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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실학, 실학자들 3] 실학의 집대성 - 다산 정약용

Gijuzzang Dream 2008. 6. 15. 13:31

 

 

 

[경기실학, 실학자]

 

 다산 정약용 (茶山丁若鏞) 조선 실학 집대성

 

 

 

 

두 江이 하나가 되듯 ‘개혁과 민생’ 조화를 꿈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양주 두물머리.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흘러 내린 북한강,

두 줄기 강이 만나 더욱 풍요로워진 강줄기는 한강이 된다.

 

그 시점인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는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무덤이 위치해 있다.

넉넉한 강물만큼이나 큰 이상을 품었던 다산의 체취가 곳곳에서 묻어 난다.

 

다산이 태어나 유년시절과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을 접고 말년을 보냈던 생가가 위치한 곳은

현재 ‘마재마을’로 불린다. 다산이 생존하던 당시는 광주군 초부방 마재부락(마현리)이었다.

지금은 팔당댐이 물을 막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며

강변에는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현듯 넘실대는 물결따라 지난 역사의 흔적이 눈가에 와 닿는 듯하다.


다산은 자신의 고향을 ‘열상(洌上)’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한강의 옛 이름이 ‘열수(洌水)’였던 것에 기인하며 한강 상류 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것 같다.

다산은 스스로를 ‘열상노인’이라고 칭해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했다.

 

현재 다산의 생가와 일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다산유적지로 보호받고 있다.

생가인 여유당과 사당,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등이 조성돼 있으며

다산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산은 ‘학문의 한류’를 이끈 인물이다.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서가엔 다산의 ‘목민심서’가 꽂혀 있었다.

수시로 탐독하며 바른 관료의 이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호치민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원에 ‘목민심서’를 함께 묻었다.

 


◇ 다산과 정조


다산이 22세 때(1783년) 소과에 합격한 후

정조와 첫 대면한 이래 정조 타계(1800년)까지 17년동안 두 사람은 군신관계이자 사제관계였다.
다산은 정조를 통해 사회개혁의 의지를 다졌고

정조는 새로운 신하와 함께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은 암행어사와 참의, 좌승부지 등을 거쳤다.
정조는 천주교 문제로 수세에 몰린 다산을 돕기 위해

금정찰방이나 곡산부사로 강등시켜 화를 모면하게 했다.

이후 1799년 내직으로 돌아왔지만 정조 서거 후 1801년 책통사건에 연루돼 유배길에 오른다.
그는 정조와 함께 실학의 산물인 수원 화성 건설에 몰입한다.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거중기 설계는 물론 1793년 화성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 강진에서의 다산


18년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은 고통의 세월이자 학문적 결실을 맺은 기간이었다.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강진 유배시절 다산은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주축을 이룬 경학을 집중 연구했다.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지금의 다산 초당은 1958년 해남 윤씨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폐가로 방치된 것을 정면 5칸, 측면 5칸 기와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강진군은 다산 유배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순리에 맞다고 판단,

내년께 초가집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 다산의 사상


사상적으로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학풍을 계승했다. 그의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은

영 · 정조대 이후 청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은 ‘육경사서’ 등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 체계와

국가 경영에 관한 제도 및 법규의 기준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관리들이 부임부터 물러날 때까지 지켜야 할 윤리강령을 담은 ‘목민심서’ 등을 펴냈다.

서학의 과학적 사고를 수용해 객관적 사실에 대해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도 추구했다.


 


 

 

■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인간적 면모까지 조명… 쉽게 풀어쓴 실용서 계획”

“다산의 편지 글을 읽으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은 다산 마니아다.

학문적인 부분은 물론 다산 정약용이란 거목이 지닌 인간적인 풍모까지 조명하고 있다.

 

“아들에게 쓴 글을 보면 여느 아버지와 같은 당부와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님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또 다른 느낌을 던져 줍니다.”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에 초점을 맞춘다면 오히려 다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김 실장.

 

정조대왕과 함께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다산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산에 대해 너무 상찬만 하는 분위기에서 탈피하려고 합니다.

정치 엘리트로 오랜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그의 궤적을 보며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 실장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다산의 사상을 현 시대에 맞게 조명하는 것.

“그의 많은 독서량이 방대한 저술로 꽃피웠습니다.

특히 ‘목민심서’의 경우 지방관이 갖춰야 할 매뉴얼로 철학이 담겨 있죠.

당시의 현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현 시대와 맞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단순히 청렴을 강조하기보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갖춰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산연구소는 다산의 사상을 보급하는 차원에서 쉽게 풀어쓴 실용서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다산이 주장한 실천 내용을 오늘에 맞게 적용하는 작업을 추진중입니다.

실학산책 등 실학유적 답사를 비롯해

실학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계승 · 보급하는 사업을 다채롭게 진행할 것입니다.”

- 경기일보 2006-6-29 / 이형복기자 bok@kgib.co.kr

 

 

 

 

 

 

 

 

茶山 生家에 다녀와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生家.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生家.

주말에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의 生家(생가)를 다녀왔다.

 

‘다산유적지 입구’라는 정거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버스정거장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다산 유적지가 표시되어 있기는 했지만, 현재 위치나 진행 방향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한동안 헤매다 안내판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서 ‘다산문화유적지 1.1㎞’라고 쓰인 현수막을 발견하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다산 유적지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 다산문화관, 實學(실학)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산의 묘소 앞에는 그가 지은 墓誌銘(묘지명)을 적은 안내판이 있는데 誤字(오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산은 이 묘지명 가운데서 스스로를 鏞(용), 형 丁若銓(정약전)을 ‘詮(전)’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若鏞’을 ‘鏞’이라고 했으면, ‘若銓’은 ‘詮’이 아니라 ‘銓’으로 썼어야 마땅했다.

