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문양 박쥐무늬
박쥐무늬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문헌의 기록과 자료로 보아서는 명대(明代)에 이르러 발생했다고 본다.
그 후 문양의 응용이 광범위해져서
明 말에서 淸 초에 크게 성행한 중국인이 가장 애호하는 전통문양이 되었다.
1. 설화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동물우화에 나오는 박쥐에 대한 이야기나
우리나라의 구전 및 문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박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홍만종의 『순오지』에는 ‘박쥐구실설화’가 있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박쥐가 자기 편한 대로 요리조리 변명을 하며 봉황과 기린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야기에 따라 그 결과 박쥐가 각 편의 미움을 받아
동굴에만 숨어 밤에만 나오게 되었다는 결말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2. 의미
부정적 이미지의 박쥐가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박쥐의 여러 가지 명칭 중 가장 보편화된 명칭인 ‘편복(蝙蝠)’의 ‘복(蝠)’이
중국인들이 현세에서 절실히 희구하는 ‘복(福)’과 음성적으로 같다는 것이 작용하였다.
또한 박쥐를 장수의 영물로서 인식하여 선의적인 이미지로 사용하였고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자손을 많이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박쥐 무늬를 애용하였다.
3. 명칭
‘편복(蝙蝠)’은 모든 종류의 박쥐를 다 일컫는 말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박쥐를 부를 때 날개를 펼쳐
그 날개로 매달린다고 해서 “부익(附翼)”이라 하였고
또 하늘 나라의 쥐라고 해서 “천서(天鼠)”,
동화 속의 쥐라 해서 “선서(仙鼠)”,
날아다니는 쥐라고 해서 “비서(飛鼠)”,
밤제비 같다 하여 “야연(夜燕)”이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름의 예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박쥐무늬
박쥐무늬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그 사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 중엽 이후 청(淸)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말기(19세기-20세기초)에 전성기를 맞게 되어
조선시대의 직물이나 장신구, 가구와 건축의 금속제 장식물, 자기 등의 여러 기물에
복(福)자를 대신해서 다양한 형태로 시문 되었다.
주로 장수와 복을 상징하던 것 이외에
장수(長壽), 부(富), 귀(貴), 강녕(康寧), 다남(多男)의 오복(五福)사상과 결합하여
현세의 기복적(祈福的) 길상(吉祥)의 상징적인 의미로
일상 생활용품에 박쥐를 표현하여 현실적인 염원을 담는 예가 많았다.
또한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의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을 쫓는 표상으로 부적에도 그려졌다.
박쥐무늬의 상징성
박쥐를 쌍으로 대치시켜 쌍복(雙福)의 뜻으로 복이 겹으로 들어오라는 염원을 담고 있고,
복(福)과 수(壽)자를 가운데 두고 박쥐 네 마리가 둘러싼 모양은 오복(五福)을 뜻한다.
당초문양이나 만(卍)자문과 곁들인 문양은
만대에 이르도록 장수하며 복을 받으라는 축송의 뜻을 지닌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박쥐와 여러 문양을 합성하여 백 여 종의 문양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참고문헌
<논문>
- 조선시대 박쥐 문양을 응용한 자수 모자 디자인 연구 이정은
- 조선조 공예에 나타난 박쥐 문양에 대한 연구 이일화
- 한국 현대 백자문양에 관한 연구 이진수
- 조선시대 예복에 나타난 문양에 관한 연구 김영희
<단행본>
- 한국문화상징사전 동아출판사
- 우리문화의 상징세계 김종대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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