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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 물목(物目)

Gijuzzang Dream 2008. 6. 17. 05:07
 

 

 

 

 물목 (物目)  

 

 

얼마 전에 영양 천씨 석대문중에서 부산박물관에 기증한

5대(代) 6효(孝)의 270여 점에 달하는 고문서 가운데서 몇몇의 물목을 접하였다.


이를 보면서 선인들은 선물 하나를 전하더라도 물건만 덜렁 보내는 것이 아니라

뜻을 밝히고 정중한 격식으로 예를 갖춤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축의니 부의, 쾌유, 장도, 멸청(滅靑-책 발간) 등등에서

봉투 안에 다른 종이로 금 얼마를 따로 써넣는 것도 이 물목의 잔흔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목은 자의(字意)와 같이 물품의 목록이다.

일반적으로 고문서로써의 물목은 혼례 물목을 지칭하는 편이었다.

혼수 물목은 값나는 물품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저 현일 훈일(玄壹?壹)로만 쓰이는데

이는 재물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기보다 겸양의 뜻으로

검은 비단과 붉은 비단을 하나씩 넣었다는 뜻이다.


여타의 물목단자들은 중요 내용도 아니고

남에게 선물 받은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지도 않았기에

개탁(開坼) 후 대다수 폐기되어 남아있는 예가 드물다.


천씨 일족은 조선 후기까지 대체로 무임(武任)이었으나

효자 집안인 까닭에 수령이 특별히 은전을 내린 것이어서 비루하지 않다고 보아

이 문건들이 보존 되었던 것 같다.

 

천씨 집안의 물목은 세밑에 선사하는 세의(歲儀)물목이 3점이고,

존문(存問) 문안(問安)으로 쓰인 것인 3점인데

양식상으로는 큰 틀은 같으나 부분 부분에서는 각기 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람에 관한 천망(薦望)단자가 8폭반인데 비해

물목은 모두 6폭반이고 남은 2폭은 피봉(皮封)이 되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예간(禮簡)형태였다.


문서 마지막 행의 연월일 앞에는 인원물제(人原物際)라 하여

사람에 해당될 때에는 ‘원’을 쓰고, 사물에 해당될 때에는 ‘제’를 쓰고 있다.

이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잘 지켜지고 있었다.


인원물제는 국가문서인 서계(書契)의 별폭(別幅)에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오랜 관습으로 보인다.

그 연원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은데 글자 자체가 사람과 사물을 뜻한다는 설과

두 글자가 모두 끝을 나타낸다는 설이다.
‘원(原)’은 본래 ‘원(元)’으로 ‘원(元)’이라는 글자가 백성(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것인데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기휘(忌諱)하여 원(原)이라고 쓰였다는 견해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원공신(元功臣)을 따른 자를 원종공신(元從功臣)하는데

이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쓰는 예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제(際)’의 뜻은 꼭 사물이라는 뜻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끝을 뜻한다는 설은 ‘제(際)’자는 끝이라는 뜻이 명확한데 비해

‘원(原)’자는 처음 근본의 뜻이 강하여 두 주장이 다 완벽한 설명에는 부족하다.

세의물목은 설이 다 되어갈 때 청주 두 복자(貳鐥)와 대구 두 마리를 보낸 것이나,

쇠고기(黃肉) 두 근을 보낸 것들로 물품의 양은 그리 호사스럽지 못하다.

삼남도찰사겸토포사의 존문물목에서는

아예 선물의 내용까지 생략되어 예는 갖추되 배려를 잊지 않았다.

또 이때의 선물은 목민관이 덕 있는 사람을 챙기는 것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물론 물목이 배달 사고를 막기 위한 부차적 장치 일 수도 있으나

격식을 갖추어 받는 이를 높이는 마음 쓰임이 아름답다.

같은 값이면 이제 우리도 봉투 속에 별지를 넣어

기원이나 염원을 담고 ‘꽃 한다발’이라고 쓸 줄 아는 여유를 배우고 싶다. 
-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양맹준감정위원

- 게시일 2007-10-26

 

 

 

            <참고사항>

  

영양 천씨 석대문중, 부산박물관에 고문서 250여 점 기증

 

  부산시 해운대구 석대동(石坮洞)에 소재하는 영양천씨(潁陽 千氏) 석대(石坮) 문중의

  천장률(82)씨가 문중에서 소장해 오던 5대에 걸친 효행(孝行) 관련 고문서 114점과

  호적서류인 호구단자(戶口單子), 교지 151점 등 모두 272점에 이르는 고문서를

  지난 2월23일 부산박물관(관장 이인숙)에 기증했다.

 

  영양 천씨 석대문중은 영조∼고종 때까지 5대에 걸쳐 다섯 효자와 한 명의 효부 등

  효행을 인정받은 오대육효(五代六孝) 가문.

  천씨가 기증한 5대에 걸친 효행 관련 고문서 114점은 효자·효부의 포상에 관한 청원서와

  행정서류 등 조선시대 효행과 관련된 정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천씨 문중이 기증한 이번 고문서는 크게 효행과 관련된 청원서와 행정서류 110여점과

  호구단자 120여점과 교지류 등의 기타 자료로 나뉜다.

  효행관련 서류는 다시 등상(等狀), 소지(所志), 상서(上書) 등 서민이 관에 상소용으로

  보낸 자료와 서목(書目) 등 하위 관청이 상부 관청에 보낸 행정문서로 구분된다.

  이는 1752년부터 1903년까지 약 150년에 걸쳐 작성됐으며 1918년 정부가 이들에게

  5대에 걸친 6명에게 효자와 효부임을 인정하는 포장완의문(褒장完議文)도 기증품에

  포함돼 있다.

  부산박물관 장경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효행포상을 받는 일은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등 지극히 까다로웠다.”면서 "효행과 관련된 자료는 많이 있지만 5대에

  걸쳐 6명이 배출된 것은 드문 일"이라며

  “이같은 행정절차와 조선시대 효행 관련 정책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천씨가 함께 기증한 호구단자는 건륭 6년(1741)에서 광무 11년(1908)까지 약 170년에

  걸친 것으로 조선시대 가계 · 신분관계 · 경제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옛 호구단자에서 신호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담고 있어

  "호구단자 역시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다"면서

  "호적이 1895년 갑오개혁을 겪으면서 신식으로 바뀌는 변화상도 볼 수 있으며

  당시 신분사 연구와 경제상황을 살피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중요한 향토사 연구자료로 평가 받는 이 고문서들은 문중의 요청으로 지난 1995년

  경성대 향토문화연구소에 의해 분류, 정리, 번역돼 현재 책자로 만들어져 있다.

 

  문중 관계자는 "얼마전 경북 청도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천만리장군 영정 복사품이

  여러번 도난당한 것을 봤다"며 "고문서의 훼손, 도난 등 보관에 어려움이 있어 2년간

  문중의 회의 끝에 기증을 결정하게 됐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또 그는 “부산지역 효행문화가 소개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기증 동기를 밝히며

  "이를 계기로 다른 문중도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를 기증하는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증 유물은 7월 중 부산시립박물관 기증실에 전시된다.

  - 2006. 2. 24.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