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신화기행] 윈난이야기
⑥ 하니족 - 온화한 여신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다 | ||||||
신들의 집 한가운데에 ‘어마’는 바로 ‘위대한 최고의 여신’이라는 의미이다.
윈난의 남쪽, 산을 개간하여 한없이 이어지는 계단식 논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니(哈尼)족 신들의 세상은 여신으로 채워져 있다. 최고의 천신 어마는 금빛 물고기여신에게서 태어났다.
‘오래된 노래 열두 갈래’라는 의미를 가진 ‘워궈처니궈(窩果策尼果)’에는 수많은 여신들이 등장하는데 그 시작에 금빛 물고기여신이 있다.
‘미우아이시아이마’라는 긴 이름을 가진 거대한 금빛 물고기여신이 있었다. 그녀가 커다란 지느러미를 펼치자 그 속에서 부연 안개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하늘과 땅이 되었다.
금빛 찬란한 큰 비늘을 한번 흔들자 목덜미에서는 해의 신 웨뤄(約羅)와 달의 신 웨바이(約白)가, 등에서는 천신 어마와 지신 미마(密瑪)가 나왔다. 허리에서는 인신(人神) 옌뎨(烟蝶)와 뎨마(蝶瑪)가 나왔고 꼬리에서는 지진을 일으키는 힘센 바다의 여신 미춰춰마(密嵯嵯瑪)가 나왔다. 신들을 낳아 그곳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많은 신들이 생기게 되면 너무 시끄럽고 무질서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마는 먼저 마바이(瑪白)와 옌쓰(烟)라는 두 딸을 낳았다. 마바이는 ‘규칙’을 의미하고 옌쓰는 ‘예절’을 의미한다. 뭇신들을 낳기 전에 먼저 ‘규칙’과 ‘예절’을 낳았다는 이 이야기는 하니족 사람들이 온화하고 겸손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들의 신화에는 남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쟁영웅들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아득히 먼 북쪽 ‘후니후나(하니족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음 거주했던 곳이라고 믿는 신화 속의 땅, ‘붉은 돌과 검은 돌이 쌓여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이주해온 하니족은 결코 남의 보금자리를 빼앗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땅을 찾아 개척할 뿐이다.
신화 속에서도 신들은 싸우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직책에 충실하다. 그들의 신화에는 영웅들이 보여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은 없어도 게임의 법칙을 지키는 신들에게서 느껴지는 우아한 향기가 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여신들이 만들어낸다. 지고무상의 힘을 지닌 그녀는 열두 명의 신들에게 명하여 규칙을 지키지 않는 신들을 관리하게 한다. 우리가 요즘 많이 잊고 사는 중요한 덕목들인 ‘존중’ ‘겸양’ ‘평등’ ‘지혜’ 등은 하니족에게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가치이다. 메이옌은 호수의 맑고 투명한 물로 그 신들의 심장을 만들었고, 맑은 심장을 가진 그 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일을 처리한다.
메이옌의 뒤를 이어 신들의 왕이 된 옌사(烟沙)는 남성신이다.
옌사의 신통력도 무척 컸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엔 늘 여신 메이옌에게서 해답을 구했다. 한번은 옌사가 아홉 명의 남신을 낳아 그 신들에게 짝을 지어주려 했다.
메이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처녀 아홉 명을 옌사에게 보내어 그들의 짝으로 맺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결합하여 낳은 후손들이 모두 영생불사하며 죽지 않는 것이었다. 갈수록 노인들이 늘어났지만 영원히 죽지 않다 보니 1000살이 넘은 노인들이 즐비했다. 그래서 후손들은 해가 뜨면 힘 없는 노인들을 모셔다가 햇볕을 쬐게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이들은 지쳐갔고 노인들은 마치 장작더미처럼 햇살 아래 쌓여있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자 노인들의 귀에서는 하얀 목이버섯이 자라났고 몸에서는 풀이 자라났다.
노인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들은 불사의 존재였기 때문에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신은 처음엔 그 누구의 죽음도 허락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마음을 바꿔 고통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죽음을 허락해주었다. 다만 신의 뜻을 모두에게 전하는 임무를 가졌던 사람들이 신의 말을 깜박 잊어버리는 바람에 ‘노인들만 죽게 하라’는 신의 뜻이 ‘노인도, 젊은이도 다 죽어도 된다’로 전해지게 되었다.
