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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4) 신나는 神들의 세계

Gijuzzang Dream 2008. 6. 13. 13:37

 

 

 

 

[소수민족 신화기행]윈난이야기

 

 ④ 신나는 신들의 세계

‘천의 얼굴’ 지닌 수호신들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가슴 뛰었던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남조국(南詔國)’이나 ‘대리국(大理國)’, 단씨(段氏)라는 고유명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제목조차 잊어버렸지만 어린 시절에 읽었던 숱한 무협지들 속에서

다리국의 단씨들은 어쩌면 그렇게 신비롭고 멋진 검객들이었는지.

칭기즈칸의 군대가 내려오기 이전까지 다리(大理)의 바이족(白族)은

중원의 한족 왕조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고유의 문화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다리국 단씨들은 바로 그 왕조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 자리를 내어준 지 이미 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바이족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살아있다.

바이족 사람들이 본주신을 모시고 사당을 떠나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남조국의 위대한 대장군이었던 단종방(段宗榜)은 다리 지역에서 가장 많이 모시는 본주이다.

본주란 마을의 수호신이다. 다리 지역의 본주만 해도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니,

거의 마을 하나에 본주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본주는 그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일상은 본주와 연결되어 있다.

좋은 일이 생겨도 궂은 일이 생겨도 사람들은 본주를 찾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그 본주들이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들을 모두 통괄하는 최고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얀 돌이나 황소, 나무 같은 동식물에서부터 민족을 재난에서 구한 영웅에 이르기까지,

온갖 본주들이 각 마을의 본주 사당에 모셔져 있지만 그들은 모두 평등한 신격을 지닌다.

 

도교의 영향으로 옥황상제가 이야기 속에 등장할 때도 있지만

그가 모든 신들을 총괄하는 최고신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옥황상제는

재미있고 떠들썩한 인간세상이 천상 세계보다 즐거워 보이는 것을 질투하여

인간 세상에 역병을 퍼뜨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괴팍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을 정도이니까.

사해 용왕이 동해에 가서 얻어왔다는

하이차이로 만든 탕.

얼하이에서 자라는 유일한 식물이라고 한다.

본주들은 초자연적 신력을 지닌 신이지만

천상 세계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드는 인간들과 같은 마을에 산다.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본주들은 마을 처녀나 다른 마을의 여성 본주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재산 많고 힘 있는 용왕에게 시집가라는 자기 말을 딸이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완벽한 신이 아니라 수시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자기를 받드는 마을 사람들과 장기를 두기도 하는, 그러나 남의 마을에서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부탁해오면 비가 들어있는 요술조롱박을 선뜻 빌려주기도 하는 마음 따뜻한 본주들.

그들은 때로 마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병을 퍼뜨리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차마 수행할 수 없었던 대흑천신(大黑天神 · 불교의 마하깔라다)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역병 약을 그냥 자기가 먹어버려

얼굴이 검게 타고 부스럼투성이의 몰골을 갖게 된다.

 

황소 본주는 인간들을 홍수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 몸으로 물을 막아

마을로 들어오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죽기도 한다.

 

바이족 사람들은 그런 황소를 본주로 모신다.

인간과 동물의 차별 같은 것은 바이족의 신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자기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던 당나라의 장군 이복(李宓) 역시

본주로 모셔진다. 비록 적이지만 이복은 자신의 왕조에 충성을 다한 장군으로 다리에서 죽어갔다.

바이족 사람들은 그 역시 본주로 모신다.

수시로 변하는 다리의 날씨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가지각색의 성격을 지닌 다리의 본주들,

그들이 엮어가는 유쾌한 세계는 너그럽고 온화한 바이족 사람들의 성품을 그대로 담고 있다.

바이족 여성의 꽃신.

돌은 바이족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에 숭배했던 자연물 중의 하나이다.

양들의 수호신인 하얀 돌(백암천자),

농사가 잘 되게 해주는 붉은 돌(홍사석대왕),

농사 지을 물줄기를 찾아내게 해준 거대한 돌(석보대왕) 등 돌 본주에 얽힌 이야기들은 땅의 생명력이라는 돌의 신화적 상징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다리의 자연환경과 관련된 본주들도 많다. 4000 높이의 창산(蒼山) 위를 감도는 검은 구름과 아무 때나 내리는 비는 태양을 삼킨 이리(狼)라는, 전 세계 신화에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를 만들어냈다.

 

아광(阿光) 부부는 창산 창랑봉(滄浪峰) 아래에서 농사짓고 옷감을 짜며 행복하게 살아갔다.

어느 날 개처럼 생긴 황소만한 이리가 나타나 태양을 삼켰고 그때부터 세상의 어둠이 시작되었다.

