기에 다양하게 찍혀진 모습을 찾아나간다.
대한제국기 고종황제의 사진들은 정말 많은데 대부분 서양인의 시선에 포착된 것이다.
당시 개화파, 일반 대중, 고종 자신의 정치적 입지 속에서 외부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표상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충군애국 담론을 이끌어내는 시각적 수단으로써 기능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론은 이렇다. 사진찍기를 싫어하고 복식의 서양식 개조에도 부정적이었던 메이지 왕에 비해
고종은 초상제작에 직접 개입하거나 적극적으로 사진기 앞에 섰다.
고종의 초상은 정면상과 화려한 전통적 왕의 상징물들과 근대적 상징물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전통적 황제상을 더 강화시키고 있었다. 왕의 초상의 복제와 대중적 유포, 미약하지만
그것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개화파나 고종의 인식 같은 예들은
근대 초기 새로운 시각매체의 유입양상을 보다 내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국내 인쇄술이나 사진술, 대중매체의 발달이 원활하지 않아
고종사진을 통한 정치적 담론의 형성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
고종이 전통적인 어진의 상징적 기능을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는가는 또 다른 논의의 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고종시대는 사진으로 왕의 초상화의 전통성이 급격히 변용된 시기이자
그 전통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된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고종시대가 어진의 전통적 기능이 소멸하고 대신
새로운 매체들의 새로운 기능이 등장하는 시기가 아니라
어진이라는 의미와 기능의 외연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기능이 부가된 시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권행기 홍익대 강사,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6집, 2006, 한국근대미술사학회
- 권행기 홍익대 강사, 근대적 시각방식의 수용과 인식체계의 변화/ 고종의 초상, 2004, 국립현대미술관
-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이구열, 2005, 돌베개
- 이상, 기주짱 정리
'더듬어보고(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고종황제 가족사진 '조작'됐다 (오마이뉴스) (0) | 2007.11.04 |
---|---|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고종황제 가족사진, 이것이 궁금하다 (0) | 2007.11.04 |
서울역사박물관 - <헬로 사이언스터널에세이북> 출간 (0) | 2007.11.03 |
서울역사박물관 - 사이언스 터널 특별전(관련 기사) (0) | 2007.11.02 |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사이언스 터널 리플렛 (0) | 2007.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