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항아리(胎缸)
인종(仁宗) 태항아리
태항아리는 태어난 아이의 태(胎)를 담아 놓은 항아리로
이 태항아리는 조선 12대 임금 인종(재위 1544~1545년)의 태항아리로서
조선 전기 왕실 백자 태항아리의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풍만하고 긴 몸체에 맑은 담청색(淡靑色)의 백자유(白磁釉)가 곱게 발라져 있으며
어깨에 끈을 묶기 위한 4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뚜껑의 꼭지에도 역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함께 묻힌 태지석(胎誌石)에는
1515년(중종 10)에 태어난 인종의 태가 세자가 된 후 1521년(중종 16) 안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종대왕의 태항아리를 안장한 태실(胎室)은 경북 영천군 청통면 은해사 뒤편 태실봉(胎室峯)에 있다.
왕조의 영원한 지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왕실이 번창 하여야 하고
지혜롭고 강건한 군주가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왕실의 출산과 교육은 왕조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간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자손을 얻고, 교육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조의 대를 잇는 왕손을 잉태한 왕비는 왕실의 풍속에 따라 태교와 출산을 행하였다.
임신 중에는 태아를 위해
성현의 고전을 탐독하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몸가짐을 소중히 하였다.
왕비의 잉태는 산모 뿐만 아니라 왕실과 온 백성의 기쁨이었기에
궁중 전체에서도 조심스럽게 행동하였고 부정한 것은 철저히 금하였다.
또한 임신과 해산 후 몸가짐, 아기를 씻기거나 목욕하는 방법 등을 세세하게 규정하여
지침서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조선 왕실 출산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성대한 의식을 갖춰 태를 갈무리하는 안태의식(安胎儀式)으로
이는 태를 갈무리하는 문화가 일찍 형성된 중국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산 후 3일째에 의녀(醫女)가 태항아리를 모시고 나오면
길한 방향에서 길어 온 물로 태를 백 번 씻고 다시 술로 씻었다.
항아리 밑바닥에 옛날 동전을 글자 면이 위로 가도록 놓은 후 그 위에 씻은 태를 넣었다.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단단히 묶은 후
다시 더 큰 항아리에 넣었다.
항아리와 항아리 사이는 솜을 넣어 고정시키고
항아리의 입구를 밀봉한 후 붉은 색 끈으로 묶고
누구의 태인지를 적은 붉은 색 목패를 뚜껑 위에 매달았다.
태항아리는 다시 산실(産室) 안에 모셔지며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이후에 태봉이 정해지면 태실을 만들고 안장하였다.
태봉(胎峯)에 태실(胎室)을 만들어 태항아리를 봉안하는 안태의식은
일반적으로 왕자는 생후 5개월, 왕녀는 3개월에 행해졌다.
태봉은 들판에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는 듯 한 둥근 야산을 선택 하였다.
태실 주변에는 벌목과 농사를 금지하였고,
그 바깥에 산불을 막기 위해 나무와 풀을 불사른 화소(火巢) 구역을 두었다.
태항아리가 도착하면 태봉 정상에 묻은 돌함에 항아리와 지석(誌石)을 넣고
덮개석을 덮은 후 흙으로 봉분을 쌓아 태실을 만들고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태의 주인이 왕이 된 경우에는 태실 위에 부도와 비슷한 석물을 올리고
주위에 팔각 난간석을 설치한 후 새로운 태실비를 세웠는데 이를 가봉(加封)태실이라 한다.
왕손에게 생명을 주고 미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여겨진 태를 담은 태항아리는
태실에 안장되어 소중히 지켜졌다.
조선 초기에는 도기가 사용되었고 15세기 전반에는 분청사기가,
15세기 후반부터는 백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백자태항아리는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廣州)에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설치된 후 발달하여
키가 큰 백자 내․외항(內外缸)이 규격화되고 어깨에 4개의 고리가 달리는 등 기본형태를 갖추었다.
백자태항아리의 본격적인 발달은 16세기 전반에 이루어져
큰 키의 양감 있는 형태와 옅은 푸른 빛이 도는 맑은 유색을 띤 단정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점차 키가 낮아져서 17세기 들어와서부터는
키가 작고 어깨가 벌어져 풍만하고 안정된 형태가 된다.
이러한 추세는 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유색 역시 변화하여 18세기에는 우윳빛 항아리가 만들어지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푸른 빛의 청백색으로 바뀐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항아리의 키는 더욱 작아지고 4개의 고리는 차츰 내려와 몸체 아래에 붙게 된다.
왕실 태실의 조성은 많은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힘든 작업으로 민폐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아기씨의 무병장수와 왕조의 번영이란 의미에서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윤용이, 1996, 학고재)
- 『한국 도자사의 연구』(강경숙, 2000, 시공사)
-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방병선, 2002, 돌베개)
-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방병선, 2005, 고려대출판부)
- 『조선왕실의 출산문화』 (장서각 편, 2005)
-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윤석인, 2000,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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