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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검무의 효시 - 운심(雲心)

Gijuzzang Dream 2008. 5. 3. 12:09

 

 

 

 

 

 한국 검무의 효시 - 운심(雲心)

 

 




 

조선 오백 년의 춤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기억할 만한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아마도 선뜻 누구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국민 사이에 공감을 이끌어 낼 인물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18세기 밀양 출신의 운심(雲心)이

그 대상에 적합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조선 영조시대 관기로서 황진이를 능가하는 춤꾼이었고

뭇사내들의 오만함을 당당히 잠재웠던 한국 검무의 효시 운심을 소개한다.

운심은 밀양 출신의 기녀로서 당대 최고의 기생이자 춤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18세기에 그녀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서

그녀의 활약을 전하는 기록들이 산발적으로 전해온다.

그런 대접을 받은 무용가는 찾아볼 수 없다.


1769년에 묘향산을 등반한 박제가는

관서에서 절방이 가장 넓다는 용문사에서

기생들이 추는 검무(劍舞)를 구경하고

<검무기(劍舞記)>를 썼다.

그 글에서

“검무를 추는 근세의 기생으로 밀양의 운심을 일컬으니 내가 본 기생은 그의 제자라”고 했다.

운심이 얼마나 유명했고,

그녀의 검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비슷한 시기의 저명한 문인들이 한결같이

밀양출신의 운심이 검무의 달인이자 명기라고 추켜세웠다.

운심은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와서는 일약 장안의 제일가는 기생이라는 명성을 독차지했다.

 

밀양의 선비 신국빈은 그런 운심을 두 편의 시로 묘사했다.


 

“연아(煙兒)가 스물에 장안에 들어가

가을 연꽃처럼 춤을 추자 일만 개의 눈이 서늘했지

들으니 청루(靑樓)에는 말들이 몰려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 쉴 새가 없다지.”

 

 


“호서 상인의 모시는 눈처럼 새하얗고

송도 객주의 운라 비단은 값이 그 얼만가? 

술에 취해 화대로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

운심의 검무와 옥랑(玉娘)의 거문고뿐이라네.”


연아(煙兒)는 운심의 별칭이고,

나이 스물에 선상기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두 편의 시는 밝혀주고 있다.

운심이 춤을 춘 청루(靑樓), 곧 기생집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빽빽하고,

운심 때문에 젊은 귀족들이 한가할 틈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뛰어나게 춤을 잘 추는 기생으로 운심의 명성은 한 시대를 흔들었는데,

그 명성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광문자전>에도 도도하기 짝이 없는 인기 정상의 운심이 등장하고,

19세기의 유명한 야담집 《동야휘집》에도 그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조선 후기 무용계의 전설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큰 명성을 누렸다.

 

 


관중의 심리를 꿰뚫은 폭발적인 춤사위

 

무용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운심의 특기는 검무였다.

 

검무는 그 이전부터 춘 춤이지만

18세기 들어서

갑자기 전국적으로 널리 유행했고,

19세기에는 대표적인 춤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18세기에 검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에서 운심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남아 있는 자료만으론

검무의 발전사에서 그녀가 큰 위상을 차지한다고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관서 땅의 검무를 추는 기생 가운데 운심의 제자가 많다고 한

성대중과 박제가의 기록으로 미루어,

운심이 상당한 정도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운심의 위상을 이해하려면 그녀의 춤사위를 짐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운심이 직접 춘 춤사위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그 제자의 춤을 보고서 상세하게 기록한 박제가의 글이 남아있다.

검무의 특징은 그 다이나믹한 동작에 있는데 특히 운심의 검무는 박진감 넘쳤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추는 춤 가운데 검무보다 동작이 크고 활발한 것이 있었을까?

정적인 동작 위주로 짜인 춤사위 사이에서

유례가 없는 검무의 역동성은 세상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역동성에 비례해 춤이 끝난 뒤의 정적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박제가도 “좌석이 텅 빈 것같이 고요하여 말이 없다”고 묘사했으리라.

기록에 따르면, 운심은 무대에 올라서 곧바로 춤을 추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숨죽여 기다리던 관객이 조바심칠 때 비로소 빠른 춤사위를 펼쳐나갔다.

그런 행동을 두고, “세상에서 이른바 운심의 태도라는 게 이런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오랜 기다림 뒤에 펼쳐지는 역동적이고도 폭발적인 춤사위와

춤이 끝나고 난 뒤에 엄습하는 정적감을 유도하는 운심의 춤은

관중을 흠뻑 매료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보면, 운심은 관중의 심리까지 요리할 줄 알았던 천부적 무용가였던 것 같다.

 

 


당대 지식인들을 매료시킨 열정과 광기

 

운심은 뛰어난 춤꾼이었지만,

도도하면서도 협객의 정신을 지닌 협기(俠妓)로 보인다. 힘깨나 쓰는 자들의 요구에는 춤을 추지 않다가,

온갖 추태를 보이지만 인간미와 협기를 지닌 광문의 손장단에 일어나 시원하게 검무를 추었으니 말이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운심과 관련된 일화가 또 하나 실려 있는데,

운심이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과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백하라면 조선 후기 서예가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운심을 사랑했다.

최고 검무가와 최고 서예가의 사랑,

무언가 묘한 어울림이 느껴진다.

최고의 무용가다운 운심의 모습은 늙은 시절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이덕무는 《입연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밀양의 운심은 명기다. 절도사 이은춘(李殷春)이 영변부사로 재직할 때

아버지가 사랑하던 기생이라 하여 데리고 왔는데 운심은 벌써 늙어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운심이 동대(東臺)에 올라 한참 조망하였다. 갑자기 강개한 기분이 들어

‘밀양의 운심이가 약산의 동대에 올라 기쁨을 이기지 못해 뛰어내려 죽었다고

후세 사람들이 말한다면 어찌 장한 일이 아니랴!’하고, 치마를 감싸고 몸을 던졌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붙잡아 죽음을 모면했다.

사람들이 그 사연을 멋진 풍류로 전해온다.”


비록 술에 취해서 나온 말과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늙었어도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열정과 광기를 지녔었다.

 

성대중 역시 그녀를

“운심의 풍정과 성깔이 저와 같기에 한 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이런 사연이 전해진 것을 보면,

운심에 매료된 당대인의 심경을 짐작할 만하다.


밀양에는 그녀의 무덤이 아직껏 보존되고 있다.

밀양시 상동면 안인리 신안마을에 있는 작은 무덤이 운심의 무덤으로 알려져,

밀양 검무를 보존하는 회원들이 음력 팔월 초하루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밀양검무보존회에서는 3회째 밀양검무를 공연하고 있는데

운심의 검무를 계승하였음을 표방하고 있다.

 

운심의 춤은 이백 년 망각의 세월을 극복하고 이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제부터 그녀의 개성이 살아있는 춤사위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될 때가 아닌가 한다.
-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사진, 안대회, 국립국악원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walking through the path of life - Ernesto Cortaz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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