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19. '한문의 벽'을 넘는 국역작업

Gijuzzang Dream 2008. 5. 23. 13:49

 

 

 

 

 [간도오딧세이] ‘한문의 벽’을 넘는 반가운 국역 작업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최근 국역한

‘동문휘고 강계 사료’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한글 세대에게

간도에 대한 지식은 수박 겉핥기에 가깝다.

거의 대부분의 자료가 한문으로 돼 있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한문을 잘 알아야 한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 상황도 그렇거니와

을유감계회담이 있었던 1885년 상황도 모두

한문으로 기록돼 있다.

청나라의 문서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사한 문서 역시 한문을

제대로 알면 상황을 한결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국역해

지난해부터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정계비

또는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치면

숙종 때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던 상황을 마치 신문 기사를 읽듯이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실록만으로는 부족하다.

 


한문으로 된 외교문서 국역 발간


실록 외에도 우리의 북방 영토에 대한 문헌은 많지만 아직 국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문의 벽을 쉽사리 넘어서지 못한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국역해 책으로 발간했다.

제목은 ‘국역 동문휘고 강계 사료’.

동문휘고(同文彙考) 중 영토에 관한 부분을 따로 뽑아 국역한 것이다.

동문휘고는 조선 후기의 외교 문서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인조 이후 고종까지 조선이 청나라 · 일본과 주고받은 외교 문서가 수록돼 있다.

여기에 숙종 때 백두산 정계비를 건립할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 오간 외교 문서가 실려 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은 이전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책으로 발간한 바 있다.

하지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던 상황에서 국역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접반사(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고위 관리)였던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오라총관 목극등에게 영토를 확정하는 데 함께 참여할 것을 간청하는 문서(1712년 5월 7일)를 보냈다.

 

 

 

조선 관리 요청에 대한 청나라 목극등 답신


 

이 문서에 대해 목극등은 5월 8일 답장을 썼다.

지난번에 보낸 서한을 보니,

장백산이 험준하여 행차하기 어려워서

내가 헛된 발걸음을 할 수 있는 정상(情狀)을 갖추어 말하였으니,

나를 위한 계책이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의 진실된 정성이 아니라면

어찌 간곡히 정성을 다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 몸은 성지(聖旨)를 받들었기에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어려움을 피하고 쉬운 것을 취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황제께서는 하늘이 사랑하는 자식이어서 하늘이 필시 소리 없이 도울 것이니

너무 얽매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서한의 뜻을 살펴보면 접대 사신 2명이 한 명이라도 따라갈 것을 간곡히 청하고 있는데,

이는 진실로 임금이 명한 뜻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산길이 가팔라 험난한 곳을 넘고 위험한 곳을 확인해 나아감에

모두 각기 걸어서 가야 하는데, 너희들처럼 나이가 많은 자는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간다면 반드시 공사(公事)를 그르칠 것이니 필히 너희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재청(再請)하지 말라(국역 동문휘고 강계 사료 109쪽).


결국 박권과 이선부는 백두산 정계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대표가 정계비를 세우는 것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국경을 확정 짓는 일에 당사국의 관리가 참여하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다.

 

‘동문휘고’에 실린 이 외교 문서는 당시의 이런 슬픈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 2008 07/15 경향, 뉴스메이커 783호
- 윤호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