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신화기행] 윈난이야기
문자 - 하늘의 신이 인간에게 준 글 | |||||||||||||||||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언어가 없다면, 그리고 문자가 없다면 우리는 그런 애타는 마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간절한 몸짓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그 마음은 언어나 문자가 아니면 전달하기 힘들 것이다. 사랑의 노래도 언어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던가.
그러나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은 문자는 언어를 다 담지 못하고 언어는 마음 속의 뜻을 다 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애틋한 마음을 어찌 ‘사랑한다’는 단어 하나에 다 담아낼 수 있겠으며, 다하지 못한 가슴 속의 말을 어찌 짧은 편지 한 장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밤새도록 사랑의 말을 담은 글을 써서 상대방에게 보내고 난 후, 아침에 깨어나 그 글을 다시 읽었을 때 “아, 역시 명문이야”라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아무리 멋진 글, 달콤한 말이라고 해도 결국 다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만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자는 통발을 버렸고 비트켄슈타인은 사다리를 치웠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 있어, 그리고 글이 있어 ‘사랑한다’는 마음의 한 자락이라도 상대방에게 내보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언어와 문자는 존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 하루 종일 함께 일을 하고 돌아온 저녁, 모닥불 가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할 그 어떤 도구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총명한 자들을 뽑아 먼 곳으로 보내어 언어와 문자를 찾아오게 했다. 하지만 언어와 문자를 가져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 있는 천신이 인간들의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어와 문자를 나눠주기로 했다. 하늘나라 사신들이 지상으로 와서 알렸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기뻤다. 이족 사람들 역시 총명한 청년 하나를 뽑아 대표로 보냈다.
청년은 81개의 산을 넘고 49개의 강을 건넜으며 64개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 마침내 천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천신은 가장 먼저 온 청년을 기특하게 여겨 그를 잘 기억해두었다.
문자를 나눠주는 날, 천신은 쪄서 말린 둥근 메밀떡을 준비하여 그 위에 문자를 새겨서 각 민족 대표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면서 먹으라고 다른 메밀떡을 하나씩 더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신은 하필이면 ‘먹을 수 있는’ 메밀떡 위에 글자를 새겨주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신은 언제나 유혹자이다. 신은 늘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물론 그 시험을 이겨낸 자에겐 신의 은총이 따른다. 메밀떡은 바로 그 시험이다. 이족 청년 역시 씩씩하게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바람에 신이 준 메밀떡을 다 먹어버렸다.
길은 아직 멀었는데 양식은 떨어지고, 청년은 그만 기력을 잃고 쓰러지게 되었다. 시냇물을 마시며 버티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과 미소 짓는 천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손에 닿는 차가운 느낌이 이상해 눈을 떠보니 자신의 두 손에 송곳과 망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메밀떡 위에 새겨진 글자를 돌판 위에 그대로 새겨 넣고 몇 번을 대조해본 뒤 청년은 드디어 문자가 새겨진 메밀떡을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청년은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고 이족 사람들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와 문자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족은 종이에, 따이족은 패엽(貝葉)에, 하니족은 소가죽에 각각 신이 주신 문자를 받았는데 돌아오는 길이 험해 모두들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하니족이 스스로를 희생해 소가죽을 구워 다른 사람들에게 먹인 덕분에 문자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지혜도 사라진다. 아득한 옛날엔 인간과 동물 모두가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두가 말을 하니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신은 정해진 시간 내에 오는 자들에게 ‘지혜의 샘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마시면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는 물이었다.
동물들은 먼저 그 물을 마시려고 앞 다투어 달려갔고 동작이 좀 느렸던 청개구리가 뒤에 처졌다. 늦게 그 소식을 들은 인간은 맨 나중에 허둥지둥 달려왔는데 오다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느리게 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불쌍해서 인간은 청개구리를 안고 달려갔다. 그러자 청개구리는 감격하여 인간에게 샘물의 비밀을 일러준다. 결국 모든 동물들이 그 샘물을 마시는 바람에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샘물을 마시지 않은 인간만이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족에게는 여신이 문자를 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득한 옛날, 문자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나무에 새기거나 매듭을 지어 기록했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나무 조각과 매듭이 넘쳐 집안에 보관할 장소가 없게 되었다. 천신 무즈모가 그 모습이 안타까워 문자의 여신을 불러다가 인간에게 문자를 주라고 했다.
여신은 금 씨앗과 은 씨앗을 들고 지상으로 내려와 높고 험한 절벽에 씨앗을 뿌리고 매일 비를 내리게 해 물을 주었다. 한달이 지나자 싹이 트고 금잎과 은잎이 자라났으며 금꽃과 은꽃이 각각 3000송이씩 피었다. 향기가 천리 밖에 퍼졌고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몰려왔다. 여신은 그들 중에서 자신의 남편을 고르겠다고 했고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에 많은 남자들이 구애했다. 벼슬이 높은 자가 금과 은이 가득 찬 상자를 들고 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대 내게 시집오면 금과 은으로 평생을 즐겁게 해주리라. 이번엔 돈 많은 자가 비단을 들고 나타났다. 내게 시집오면 평생 비단으로 휘감을 수 있게 해주지. 권세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터, 가난한 자 누가 감히 나설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활을 들고 칼을 찬 멋진 사냥꾼이 왼손에는 대숲에 사는 새의 깃털을, 오른손에는 붉은 흙을 한 줌 들고 나타났다.
금은은 드리지 못하고/ 붉은 진흙 한줌 드립니다/ 내 부지런함의 상징이지요/ 새의 깃털을 드려요/ 사냥꾼의 선물이지요. 니스는 그림을 잘 그렸다. 해와 달, 산과 물, 꽃과 나무 등 무엇이든지 보는 대로 그렸지만 이상하게도 금꽃과 은꽃만은 잘 그릴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니스가 어머니에게 물으니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금나무와 은나무의 꽃을 따 그대로 보고 그렸더니 글씨들이 금꽃처럼 예쁘고 고왔다. 그렇게 금나무와 은나무에 매달린 6000송이의 꽃을 보고 글자를 다 썼을 때 여신은 하늘로 돌아갔고, 남겨진 남편과 아들 니스는 이족 마을에 글자를 퍼뜨렸다. 대부분의 소수민족 신화에서 문자는 하늘의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묘사된다. 자애로운 신들 덕분에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감사한 마음 때문에 최초의 문자들은 대부분 신의 뜻을 전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7) 이족 - 천지 만들고, 인간 길러낸 神 (0) | 2008.06.13 |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8) 이족의 즈거아루 (0) | 2008.06.13 |
차마고도 신비 서린 중국 윈난성 (0) | 2008.06.05 |
[고구려 코드…2000년의 비밀] 1. 고분벽화 장식무늬의 암호 풀다 (0) | 2008.06.02 |
[고구려 코드…2000년의 비밀] 2. 금속조각품 속의 靈氣무늬 (0) | 2008.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