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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실학, 실학자들 4] 실학의 천재 실학자 - 연암 박지원

Gijuzzang Dream 2008. 6. 15. 13:32

 

 

 

 

 

[경기실학, 실학자들]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 ‘유쾌 · 통쾌’ 천재 실학자

 

 

 

자유롭고 거침없던 ‘일침’ 200년 지난 지금도 ‘뜨끔’

‘무엇 때문에 같으려 하는가? 같음을 추구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夫何求乎似也, 求似者非眞也).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집권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단편소설(허생전 등)이나 기행문(열하일기)을 쓰며,

양반신분에 걸맞지 않는 일에 몰두했다.

다산 정약용이 500여권의 방대한 실학 이론서를 집필하고, 후대 학자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면,

연암은 소설과 산문을 통해 풍부한 해석거리를 제공하며 현실비판적인 다양한 텍스트를 던져주고 있다.

 

 

 

 

 

■ “경제가 넉넉해야 정치도 있다”


이용후생(利用厚生) :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 · 식 · 주생활을 뜻하는 용어.

이용과 후생은 국민의 풍요로운 경제 생활을 말한다.

즉 당시의 주류였던 윤리 우위의 정치가 아니라 경제 우위의 정치를 부르짓는 말이다.

18세기 후반에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 실학자들이 주장한 이념.


한국의 셰익스피어
허생전 등 해학과 비판 돋보여 문학 통해 실학 전파 ‘천재학자’


◇ 문학세계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연암이 활동하던 조선 후기는 우리나라 한문학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다.

특히 연암은 소동파나 한유 등 중국 산문작가와 어깨를 겨룰 만큼 자유분방한 문체를 구사했다.

이미 10대 후반 천재성을 드러낸 연암은

‘마장전’, ‘민옹전’, ‘광무자전’ 등 9전(九傳)에 해당하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9전이 청년 연암의 예리한 비판의식과 풋풋한 감수성을 담았다면,

30대 쓰여진 산문은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이와 성찰이 돋보인다.

 

연암은 지독한 가난과 어머니 등 가까운 가족과의 사별,

지배 질서에 벗어난 소외된 지식인으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펼치기 시작한다.
‘큰누이 묘지명’이나 ‘술에 취하여 운종교를 밟는 일을 기록한 글’ 등에서

당시 연암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중국 여행기록문인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사대부의 허위의식과 편견 등을 조소하며,

주체적인 입장에서 중국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 연암의 문학에 푹 빠진 에마뉴엘 페스트라이쉬 미국 일리노이주 파크랜드 대학 교수는

양반전과 허생전, 우상전 등 10여편에 대해 영문번역을 기획하기도 했다.


지난해 연암 서거 200주기를 맞아 학계에서는 국제학술대회와 연암집 국역 발간 등을 추진했다.

특히 한국실학학회 등이 주관한 ‘18세기 조선, 새로운 문명기획’이란 국제학술회의는

연암을 ‘근대를 지향한’ 인물로 평가했으며,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는 ‘근대 문명의 기획자’로 지칭했다.

 

 


시대변혁 추구한 백탑파
연암 중심의 북학파 주축들 ‘개혁꿈’

◇ 백탑파

연암은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 · 지금의 파고다공원) 부근에 이사한 후

인근의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등과 교류했다.
연암의 주도아래 모임을 형성했고, 백탑 근처에서 시문을 공부하고 경세를 논하며

자연스레 백탑파를 형성했다.

백탑파의 별칭이 연암파인 것을 감안할 때 연암의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 같다.


연암을 중심으로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 백탑파 인물들은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던 북학파의 주축들이며, 이들 중 일부는 정조가 세운 규장각에 흡수됐다.

지난 2003년 출간한 김탁환의 추리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은

당시 젊은 지식인 그룹 백탑파와 정조, 기득권을 갖고 있는 관리들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시대 변혁을 추구했던 백탑파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열하일기, 위대한 기록
제도 · 문물 비판 담긴 문명비평서


 

◇ 열하일기

청나라 건륭황제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동반, 1780년 5월에서 10월까지 6개월간 중국땅을 다녀온 여행기다.

그렇다고 단순한 여행기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호질’이나 ‘양반전’ 등 소설과 함께 중국의 풍속 · 제도 · 문물을 소개하며,

조선의 제도 · 문물에 대한 비판이 실린 당시 문명비평서이기 때문이다.


외부시선으로 인간 내부를 들여다보며 현실을 풍자한 ‘호질’ 등에는

위트 넘치는 패러독스와 지전설, 지동설 등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200여 년 전 쓰여진 열하일기는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예를 들어

청나라 황성과 열하의 행궁에서 본 코끼리 이야기 ‘상기’(象記)는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나

실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 얼마나 하찮고 허망한지 담고 있다.

또 ‘눈뜬 장님편’은 서구 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우리 학계의 상황과 견주어 볼 만하다.

열하일기 출간 이후 당시 보수적인 소화의식에 젖어 있던 지식인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1792년 연암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짓도록 명했다.

변혁과 개혁을 추구했던 정조가 이 씁쓸한 명을 내렸을 때 심정은 그리 편치 않았을 것이다.

 

 

 

 

 

■ 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18세기 수원에 근대적 농장… 농업개혁 주인공

 

“북학파의 선봉장 연암은 자신의 실학사상을 정책에 반영시켰던 대표적 실학자입니다”
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대다수 실학자들의 주장이 이론에 그쳤지만,

연암의 농업정책은 정조의 화성 건설과 함께 적극 반영됐다고 말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화성 그 자체가 실학의 결정체라고 말하는 유 교수는

“국가정책인 화성 건설과 함께 대규모 국영시범 농장이 수원에 건립됐습니다.