그런 오류가 세 군데 있었다.

 

다산의 묘비에는 ‘文度公(문도공)’이라는 諡號(시호)가 새겨져 있었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南人(남인)이었던 다산을 숙청한 老論(노론)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시호가 내려졌다면 선생이 정치적으로 復權(복권)됐다는 뜻인데, 언제 그런 조치가 있었지?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을 텐데….

 

실학박물관과 다산문화관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실학박물관은 조선 말기 실학의 흐름과 그 속에서 다산의 위상, 중국과 일본의 실학 등에 관한 자료를,

다산문화관은 다산의 휘호 현판을 비롯해 선생의 유품과 저술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글로 표기한 <목민심서> 안내판

 

하지만 굳이 다산문화관과 실학박물관을 따로 지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실학박물관을 따로 지어야 할 만큼 실학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았고,

그 안에 있는 전시품 중 상당 부분은 다산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의 저술 <經世遺表(경세유표)>·<欽欽新書(흠흠신서)>·<牧民心書(목민심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책들에 대한 안내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안내판의 제목 부분에 책 이름이 한글로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판에 책 표지 사진이 소개되어 있고, 안내판의 아래에 책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책 이름들을 한글로만 표기한 것은 아무래도 적절치 않아 보였다.

<牧民心書> 등은 한자만 봐도 그게 무엇에 관한 책인지 바로 느낌이 오는데 한글로만 표기해 놓다니….

<경세유표>는 ‘Design for good government’, <목민심서>는 ‘Admonitions on governing the people’,

<흠흠신서>는 ‘Toward a new jurisprudence’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영어 제목을 붙여놓으면서

정작 한자 표기는 하지 않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안내판의 <목민심서> 등의 표기는 漢字(한자)로 적는 것이 의미 전달을 위해 낫지 않겠느냐”고

관리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그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모든 분들의 요구를 다 반영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실학박물관에 있는 다산에 대한 안내문에서 ‘문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게 언제인지 알았다.

안내문에 의하면, 다산에게 ‘문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純宗(순종)황제 시절인 1910년 7월 18일이었다.

대한제국이 日帝(일제)에 倂呑(병탄)되기 불과 40여 일 전이었다.

 

실학박물관에는 金堉(김육) 朴趾源(박지원) 朴齊家(박제가) 등 몇몇 대표적 실학자들에 관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박지원에 대한 안내문을 보니,

그도 순종 때인 1910년 ‘文度公(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시호를 받은 듯한데, 두 분의 시호가 같은 것이 이상했다.

둘 중의 하나는 誤記(오기)가 아닌가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했다.

 

純宗實錄(순종실록)에 의하면,

다산과 박지원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詔令(조령: 황제의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10년 7월 18일이 아니라 8월 19일이었다. 나중에 전화로 다산문화관 관계자에게

“다산이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날짜가 잘못돼 있다”고 알려줬다. 그는 날짜를 확인해보더니

“안내판의 7월 18일은 음력 날짜인데, 음력이라는 표기가 빠졌다”고 알려왔다.

 


亡國 4일 전에 시호 내려

 

이 조령에서 다산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보면,

“…故(고) 承旨(승지) 정약용은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재주가 일세에 탁월하였다.

응당 조정에서 褒揚(포양)하는 擧措(거조: 어떤 일을 꾸미거나 처리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니

모두 정2품 규장각 제학에 追贈(추증)하며, 시호를 내리는 恩典(은전)을 시행하라”고 되어 있다.

 

박지원에 관해서는

“좌찬성에 추증된 박지원은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으며…”라고 되어 있다.

 

이들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이튿날인 8월 20일. 두 사람 모두 시호는 ‘문도공’이었다.

8월 19일자 <순종실록>에 의하면 이날 시호의 은전을 받은 사람은 모두 16명,

이 날의 조령에 따라 다음날 시호를 받거나 종전의 시호를 고쳐 새로운 시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26명이었다.

亡國(망국)을 앞두고 시호를 받거나 벼슬을 추증 받은 사람은 이들뿐이 아니었다.

7월과 8월 내내 그런 일이 계속된다.

甲申政變(갑신정변)의 주역으로 洪鍾宇(홍종우)에게 암살된 金玉均(김옥균),

갑신정변 때 죽은 朴泳敎(박영교: 朴泳孝의 형),

갑신정변의 주역 洪英植(홍영식)의 아버지로 자결한 洪淳穆(홍순목: 전 영의정) 등이

모두 이때 복권되어 시호를 하사받고, 벼슬이 추증됐다.

이 두 달 동안 이런 은전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같은 기간 동안 훈장을 받거나 승진한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 순종황제의 측근들로, 그 가운데는 後世(후세)에 親日派(친일파)로 기록된 자들도 적지 않았다.

마치 나라가 망하기 전에 빚잔치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명색이 황제지만 순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래 차례로 國權(국권)을 빼앗겨

주요 國事(국사)는 이미 통감부에서 처결하고 있었으니까.

 

문득 ‘조선의 비극은 다산과 박지원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너무 늦어진 데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나흘 전에야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시호를 하사받은 그들이 생전에 높이 쓰임을 받고,

그들의 개혁방안이 국정에 반영됐더라면,

그들처럼 ‘利用厚生(이용후생)’에 밝고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 안으려는 이들이

조선조 500년 동안 중히 여겨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09-03-03

- 월간조선, 배진영의 역사의 뒤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