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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8) 이족의 즈거아루

Gijuzzang Dream 2008. 6. 13. 13:36

 

  

 

[소수민족 신화기행] 윈난이야기

 

 

⑧ 이족의 즈거아루 

ㆍ하늘과 땅의 아들 여신의 시대를 끝내다

노르스름한 빛을 띤 엷은 갈색 종이에 그려진 오래된 그림이 있다.

윈난에서만 생산되는 특수한 면지(棉紙)인데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이다.

한 겹으로 된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면 먹이 번지기 때문에 반드시 두 겹으로 된 면지를 사용한다.

이족의 비모는 아무 때나 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신을 모셔오는 경전을 조용히 읊조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와 목적 등을 신에게 설명한다.

하늘과 땅의 신, 해와 달의 신, 조상신 그리고 신비로운 동물 신들을 모두 불러놓고

비모는 대나무 붓을 사용하여 이 그림을 그린다.

비모는 이족 사회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신과 통하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왼쪽) 이족의 잔칫날, 파안대소하는 한 할머니.

(오른쪽) 아기를 업은 이족 여성.


바모취부무(巴莫曲布姆)는 이족의 비모 쒀모아푸(索莫阿普)가 그린 그림을 접하고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그림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데 열정을 쏟는다.

‘신도와 귀판(神圖與鬼板 · Spirits Picture and Ghost Board)’(2004)에는 그녀의 그런 열정이 들어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신의 그림, 때로는 삼나무로 만든 나무 판 위에도 그려지는

그 신비로운 그림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머리 위에는 구리로 만든 투구를 걸쳤고

마치 엑스레이로 투시한 것 같은 삼각형의 몸 아래쪽엔 남성의 상징물이 그려져 있다.

머리의 양쪽에는 해와 달이 있고 한 손은 구리로 만든 창을, 다른 손은 구리로 만든 그물을 들고 있다.

옆에는 구리로 된 활도 보이는데 화살은 태양을 향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그가 타고 다니는 날개 달린 말이 있다.

번개가 치는 것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긴 뱀을 잡아먹는 공작새 쑤리우러쯔(蘇里吳勒子)도 보이고

역시 뱀을 잡아먹는 거대한 이무기(혹은 악어라고도 한다) 바하아유쯔(叭哈阿友子)도 보인다.

공작새와 이무기를 조력자로 거느리고 있는 그가 바로 즈거아루(支格阿魯), 이족신화 속의 영웅이다.

바모취부무의 책‘신도와 귀판’에 소개된 그림. 나병을 일으키는 귀신‘추’를 그렸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윈난뿐 아니라 쓰촨, 구이저우 등 이족들이 사는 모든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하늘에 떠오른 여섯 개의 해와 일곱 개의 달을 쏘아 떨어뜨려

사람들을 재앙에서 구해낸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용족에 속하는 어머니 푸무리르의 계보는 여성의 이름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고 있던 푸무리르에게

여덟 마리의 매들이 찾아오면서부터 그 계보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족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는 신의 사자이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검은 매가 세 방울의 피를 떨어뜨렸고

그것이 푸무리르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즈거아루이다.

새벽에 안개가 피어올랐고 오후가 되자 즈거아루가 태어났다.

천상의 존재인 매와 지상의 존재인 용이 합쳐져 태어난 인물이

바로 즈거아루, 이제 여신들의 시대는 끝났다.

원래 이족의 신화 속에서 여신들은

문자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치유의 힘을 갖고 있는 지혜로운 존재였다.

아주 오래된 옛날/ 바람이 질병을 몰고 왔네

질병이 세상에 가득 찼지/ 질병은 정말 무서운 것

아무도 고치지 못했어/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었지

병은 빨리도 변화해서/ 수백 번 변했어

여성이 병을 치료했지/ 여성이 병을 고쳤어

여성에겐 지식이 있어/ 모든 병을 그녀가 치료했네

초록색 풀로 병을 치료하고/ 나무뿌리로 병을 고쳤어

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사했지/ 여성은 치유자였다네

그러나 이제 즈거아루는 여성을 거부한다.

태어난 첫날, 즈거아루는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았다.

둘째 날, 어머니와 함께 잠자려 하지 않았고

셋째 날, 어머니가 주는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상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며 즈거아루를 절벽에 내다버렸다.

즈거아루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반짝이는 세 개의 돌이 있는 동굴 입구에 이르렀고,

그를 본 돌들이 말했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이족 여성.