아광은 태양을 되찾아오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꿈속에 나타난 노인의 계시로 자신들의 조상인 ‘염제(炎帝)’를 찾아간다.

(여기서 ‘염제’라는 호칭은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카락 숫자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나 아광은

마침내 염제를 찾아가 태양이 사라지게 된 사정을 이야기했고,

신은 손에 신의 나뭇가지를 들고 검은 구름을 흩어지게 했으며 태양을 삼킨 이리를 활로 쏘았다.

마침내 태양은 다시 나타났고 아광은 태양신 본주로 모셔지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신화는 인간 세상의 권력 관계를 묘사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수시로 창산의 정상을 휘감는 검은 구름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 지역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반영된 신화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 얼하이(海)라는 큰 호수는

숱하게 많은 용왕 본주 신화와 바이족의 개국신화인 구륭(九隆) 신화를 만들어냈다.

사해(四海) 용왕은 차이촌(柴村)의 본주이다.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용왕에게 온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자기들의 소망을 쏟아놓는다.

“보리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계속 내립니다, 비 좀 그치게 해주세요.”
“벼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너무 내리지 않네요, 비 좀 내리게 해주세요.”
“저는 하관(下關)에 가야 하는데 북풍이 안 불어요, 북풍 좀 불게 해주세요.”
“저는 상관(上關)에 가야 하는데 남풍이 안 불어요, 남풍 좀 불게 해주세요.”

바이족 여성의 뒤편으로 보이는 연극 무대에서는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공연이 열린다.

사해용왕의 신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지만 인간들의 이 수많은 소망을 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러나 용왕은 총명하다.

“아침에는 남풍, 저녁에는 북풍이 불 것이다.

밤엔 비가 내릴 것이고 낮에는 해가 날 것이다.”

이렇게 지혜로운 용왕의 이야기도 많지만 얼하이의 물이 언제나 잔잔한 것은 아니듯이 용에서 형상이 변한 구렁이 역시 자주 등장한다.

 

초록 복숭아를 먹고 임신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단적성(段赤誠)은 사람을 괴롭히는 구렁이를 없애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칼들을 온몸에 두르고 구렁이 뱃속으로 들어가 구렁이를 죽인다.

그러나 단적성은 살아남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기려 본주로 모셨다.

 

저우청(周城) 마을 나비샘물(蝴蝶泉) 근처에는 거대한 구렁이가 나타나 가축을 잡아먹고 처녀 둘을 잡아갔다. 용감한 사냥꾼 두조선(杜朝選)이 그 구렁이를 죽이고 처녀 둘을 구해냈으며 마을 사람들을 재앙에서 구해준 공로로 본주로 모셔진다.

 

남조국이 육조(六詔)를 통일하기 이전, 오조(五詔) 중의 한 나라 왕비였던 백결(柏潔) 부인은

남조국 왕의 계략에 빠져 억울하게 불타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 본주로 모셔진다.

그녀가 생전에 불타 죽은 남편의 뼈를 거두기 위해 뜨거운 재를 헤치느라

손가락 열 개가 짓물러 피가 흘렀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행해지는 횃불축제날,

바이족 여성들은 그녀를 기억하며 봉숭아 꽃잎으로 손톱 열 개를 붉게 물들인다.

유채꽃이 만발한 초봄의 다리 풍경.


그러나 모든 본주가 다 이렇게 고결하고 희생적인 품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근엄한 남조의 대장군 단종방도 이야기 속에서는

다른 마을의 술 빚는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두 마을을 왔다 갔다 하는 본주가 되며,

학경(鶴慶) 지역의 동산노야(東山老爺) 본주는

소교장촌(小敎場村) 본주인 백저(白姐)와 사랑에 빠져

밤이 되면 그녀에게 갔다가 새벽에 담을 넘어 돌아오느라 본주사당의 담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어느 날, 백저 곁에서 깊은 잠에 빠진 동산노야가 새벽닭이 우는 바람에

혼비백산해서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 동산노야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점잖게 본주사당에 앉아

사람들의 배알을 받았다. 그러나 경건하게 향을 바치던 사람들은 동산노야의 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본주의 왼발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장군의 군화가 신겨져 있었지만

오른발에는 여인의 꽃신이 신겨져 있었던 것이다.

소교장촌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으니,

늘 단정하고 아름다운 백저의 오른발에 장군의 군화가 신겨져 있었다.

본주에게 절을 하던 마을 사람들은

근엄한 본주의 얼굴과 우스꽝스러운 본주의 신발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영험한 신통력을 가진 마을의 수호신들도 이렇게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아는

바이족 사람들, 열린 마음으로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늘도 유쾌하게 신들과 인간의 세계를 넘나든다.
- 경향, 2008년 03월 13일

-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