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살림살이 고스란히 도내 유일 행정일기 저술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를 살았던 서유구.
다산이 경학 연구 등을 통해 경세치용의 실학을 집대성했다면, 서유구는 박지원 · 박제가 등의 북학사상을 계승, 이용후생의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이 경학을 중심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면, 서유구는 백과사전식 실용서를 저술한 인물로 최근 부각되는 인물이다.
금경로(金莖露 : 이슬을 받기 위한 대야 ‘승로반’을 받치는 구리 기둥)를 얻은 것 뿐이겠습니까. 가랑비로 시작하여 끝내 세찬 비바람이 흽쓸고 지나갔지만 근심 할 바가 아니요, 높고 낮은 곳에 두루 흡족하게 내리어 양양(穰穰 : 곡물이 잘 결실한 모양)한 풍년을 좌계(左契 : 노자에 나온 말로 둘로 나눈 분신의 한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인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차조(?助 : 힘을 빌려서 도움) 권상의 절차를 이미 별도로 감결하여 신칙하였습니다.” 가뭄때문에 근심하던 터에 반가운 단비가 내렸고 잘 익은 곡식을 상상하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농사 인력의 부족을 근심하고 있다. 이 공문 후반부에는 우기에 내린 빗물을 이용할 것을 당부하고 때에 맞춰 모내기를 할 것과 게으른 농부를 엄중히 문책할 것을 담고 있다.
‘화영일기(華營日錄)’는 1836년 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수원유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기록으로 화영은 수원유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화성(지금의 수원)의 관청을 뜻한다.
조선후기 사회사와 풍속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특히 권농에 힘쓴 서유구는 지방 농촌 및 농민을 위한 정책을 소상히 담았다. 화영일록 1836년 2월1일자(음력)는 농사에 쓰는 한우들이 줄어들어 농경에 큰 폐해가 된다며 소잡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 이른바, 우주송삼금전령(牛酒松三禁傳令)을 실시한 것이다. 소를 기르는 농가가 열에 한둘이 되지 않아 농사일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다.” 완주(전주)감영의 생활이 세세히 담겨져 있다. ‘완영일록’은 지난 2002년 성균관대 도서관이 보관하던 것을 이 대학 대동문화연구원이 찾아내 해제본을 발간했다.
그러나 ‘화영일록’은 현재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영인본을 입수, 경기도박물관이 지난 2004년 번역, 출간했다.
서유구와 경기도 서유구는 중부(仲父) 서형수가 세도 가문들 사이의 싸움에 휘말려 실각하자 연좌돼 1806년부터 1823년까지 향촌에 은거했다.
이때 개성 인근의 장단 금화(金華) · 대호(帶湖), 서울 주변의 번계(樊溪), 한강 유역의 두릉(斗陵) 등 여러 곳들을 옮겨 다녔는데 모두 경기지역이다.
서유구 집안은 서종태 등 무려 12명의 개성유수를 배출했다. 개성은 고려문화권으로 높은 학문적 수준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 송상의 활발한 활동은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갖췄고 이러한 환경은 결국 실학과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금화경독기(今華耕讀記)’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등 책으로 편찬됐고 이 저술들은 훗날 서유구의 대표적인 실학농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정리됐다.
백과사전 <임원경제지>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를 살았던 서유구. ‘임원경제지’는 의식주와 여가생활 등 살림살이 방법을 16개 분야 114권으로 정리한 일종의 백과사전. 백과사전인 만큼 실용성을 강조했고 일상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했다. 길쌈을 다룬 ‘전공지’에선 의복 재료의 낮은 품질을 다뤘고 ‘섬용지’는 조선의 낙후된 기계 사용의 현실을 폭로하며 곡식 분쇄기 등 중국의 기계 도입을 역설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서유구는 국악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예지’도 저술했다. ‘임원경제지’는 산림경제를 토대로 한국과 중국의 저서 900여 종을 참조했으며, 당시 경제사정과 경제정책을 살피는데 높은 사료적인 가치를 지녔다. 일본 오사카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침체된 실학 살린 주역
고증학적 학풍은 조선후기 최대의 역작인 <임원경제지>를 펴냈다. 이 책은 농업과 상업 등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다. 수원유수 시절 작성한 ‘화영일기’의 한글 번역사업을 맡은 양상훈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수원행정에 대해 세세한 기록을 남겨 기록문화에 대한 전형을 남겼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권농에 힘썼던 서유구는 수원유수 시절 남긴 행정일기를 소상히 다뤘다”고 덧붙였다. 다산이 경학과 고증학적 연구를 통해 실학의 큰 틀을 제시했다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란 방대한 저술을 통해 현실문제를 짚었던 인물입니다.”
서유구는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시대 인물이다. 다산이 경학을 중심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면 서유구는 백과사전식 실용서를 저술한 인물로 최근 부각되는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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