“오늘은 좋은 날이야. 영웅 즈거아루가 왔으니. 그를 잘 대해주어야 해!” 이족에게 있어서 돌은 생명의 상징이다.

 

즈거아루는 돌의 말을 알아들었고 석굴 속에 살았으며, 돌의 밥을 먹고 돌의 물을 마셨다. 추우면 돌 위의 이끼로 옷을 해 입었고 심심하면 돌들과 대화를 했다.

 

돌은 아이를 키웠다.

즈거아루는 그렇게 장성하여 13살이 되자 마침내 어머니를 찾아간다. 기이한 탄생과 버려짐, 그리고 귀환이라는 영웅신화의 전형적인 과정을 즈거아루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냥 아들을 받아들여준 것이 아니라 모험의 과정을 다시 겪게 한다.

어머니는 길고긴 머리카락을 찾아오라는 시험을 아들에게 내렸고, 아들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물론 한꺼번에 나타난 해와 달을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영웅의 모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러어터이(勒俄特依 · ‘역사의 기록’이라는 의미)’라는 이족 창세서사시에

인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 줄기 안개가 피어나더니 그것이 하늘로 올라갔고

곧 세 번에 걸쳐 붉은 눈이 내려 그것이 세상 만물이 되었다.

나무나 풀처럼 피를 갖지 않은 생물이 여섯, 개구리, 뱀, 매, 곰, 원숭이, 사람 등 피를 가진 생물이

여섯이었다. 그렇게 생겨난 인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른 해와 달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즈거아루는 삼나무 위에 올라가 활을 쏘아 해와 달을 한 개 씩만 남기고 모두 떨어뜨렸다.

하나씩 남은 해와 달은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즈거아루가 세 번이나 힘껏 부른 후에야 해와 달이 비로소 얼굴을 내밀었고 세상은 다시 환해졌다.

즈거아루는 해에게 바늘을 한 쌈지 주어 사람들이 해를 쳐다보면 찌르라고 했고

달에게는 말을 한 필 주었다.

밤에 달을 보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달이 즈거아루가 준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즈거아루신이 타고 다니는 말 그림.‘신도와 귀판’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혁혁한 공적을 세운 즈거아루도 여성들과의 지혜 겨루기에서는 자주 패했다.

한 번은 즈거아루가 어떤 부인이 무척이나 총명하다는 말을 듣고 숫양 한 마리를 끌고서 부인을 찾아가 길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1년 후에 숫양과 새끼를 찾으러 오겠다고 했고 부인은 그러라고 했다.

다음 해에 즈거아루가 그녀를 찾아가서 숫양과 새끼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으라고 했다.

즈거아루가 물었다. “당신 남편 왜 저러는 거요?”

부인이 대답했다. “아이를 낳고 있어요.”

즈거아루가 당황해서 말했다. “세상에 남자가 아이를 낳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그러자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숫양도 새끼를 낳는다면서요?” 즈거아루는 할 말이 없었다.

마침내 즈거아루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두 명의 아내들 중 하나가 즈거아루가 타고 다니는 비마의 날개를 부러뜨려놓았고,

그것도 모르고 하늘로 날아오른 즈거아루는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물론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질투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회귀를 꿈꾸던 여신들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구리로 만든 무기를 손에 든 즈거아루는 부권사회의 상징이다.

즈거아루는 바다에 빠져 죽었지만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비모의 그림 속에서 즈거아루는 인간을 지켜주는 강력한 신으로 부활했다.

비모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작새와 이무기가 잡아먹고 있는 뱀은

이족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병을 일으키는 귀신들, ‘추(初)’를 의미한다.

 

추는 무시무시한 귀신들이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르릉거리며 비가 내리면 거대한 나무에서 추들이 생겨난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남자 추도 있고, 머리를 일곱 갈래로 땋은 여자 추도 있으며

발이 하나, 눈이 하나 혹은 귀가 하나인 어린 추들도 있다.

 

그래서 즈거아루는 손에 구리로 만든 창과 활을 들고 우레신을 제압한다. 구리는 번개를 피할 수 있다.

우레신을 제압하면 세상엔 나병귀신 추가 생겨나지 않는다.

 

즈거아루가 바다 속에 들어가 항복시킨 거대한 이무기도 즈거아루를 도와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추들을 먹어치운다.

즈거아루, 그는 여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면서 장엄하게 등장한 이족사람들의 든든한 수호신이다.
- 경향, 2008년 04월 10일

-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