북둔과 서둔 그리고 인공저수지인 만석거와 서호가 그 근거”라고 말했다.

연암의 농업개혁서 ‘과농소초’는 그 토대가 된다.

수원에서 펼쳤던 실학정신은 근대적 영농의 시험장이이었다.

“대규모 인공저수지를 건립했고, 드넓은 국영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농업 임금노동자가 등장하기도 했어요.

여기다 중국 상해에서 우수한 벼품종을 가져와 품종개량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연암의 제자 서유구가 수원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 국영농장은 더욱 성장했습니다”


유 교수는 선진영농의 근거지인 수원이 최근 그 역사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서울대 농대가 수원을 떠났고, 농촌진흥청도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만석거는 30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단순한 공원으로 탈바꿈했다”며

“근대적 영농산업의 터전인 수원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농촌진흥청이 근대농업 100년을 맞아 대대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일제식민지 시절 권업모범장이 건립된 시점에 맞춘 것”이라며

“200여 년 전 화성 건립과 함께 혁신적으로 추진됐던 농업개혁이 근대농업의 첫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 경기일보 2006-6-15/ 이형복기자 bok@kgib.co.kr

 

 

 

 

 

 

 

박제가가 귀양 간 벗에게 보낸 편지

 

[박제가(朴齊家)가 서상수(徐常修)에게 보낸 편지]

 

 

“제가 궁벽한 골목에 살아 세상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백영숙(白永叔)이 사람을 보내 하는 말이 그대가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더군요.

황급히 사동으로 달려갔지만, 떠난 지가 벌써 나흘이라고 합디다.

제가 왜 즉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이덕무를 탓했더니,

이덕무는 당연히 알고 있을 줄로 여겨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아! 이미 이별하고 말았으니 다시 어찌한답니까?

무더위가 푹푹 찌는데 길은 어찌 가며, 판자집에 풍토도 다를 테니 어찌 자고 어찌 드시는지요?

오랑캐의 말씨와 털옷 입은 사람들 틈에서 무엇으로 소견하십니까?

 

저는 노모께서 해묵은 질환이 재발해서 형과 아우가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낮에도 띠를 풀지 못한 것이 20일이나 됩니다.

비록 조금 차도가 있기는 해도 남은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떠나실 때 손을 잡고 위로하며 보내드릴 수 없었고,

즉시 인편에 편지를 보내 객점(客店)의 안부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난날의 노님을 돌이켜보면 별처럼 쓸쓸하기만 합니다.

제가 백탑 아래로 갈 때 마다 꼭 아드님이 독서하는 것을 살펴보고 돌아오곤 하지만,

집이 멀어 자주 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다만 발 빠른 말 한 마리를 잡아타고서 육진(六鎭)의 산천을 가서 보고,

그대와 만나보고 돌아오고플 따름입니다. 하지만 망상일 뿐 소용이 없군요.

티끌세상과 떨어져 있어 그리로 가는 사람이 드물고 보니 편지도 부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슬 가운데 스스로를 아껴 돌보시기 바랍니다. 짧은 종이라 다 적지 못합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함경도로 귀양 간 관헌 서상수(觀軒 徐常修, 1735-1793)에게 보낸 편지다.

서상수는 나이가 박제가보다 15세나 위였지만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등과 마음을 나누던 벗이었다.

그런 그가 1774년 여름에 무슨 일인가에 연루되어 함경도 땅으로 귀양을 갔다.

 

백탑(白塔)시절 옹기종기 모여 살 때는 밤낮 몰려다니던 사이였는데,

당시 박제가는 이사를 가 있었기에 서상수의 귀양 소식을 제때 듣지 못했다.

뒤늦게 사동(寺洞) 즉 지금의 인사동에 있던 서상수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벌써 떠난 뒤였다.

그는 못 만난 원망을 괜시리 이덕무에게 퍼붓고 나서 위로편지를 썼다.

노모의 병환으로 꼼짝할 수 없었던 형편을 말하고, 함께 떠들썩하게 왕래하던 시절을 추억했다.

백탑을 찾을 때마다 사동을 들러 아들인 서유년(徐有年)의 공부를 점검하고 있으니

집안 일은 크게 염려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빠른 말을 얻어 훌쩍 달려가고픈 생각뿐이라는 대목에서 뭉클한 속정이 느껴진다.

 

박제가의 문집에는 이 편지에 잇대어 한 통의 편지가 더 실려 있다.

위 편지를 진작에 써 놓고 인편을 구하지 못하다가,

인편을 겨우 만나고 보니 시일 차가 너무 나서 다시 새 편지를 얹은 것이다.

 

그 중의 한 단락은 이렇다.

 

“북관의 진산(鎭山)은 백두산이니, 두만강과 압록강이 발원한 곳입니다.

자작나무가 대부분이고 비목어(比目魚)가 많이 납니다. 여자들은 삼을 잣고 남자들은 사냥을 하지요.

황원(荒原)과 물풀 사이로 야인(野人)들이 피우는 연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짐 실은 수레가 덜컹대며 지나가고 말떼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조선의 한 모퉁이건만 유독 그곳만은 중국의 풍속이 있습니다.

이천리 길을 떠나 나그네가 된 지 수 십일이니 고적과 명승을 많이 보셨겠습니다.

이 또한 성은이라 하겠습니다.”

 

-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 문화와나, 2008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