죽음조차도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하니족 사람들은 또한 인간도, 동물도, 귀신조차도 모두가 하나의 조상에게서 나온 존재라고 여긴다. 그런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생명의 가치는 같다. 그뿐인가, 그들은 역법(曆法)조차도 금빛 물고기여신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원래 신화의 상징체계에서 여신과 물, 물고기는 생명과 다산을 의미한다. 금빛 물고기여신에게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살아갔던 아득한 고대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물고기여신의 금빛 비늘을 뿌렸더니 버섯류에 속하는 거대한 자고(茨)가 자라났고 거기에서 사람과 동물, 식물 등이 나왔다. (자고는 윈난 남부 사람들이 지금도 즐겨먹는, 마치 토란과 같은 맛이 나는 식물이다.)
옌뎨와 뎨마는 그것의 뿌리와 줄기, 잎의 숫자를 보고 역법을 정했다. 즉 뿌리 12개에서 12달을, 꽃송이 30개에서 30일을, 나뭇잎 360개에서 360일을 정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자고가 죽고 하늘을 가리는 큰 나무가 나타나는 바람에 사람들은 역법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하니족 사람들은 청년 하나를 뎨마에게 보내어 날짜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다시 하나 심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뎨마는 금빛 물고기여신의 비늘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고 했고, 청년은 천신 어마를 찾아간다. 천신 어마에게는 마침 금빛 물고기여신의 비늘 세 개가 남아있었다.
여신은 비늘 하나를 심어 아들에게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비늘은 검은머리 개미가 물고 가서 자기 집을 짓는 데 써버렸고, 두 번째 비늘을 며느리에게 지키라고 했으나 역시 붉은 얼굴 암탉이 자기 새끼에게 먹여버렸다. 세 번째 비늘은 어마가 직접 지켜 나무가 자라나게 했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온갖 동물들이 와서 나무에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결국 천신 어마는 동물들의 발자국을 갖고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 호랑이, 토끼 등으로 이루어진 ‘12간지’와 같은 역법이었다.
한편 천신 웨뤄와 웨바이의 이야기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리고 해와 달을 먹는 개의 모티프가 섞인 형태를 보여준다.
무시무시한 괴물 어뤄뤄마(俄羅羅瑪)가 누나인 웨바이, 남동생인 웨뤄의 엄마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엄마인 척 하며 남매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들어가 동생인 웨뤄를 잡아먹었다.
누나인 웨바이는 동생의 손 하나를 들고 탈출, 감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바닷가로 가서 생명의 붉은 꽃으로 동생을 살리고 함께 꽃을 먹었다.
동생과 누나는 해와 달이 되어 서로 교대로 땅을 비춰 괴물 어뤄뤄마가 숨을 곳이 없게 했다. 그러나 동생은 겁이 많아 밤에 나오는 걸 싫어했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누나는 동생에게 황금 빛 바늘을 주면서 사람들이 쳐다보면 그것으로 찌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해를 바라보면 눈이 아픈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결국 남동생은 해가 되어 낮에 나왔고 누나는 달이 되어 밤하늘을 비췄다.
그런데 인간세상 사람들이 혼인하여 아이 낳고 사는 것을 부러워한 해와 달은 자기들도 혼인하여 작은 해와 달을 계속 낳았다. 인간들이 더위에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하늘로 올라간 개는 작은 해와 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이후에도 개는 그들이 새로운 해와 달을 낳으면 즉시 하늘로 와 그것을 먹어버렸는데 그때 인간 세상에는 일식과 월식이 생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전승되고 있지만 비슷한 사유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먼저 시작되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하니족 신화에서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동생에게 환한 낮을 양보하고 황금바늘까지 주는 누이는 금빛 물고기여신이며 동시에 천신 어마이고 만능여신 메이옌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규칙과 예의를 중시하며 남에게 양보하고 평등하게 공존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하니족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4) 신나는 神들의 세계 (0) | 2008.06.13 |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5) 지눠족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7) 이족 - 천지 만들고, 인간 길러낸 神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8) 이족의 즈거아루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9) 문자 / 하늘의 신이 인간에게 준 글 (0) | 2008.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