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임금 금보(太祖 金寶)
조선시대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고
제왕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장을 어보(御寶)라고 한다.
이 어보는 왕위를 물려 주거나[傳國],
외교문서, 행정, 서적 반사(頒賜), 책봉(冊封) · 존숭(尊崇) · 추숭(追崇)의 의례 등에 사용하였다.
제왕을 상징하는 인장의 용어로는 원래 새(璽)와 보(寶)가 있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공무에 사용되는 관인(官印)과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하는 사인(私印)을 모두 새(璽)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한 이후
새(璽)는 천자만이 쓰고
신하나 관리는 인(印)과 장(章)을 쓰는 것으로 구별한 뒤
새(璽)가 제왕 인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후 당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새(璽)의 발음이 사(死)와 비슷하다 하여 보(寶)로 고치고 난 후
송 · 원 이래로 명 · 청대까지 새(璽)와 보(寶)가 제왕 인장의 명칭으로 함께 쓰였고,
두 글자를 합하여 새보(璽寶) 혹은 보새(寶璽) 등 합성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어보는 ‘새(璽)’를 쓰지 않고 ‘보(寶)’와 ‘인(印)’을 사용하였다.
어보에 ‘새(璽)’가 사용된 것은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를 만든 이후이다.
조선왕조의 어보는
크게 국가와 왕권을 상징 하는 국새인 대보(大寶),
왕명의 발동을 위한 행정 절차에 사용된 어보,
각종 의례에 사용된 어보의 3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중 대보는 국가를 상징하고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장의 명칭으로만 사용 되었다.
조선시대 대보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은 국왕의 즉위나 왕세자 책봉의 경우 중국의 황제로부터 승인을 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황제가 주변국의 왕을 승인하는 징표는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인장인 국새이다.
중국은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함께 금으로 만든(도금, 鍍金) 인장을 보내왔는데,
천자가 쓸 수 있는 새(璽) 혹은 보(寶) 대신에 ‘인(印)’자를 넣어「朝鮮國王之印」을 보내왔다.
조선은 이 인장을 국가와 제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 즉 국새(國璽)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국새를 필요한 모든 문서에 다 사용할 수 없었고
더구나 국내용 문서에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 새겨진 문구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대로부터 중국에서 보내온 국새를 대체할 어보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어보는
‘국왕행보(國王行寶)’, ‘국왕신보(國王信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과거지인(科擧之印)’, ‘유서지보(諭書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의 7가지 였다.
이후의 어보 제작과 사용을 확인하기 위해
1865년(고종 2) 편찬된 조선왕조 마지막 법전『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면
사대문서(事大文書)에 사용한 ‘대보(大寶)’,
교명(敎命) · 교서(敎書) · 교지(敎旨)에 사용한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諭書)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시권(試券) 및 홍패(紅牌) · 백패(白牌)에 사용한 ‘과거지보(科擧之寶)’,
어제(御製)에 사용한 ‘규장지보(奎章之寶)’,
규장각 각신에게 내린 교지에 사용된 ‘준철지보(濬哲之寶)’ 등 총 10과의 어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태조 금보는
위와 같은 국새나 행정 등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된 어보가 아니라,
국왕과 왕실의 존엄을 나타내고 선양하기 위해 각종 의례에 사용된 어보이다.
이는 왕실의 여러 책봉 의식과 존호(尊號) · 시호(諡號) · 묘호(廟號) 등이 올려질 때 마다 제작되어
종묘에 봉안 것으로 조선왕실의 끊어지지 않는 정통성의 상징으로 신성한 존숭의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는 생전의 덕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尊號)를 비롯하여
사후에도 행적을 기리는 호칭인 시호(諡號),
종묘 신실의 이름인 묘호(廟號),
왕릉의 이름인 능호(陵號),
추상존호(追上尊號), 추상시호(追上諡號) 등 수많은 호칭을 받았다.
조선시대 국왕으로서 생전에 존호를 받은 최초의 왕은 태조 이성계였다.
1399년(정종 1) 10월 권근(1352~1409)은 상소문을 통해 태조에게 존호를 올려야 한다고 요청하였고,
근거로 ‘근심하며 부지런히 덕을 쌓아 왕업을 창건하고 大統을 전하여
억만년 무궁한 基業을 열어 전하게 하였으니, 높은 공과 성한 덕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는 내용을 제시하였다.(『정종실록』 권2, 1년 10월 갑진)
이에 따라 태조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한 봉숭도감(封崇都監)이 정종 2년 6월에 설치되고,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4자의 존호를 올리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신무(神武)로써 조선을 창업한 공덕을 표시하는 호칭이었다.
(『정종실록』권4, 2년 6월 계축)
이후로 조선시대에는 살아있는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가 무수히 올려졌다.
이 금보는
1683년(숙종 9)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제작한 것이다.
(『숙종실록』권14, 9년 4월 신묘)
어보의 인면에는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왕지보(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之寶)’ 라고 새겼다.
‘강헌(康獻)’은 중국 명나라 황제가 내린 시호이며
‘지인계운(至仁啓運)’과 ‘성문신무(聖文神武)’는 1408년(태종 8)에 올린 존호와 시호이다.
(『태종실록』권16, 8년 8월 임오)
제왕의 사후에 시호를 거듭 올리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남아 후대의 왕들에게
왕조의 지속과 발전을 위한 힘과 지혜를 불어 넣는 열성조(列聖祖)를 찬양하기 위함이며,
끊어지지 않는 왕실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대전회통』,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 『조선시대 印章 연구』(성인근, 2007,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 「朝鮮時代의 寶印」(손환일, 2004, 『보인소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경인문화사)
- 「朝鮮時代 御寶 硏究」(임현우, 2007,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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